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
하박국 2:1-4, 로마서 1:13-17/ 1995. 5. 21.
오늘은 세계 각처에 퍼져있는 모든 감리교회가 감리교회의 생일로 지키는 요한 웨슬리 회심 기념 주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57년 전인 1738년 5월 24일 영국 국교회 목사였던 요한 웨슬리 목사님이 로마서 1:17의 말씀을 통해 회심을 하고 구원을 체험하는 일을 통해 영국과 미국 그리고 온 세계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던 감리교가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 내에 복음주의 운동을 일으켰던 웨슬리의 회심은 분명히 회심한 날짜를 추정할 수 있는 갑작스럽고도 명백한 은혜 체험의 표본이고, 이 체험은 그 후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일단의 복음주의 운동의 특징을 이루었습니다.
고 윤주봉 목사님께서 살아 생전에 그렇게도 강조하셨던 복음주의 신앙은 곧 요한 웨슬리 목사님의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것이고 그것은 마틴 루터, 사도 바울, 그리고 멀리는 선지자 하박국에까지 그 뿌리를 찾아 올라갈 수 있는 신앙 노선인 것입니다.
비록 요한 웨슬리 자신은 이날 이전에 자신의 삶이 죄스러웠다고 강조했지만, 그는 1703년에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사무엘은 학식은 있었으나 약간 까다로운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어머니 수잔나는 아름다움, 학식, 재능 그리고 신앙 면에서 비범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19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 중 아홉 명만이 성장하였고 이들 중에 바로 요한과 수많은 찬송을 지었던 챨스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 요한과 챨스는 기독교의 역사를 변혁시킨 인물들인데 그들의 어머니 수잔나는 아들들의 생애에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남겨 주었으며 특히 요한이 받은 영향이 더 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동생 챨스는 주옥같은 찬송시를 남김으로 우리에게 언제나 감명을 주고 있는데 예를 들어 333장은 언제나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나게 만듭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흘려 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어쨌든 어머니 수잔나는 읽기, 쓰기, 셈하기 뿐 아니라 라틴어, 희랍어, 역사, 문학, 종교에 이르기까지 손수 자녀들을 교육시켰습니다. 그녀는 자녀들에게 철저한 신앙 교육과 신학교육을 시켰고 어려서부터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을 생활화시켰으며 도덕적으로도 흠이 없을 만큼 모범적인 생활을 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어머니 수잔나는 매일저녁 자녀들과 돌아가면서 자녀들 각자의 교육적, 영적 성장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고 그 결과 요한 웨슬리는 후에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했을 때에도 여전히 어머니가 집에서 가르쳐 준 그 엄격한 생활을 계속 유지하였습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모교에서 강사로 일하기도 하였고 특히 1725년 목사안수를 받은 뒤 1729년부터 대학에서 동생 챨스와 함께 기독교적인 정신으로 자신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모임을 만들고 그 지도자가 되었는데 모임 이름을 “Holy Club," 소위 신성구락부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나쁜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종교에 대한 열심을 갖고서 성경을 연구하고 규칙적으로 기도하고 교회출석을 충실히 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그가 그의 부모로부터, 그리고 영국국교회로부터 물려받은 구원관이기도 했습니다. 무언가 내가 공로를 쌓아야, 내가 이러저러한 일을 해야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고 나를 구원해 주신다는 것 말입니다.
웨슬리 일행이 너무나 엄격하게 훈련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그들을 경멸하는 뜻으로 ”Methodist" 즉 “규칙주의자”들로 불렀으니 이것이 후에 중국에 전해지면서 감독 중심의 교회라 하여 감리교회라는 말로 번역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그 옛날 초대교회 때 안디옥에 복음이 전해지면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을 크리스챤을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예수쟁이와 같이 비웃는 듯한 뜻이 담겨있었는데 Methodist 역시 비웃는 뜻으로 시작되어 이후 우리 감리교회의 정식 명칭이 되었습니다.
비웃음으로 시작된 이름들이 나중에 자랑스러운 명칭으로 변했다면 과연 오늘 우리는 그 이름에 걸 맞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요? 참으로 크리스챤이라고 불릴 만한지, 또한 Methodist라고, 감리교인이라고 불리울 만한 철저한 신앙의 훈련을 쌓고 있는지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웨슬리가 Holy Club을 이끌면서 무언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고자 애쓰고 있을 당시 영국 사회는 한참 급격한 산업혁명을 겪으면서 새로 발견한 미 대륙을 식민지로 만들어 한참 개척해 들어가던 때였습니다.
이때 미 대륙 주둔 영국군의 사령관이 오글레토프 장군이었는데 그는 새 대륙에 이상적인 교회를 세워 보겠다는 큰 포부를 안고 귀국하여 그 일을 맡길 만한 젊은 일꾼을 찾았고, 바로 그때 발탁된 사람이 바로 요한 웨슬리였습니다.
