1995 년도

1995. 6. 11 / 너희도 온전하라 / 마태복음 5:17-20, 43-48

람보 2 2015. 3. 17. 15:08

너희도 온전하라 (1995. 6. 11 )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5:17-20, 5:43-48/ 1995. 6. 11.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는 지난 번 요한 웨슬리 회심기념 주일 설교를 통해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 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고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이정도면 되었다고 말할 수 없으며 직분을 맡거나 율법을 지켰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내 힘, 내 노력, 내 생각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돌아가셨음을 믿을 때 구원받습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만으로” 라는 사실은 우리 신앙의 유일한 근거이고 신앙고백의 핵심입니다. 웨슬리 목사님이 깨달은 것은 바로 우리는 믿음만으로 구원받으며, 그 믿음은 오직 성서만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웨슬리 목사님은 이것을 전하기 위해 일생을 바치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으며, 그렇기에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면, 결코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제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까?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았으니 우리는 계명과 율법을 지킬 필요 없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인가요?
만일 그렇다면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올더스게이트 사건 이후 Methodist라고 하는,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들 이라는 의미의 그 이름을 버렸어야 할 터인데 왜 그 이름을 그대로 간직했고 또 오늘 우리는 여전히 우리를 Methodist라고, 법칙주의자라고 부르고 있는가요?
저는 오늘 다시 한번 율법과 복음, 행위와 은혜의 관계를 살펴보고 싶은 것입니다.

서기 1945년 4월 9일 나치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가 패망하기 불과 얼마 전 플로센부르크에 있는 한 형무소에서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가 붙잡힌 젊은 목사 한 사람이 나치 독일에 의해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의 이름은 디트리히 본 회퍼였습니다.
1906년 2월 4일 독일의 브레슬라우라는 곳에서 태어난 그는 불과 20살의 젊은 나이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1929년 23세의 약관의 나이에 베를린 대학에서 대학교수 자격을 얻었습니다. 1930년 미국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서 연구하고 이듬해 베를린대학 강사 겸 베를린 공과 대학 교목으로 취임하여 목회하다가 1933년에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국가교회와 고백교회로 나누어지는 와중에 1936년 교목에서 쫓겨났습니다. 이후 런던의 독일인교회, 고백교회 목사 후보생 훈련소 소장을 거쳐 1939년 6월 미국으로 건너가 각지 순회강연을 하던 중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의 많은 친구들이 미국에 눌러 앉을 것을 권했지만 그는 조국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혼자 편안히 있다가 나중에 조국과 민족 앞에 어떻게 설 수 있겠느냐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조국 독일로 돌아갔습니다. 본 회퍼 목사는 끝내 히틀러 암살음모에 가담했다가 1943년 4월 5일 베를린 자택에서 비밀경찰에 의하여 체포된 후 2년간 옥살이한 끝에 39세의 젊은 나이에 교수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의 유명한 옥중서신을 통해 이렇게 그의 행위를 설명하였습니다.

미친 운전수가 사람을 죽이고 있는데
목사로서 죽은 사람들의 장례만 치루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올라가 운전수를 끌어낼 것인가?

바로 그 본 회퍼 목사가 평생 화두로 삼고 추구해 갔던 말씀은 바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는데 과연 주님을 따른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끊임없이 던지고 답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본 회퍼 목사는 당시 독일교회와 교인들이 그렇게도 급격하게 히틀러를 따라가고 국가권력의 횡포에 굴종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이유를 하나님의 참된 은혜를 너무나 값싼 은혜로 만들었기에 쉽게 저버리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의 우리의 싸움은 은혜를 귀하게 얻으려는 싸움이다. 값싼 은혜는 싸구려로 팔아버리는 상품과 같은 것으로 회개 없이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포하고 위로하고 성만찬을 베푸는 것이다. 은혜의 대가는 이미 지불되었기 때문에 언제나 공짜라고 하면서 제 마음대로 살며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와서는 교인인데 세상에서의 삶은 예수를 까맣게 잊고 사는 삶은 곧 값싼 은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은혜 받았다고 말은 하면서도 삶의 행위로 그것을 나타내지 못한다면 그 은혜는 그야말로 값싼 은혜인 것이다.