웨슬리, 그는 새로운 세상에서 초대교회의 모습을 이루어 보겠다는 이상을 가지고 미 대륙으로 건너가서 죠지아 주를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참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유능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교는커녕 뜻밖에도 그곳에서 한 여인과의 사랑에 실패하고, 또 건강도 잃어버린 채 영국으로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의 일기에 그 당시의 슬픔과 고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인디언들을 구원시키기 위하여 아메리카에 갔었다.
그러나 나를 구원시킬 사람은 누구일까?
이 불신앙의 악한 마음으로부터 나를 구할 자는 누구이며 또 무엇이겠는가!
나는 외관상으로는 아주 독실한 신앙을 갖고 있으며 설교도 훌륭하게 잘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어려움이 없을 때에만 믿음이 좋은 것이다.
나는 밝은 여름철의 신앙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죽음이 내 앞에 직면해 올 때 나의 영혼은 걷잡을 수 없이 괴로워진다.
사도 바울처럼 “죽는 것도 내게 유익하다”라는 고백을 담담히 할 수가 없지 않은가?
오! 누가 나를 이 죽음의 공포로부터 구해 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영국으로 돌아오는 배를 타고 여행하던 중에 웨슬리는 큰 폭풍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파도는 배를 때렸습니다. 배는 마치 하나의 나뭇잎과 같이 이리저리 요동치며 곧 침몰할 것 같은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말할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이제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찬송은 나오지 않았고 기도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배 한 쪽 구석에서 찬송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몇 사람이 흔들리는 배 한쪽 구석에 둘러 앉아 찬송을 부르고 있었는데 그들의 얼굴은 한없이 평화스러워 보였습니다. 웨슬리는 참으로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저들의 평안함은 어디서 오는가 스스로 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목회를 포기해야 되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런던으로 돌아온 웨슬리는 1736년 4월 6일. 바로 그 모라비안 교도였던 피터 뵐러 목사를 만났습니다. 웨슬리는 그에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 자신이 신앙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내가 어떻게 남에게 설교를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믿음이 생기기 전에는 설교하지 않겠다.”
웨슬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그가 아무리 훌륭한 목사요, 옥스퍼드 대학 출신이요, 또한 그 대학의 교수요, 모든 영국인이 부러워하는 유망한 청년이었다 할지라도 그의 마음속에 가졌던 심각한 갈등 속에서 방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피터 뵐러 목사는 웨슬리에게 “절대로 설교를 그만 두지 마시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웨슬리는 “그러나 내가 뭣을 설교해야 합니까?”라고 물었고 이에 대해 뵐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신앙을 가질 때까지 신앙을 설교하시오. 그러면 당신은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신앙을 설교하게 될 것이오.”
그러나 이후에도 웨슬리는 여전히 인간의 선한 행위, 율법을 지킴 등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과 자기 자신의 죄를 도저히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는 미국 죠지아 주에 있을 때 스팬겐버그(Spangenberg)로부터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웨슬리는 “나는 그가 이 세상의 구주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라고는 대답했지만 “정말로 그가 당신의 구주이심을 아십니까?” 라는 다그치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렇다면 오죽이나 좋을까?” 라고 밖에는 대답을 할 수 없었는데 그 상태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운명의 날, 1738년 5월 24일 웨슬리는 일생이 바뀌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일(1738년 5월24일)의 일기에서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으니 이제 그의 일기를 직접 읽어 보겠습니다.
1738년 5월 24일 (수)
오전 5시경 신약을 열고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베드로후서 1:4)”하는 말씀을 읽었다.
또 외출하기 전에 성경을 펴니 “너는 하늘나라에서 멀지 않다”는 말씀이 나왔다. 하오에 성 바울 성당에 갔다. 그곳에서 찬송가를 들었다.
주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사오니 주여, 내 목소리를 들으시옵소서.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옵소서. 주여! 만일 주께서 모든 불의를 주시하시면 누가 감히 주 앞에 서리이까? 그러나 주께는 자비가 있으매 사람들은 주를 경외하나이다. 이스라엘아 주를 의지하라. 주 안에는 자비가 있으며 풍족한 구속이 있으니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로부터 구원하여 내시리로다.
저녁에 나는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모이는 집회에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그곳에 갔었다. 집회에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었다. 9시 15분 전쯤 그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서 역사하사 일으키시는 변화를 말할 때에, 내 마음이 이상하게도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리스도를 의지하였다. 구원에 있어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나 같은 죄인의 죄까지도 없이하시고 사망과 죄의 율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자, 5월 24일에 있었던 이 올더스게이트 체험이 어째서 그렇게 중요한가요? 이 사건 이전에 웨슬리가 갖고 있었던 믿음, 그의 부모가 갖고 있었고 당시 영국 교회가 갖고 있었던 믿음은 신념이었습니다. 즉 믿음은 하나의 인간적 행위 곧 동의와 신뢰의 행위였습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예수에 관한 복음의 진리들”에 대한 동의였습니다. 이것은 곧 믿음이란 예수께서 이러저러한 설교를 하셨다든가, 이러저러한 기적을 행하셨다는 사실에 대해 내가 동의한다는 차원이었습니다. 믿음이란 예수에 대하여 아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산상설교를 행하셨다든가, 여러 가지 비유를 가르치셨다든가, 5병 2어의 기적을 행하셨다든가,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가 하는 성경의 기록을 그것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동의하고 그런 일이 있었다고 믿는다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올더스게이트 사건 이후 이렇게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 믿음이란 머리 속에서만 맴도는 생명없는 차디찬 동의이거나 어떤 이론과 같은 사변적이고 합리적인 것이 아니고 마음의 상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그리스도의 보혈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의 공로에 대한 신뢰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세상에 오셨고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신 우리의 구속이 되시고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분으로 알아 의지하는 것이다.“
결국 웨슬리에게 있어서 믿음은 예수님에 관하여 아는 단계가 아니라, 그 단계를 넘어서서 예수께서 바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그것을 믿기만 하면 나를 의롭다 인정하시고 내 모든 죄를 없이 하시고 나를 당신의 자녀 삼으신다는 것을 마음으로 느끼고 뜨겁게 체험하는 일, 그것이 바로 올더스게이트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깨달음을 체험할 때 웨슬리의 마음을 움직였던 말씀, 그것이 바로 로마서1:17에 나오는 바로 그 말씀이었으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이었고 그는 그 체험 후 오늘 저와 똑같은 제목 곧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고 이것은 감리교회의 기본을 이룬 설교였던 것입니다.
서기 1483년 독일에서 농부였다가 후에 광부가 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마틴 루터, 그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출세할 수 있는 길인 법학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친구와 둘이서 시골 길을 걷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와 함께 벼락이 내리쳤는데 그만 옆에 가던 친구가 벼락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놀라서 겁에 질린 마틴 루터는 저도 모르게 털썩 무릎을 끊고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성 안나여, 나를 도우소서. 나는 수도승이 되겠나이다.”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끝내 수도승이 된 마틴 루터는 수도원에서의 엄격한 수행, 진지한 학문과 가르침, 꽉 짜인 경건의 일정 등을 거쳤지만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지옥에 대한 불안 등으로 두려움에 빠져 그것을 이기기 위해 로마에 가서 남들이 하던 대로 성 베드로 대성당의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며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마틴 루터의 마음에 힘차게 울려 퍼진 말씀, 그것은 바로 로마서 1:17의 말씀이었으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던 계단에서 벌떡 일어섰고 후에 종교 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었습니다.
남왕국 유다의 350년 역사상 나타났던 스무 명의 임금 중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올바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했던 임금 가운데 하나로 꼽히던 요시아 임금 때 주위의 강대국 앗수르가 세력을 잃고 애굽도 약해져서 유다는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다시 한 번 다윗시대의 영광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요시아 임금은 두 번에 걸친 종교개혁으로 우상숭배를 없애버리고 또 주위 영토도 많이 되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유다민족을 축복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뜻밖에도 요시아 임금은 애굽 군대와 싸우다가 그만 40세의 한창 나이에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유다 왕국은 급속히 몰락하기 시작했고 바빌론이라는 나라가 급격히 세력을 얻으면서 순식간에 유다 온 땅을 휩쓸었습니다.
바로 이 시대에 한 사람의 예언자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이 바로 하박국이었습니다. 그는 요시아 임금에게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역사를 이루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요시아 임금은 죽었고 또다시 나라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지배층은 지배층대로 권력을 행사하고 백성들은 못살겠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고
“폭력이다!” 하고 외쳐도
구해주지 않으시니
주님,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어찌하여 나로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악을 그대로 보기만 하십니까?
약탈과 폭력이 제 앞에서 벌어지고,
다툼과 시비가 그칠 사이가 없습니다.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합니다.
악인이 의인을 협박하니,
공의가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표준새번역, 하박국서 1:2-4)
어째서 악인은 큰소리치고 의인은 어려움을 당해도 내버려 두시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엉뚱하게도 바빌론 사람들을 들어 쓰시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바빌론 사람들이 심판의 도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박국은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아니 바빌론 같이 악한 민족이 하나님의 도구라니 어찌 그럴 수 있는가? 하박국은 그럴 수 없다고, 그래도 유다 민족은 선민이고 율법을 지키느라고 애썼는데 바빌론 사람들의 침략을 그대로 당해야 하다니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하나님께서 항의하였습니다.