여러분!
본 회퍼 목사에 의하면 십자가를 잊어버린 은혜, 순종이 따르지 않는 은혜, 죄의 고백 없이 베푸는 성만찬, 회개에 대한 촉구 없이 죄의 용서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설교는 모두 값싼 은혜이며 이것은 결코 참다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아무것도 치룬 것 없이 믿음으로 구원받았지만, 하나님께서 값없이 은혜를 베푸셨지만 그러나 하나님 자신은 엄청난 값을 치루셨으니 곧 당신의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백화점의 바겐세일이나 가격파괴 상점에서 물건을 싸게 사서 헤프게 쓰고 막 버리는 것과 같이 은혜를 값싸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주시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라고 하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하고 값진 것이 들어있기에 우리는 그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내게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는 너희가 율법 하나라도 지키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자, 그렇다면 은혜를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갖고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보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그 유명한 산상수훈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산상수훈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분명히 산상수훈의 맨 처음인 5:1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제자들이 나아왔다. 바로 그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믿지 않는 세상 모든 사람을 상대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특별히 주님을 따르겠다고 나아온 바로 여러분들과 같은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소위 8복을 말씀하시고 이어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곧 이어서 오늘의 본문을 말씀하십니다. 5:17-20을 함께 읽읍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교우 여러분!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 말씀 중에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은 한 구절도 없습니다. 또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율법은 쓸데없는 것이라는 말씀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율법을 적극 옹호하는 말씀만 들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이 결코 율법이나 선지자 곧 구약의 말씀을 없애버리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온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가르치고 또 지키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고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는 자는 천국에 가기는 가지만 지극히 작다고 일컬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덧붙이시기를 너희 곧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의 의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여러분!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하박국의 말씀은,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쓰여진 사도바울의 로마서는 그리고 그 믿음을 이어 받은 마틴 루터나 요한 웨슬리의 믿음은 다 잘못된 것인가요? 그리고 지난번에 제가 했던 설교도 잘못된 것인가요?
예수께서는 분명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타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사실 율법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는 완전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하루는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시험 삼아 슬쩍 물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되물으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그러자 그 율법사는 아주 당당하게 대답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그 율법사의 대답은 아주 정확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대답이 옳은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그런데 여러분!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이 이야기에 어떤 말이 덧붙어 있는지 아십니까? 예수님과 율법사 사이에 앞의 대화가 오간 다음에 바로 이어서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나오는데 그 비유의 맨 처음인 29절에 이런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에게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님을 찾아온 그 율법사는 분명히 계명의 핵심은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임을 알고 있었고, 또한 자기는 그것을 다 지켰기에 그것을 인정받으려고 예수께 더 말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율법사 그는 율법의 모든 계명을 다 지켰기에 예수님 앞에서 당당히 옳다고 인정받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관원이었던 부자 청년 이야기는 이미 지난번에 했었지요.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 여러 가지 계명 곧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대답하셨을 때 그 청년은 자랑스럽게 대답했지요.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여러분, 그뿐입니까?
누가복음 18:9, 14에 나오는 바리새인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루는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왔는데 하나는 바리새인이고 하나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기도하고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였는데 바리새인은 참으로 큰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바로 저기 있는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나는 율법에 정해진 대로 일주일에 두 번씩 꼬박꼬박 금식하고 또 단 한 푼도 떼어먹지 않고 정확히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다 아시지요?”

교우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 율법사들의 의를 따라갈 수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십일조 떼어먹는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물건을 살 때에는 반드시 십일조를 미리 바친 바리새인들의 물건만 사려했고 또 그렇지 못할 경우 십일조를 바친 물건인지를 확인했고 그리고는 또 수입의 십일조를 바치던 사람들이었는데 우리 가운데 그 누가 그들의 의를 따라갈 수 있습니까?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우리를 향해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으니 그렇다면 우리 가운데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될 것인가요?

예수께서는 이어서 계속 참으로 받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형제를 향하여 “미련한놈” 이라고 하면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
네눈이 범죄하면 차라리 눈을 빼버려라. 절대로 맹세하지 마라.
누가 네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도 때리라고 내밀어라.

그리고는 오늘의 본문 중에 다른 한 부분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 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오.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5:43-48)

여러분!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 말씀이 가능한 것입니까?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요? 하나님께서 태양과 비를 모든 사람에게 고루 베풀듯이 그렇게 하라고요? 그건 하나님이시니까 가능한 일이지, 사람이 우리에게 그런 일들이 어떻게 가능한가요?
그리고는 마지막에 이렇게까지 말씀하시지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왜냐하면 그래야 너희가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건 예수님이라면 몰라도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될 법이나 한 말씀인가요?

저는 여기에서 다시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 청년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을 향해 당당하게 “내가 어려서부터 모든 율법을 다 지켰습니다” 라고 큰소리쳤던 그 청년을 향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그렇습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다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말씀드려서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다 지킨다는 사실,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율법을 지키느냐, 다른 말로 바꾼다면 진정 율법의 완성이신 주님을 좇는 삶을 살아가고 있고, 주님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 율법을 지켰다고, 신앙생활 오래 했다고, 교회에서 높은 직분을 가졌다고 그것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결국 우리는 율법에서 명령하는 대로 살인하면 안되고, 간음하면 안되고,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해야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만일 나의 자기만족이나 나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모두 헛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따르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낼 때 결과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즉 율법의 정신을 사랑으로 나타내는 행위가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인 것입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들이지만, 한계를 가진 인간들이지만 그러나 우리의 삶의 목표를 하나님께 두고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우리의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는 삶 그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의요,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실 때의 그 온전함인 것입니다.

여러분!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오늘의 본문 5:48을 근거로 그리스도인의 목표를 완전에 이르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완전은 어떤 것인가? 그는 “기독자 완전” 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의도의 순수성이요, 동기의 순수성이다. 또한 삶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그것은 온갖 더러움과 모든 내적, 외적 불결을 탈피하는 마음의 할례다.
그것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 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아무리 신앙생활 오래하고 어떤 직분을 갖고 있다 해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았음을 믿는 사람은, 그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성화의 삶을 향해 정진해야하고 완전을 향해 매일매일의 삶을 헌신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본 회퍼 목사님의 말을 빌리면 “사랑으로 순종하며 사는 삶” 그것이 바로 온전한 삶이며 웨슬리 목사님의 말을 빌리면 진정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사는 삶 그것이 바로 온전한 삶인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노래한 사랑의 찬가는 언제 어디서나 참된 진리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속에 주님의 사랑이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가정 위에 주님의 사랑이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교회 위에 주님의 사랑이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