“내가 초소 위에 올라가서 서겠다.
망대 위에 올라가서
나의 자리를 지키겠다.
주님이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지 기다려 보겠다.
내가 호소한 것에 대하여 주께서
어떻게 대답하실지를 기다려 보겠다“ (표준새번역, 하박국서 2:1)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하신 대답 그것이 바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2:4)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이 정도면 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나는 율법 조항을 성경구절을 다 지켰으니 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내가 교회에서 이런 저런 직분을 맡아 그 누구보다 열심히 했으니 다 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네 신앙생활이 왜 그 정도냐고 손가락질할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내 힘. 내 노력. 내 생각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만이 나를 위해 돌아가셨음을 믿을 때 구원받는 것입니다. 예수를 내 삶의 전부로 알고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살아갈 때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께서 살아계셔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심을 날마다 체험하며 살아가는 삶의 과정이 곧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인 것입니다.
물론 이 일은, 구원의 확신은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구원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서 처절한 씨름을 해야 할 때도 있고, 며칠 몇 밤을 기도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내 삶의 근원이 어디인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는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인지,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내 삶의 목표는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등의 문제를 놓고 치열한 고민과 번민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되고,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구원의 감격 속에서 하나님께 헌신하면서 사는 삶이 곧 웨슬리 목사님이 말씀하신 성화의 과정인 것입니다.
결국 웨슬리가 깨달은 것은
믿음으로만(Sola fide)
성서만으로(Sola Scriptura)
은총만으로(Sola gratia)
인 것이고 오늘 우리의 구원은 오직 믿음, 성서, 은총 만으로인 것입니다. 창립 100주년을 향해 가고 있는 우리 교회가 나아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그것 역시 웨슬리 목사님이 깨달은 바 믿음으로, 성서만으로, 은총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교회되는 것입니다.
웨슬리의 회심주일을 맞아 믿음만으로, 성서만으로, 은총만으로 구원받는 은혜가 그리고 은혜에 감격하여 사는 삶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박국 2:1-4, 로마서 1:13-17/ 1995. 5. 21.
오늘은 세계 각처에 퍼져있는 모든 감리교회가 감리교회의 생일로 지키는 요한 웨슬리 회심 기념 주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57년 전인 1738년 5월 24일 영국 국교회 목사였던 요한 웨슬리 목사님이 로마서 1:17의 말씀을 통해 회심을 하고 구원을 체험하는 일을 통해 영국과 미국 그리고 온 세계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던 감리교가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 내에 복음주의 운동을 일으켰던 웨슬리의 회심은 분명히 회심한 날짜를 추정할 수 있는 갑작스럽고도 명백한 은혜 체험의 표본이고, 이 체험은 그 후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일단의 복음주의 운동의 특징을 이루었습니다.
고 윤주봉 목사님께서 살아 생전에 그렇게도 강조하셨던 복음주의 신앙은 곧 요한 웨슬리 목사님의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것이고 그것은 마틴 루터, 사도 바울, 그리고 멀리는 선지자 하박국에까지 그 뿌리를 찾아 올라갈 수 있는 신앙 노선인 것입니다.
비록 요한 웨슬리 자신은 이날 이전에 자신의 삶이 죄스러웠다고 강조했지만, 그는 1703년에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사무엘은 학식은 있었으나 약간 까다로운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어머니 수잔나는 아름다움, 학식, 재능 그리고 신앙 면에서 비범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19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 중 아홉 명만이 성장하였고 이들 중에 바로 요한과 수많은 찬송을 지었던 챨스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 요한과 챨스는 기독교의 역사를 변혁시킨 인물들인데 그들의 어머니 수잔나는 아들들의 생애에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남겨 주었으며 특히 요한이 받은 영향이 더 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동생 챨스는 주옥같은 찬송시를 남김으로 우리에게 언제나 감명을 주고 있는데 예를 들어 333장은 언제나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나게 만듭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흘려 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어쨌든 어머니 수잔나는 읽기, 쓰기, 셈하기 뿐 아니라 라틴어, 희랍어, 역사, 문학, 종교에 이르기까지 손수 자녀들을 교육시켰습니다. 그녀는 자녀들에게 철저한 신앙 교육과 신학교육을 시켰고 어려서부터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을 생활화시켰으며 도덕적으로도 흠이 없을 만큼 모범적인 생활을 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어머니 수잔나는 매일저녁 자녀들과 돌아가면서 자녀들 각자의 교육적, 영적 성장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고 그 결과 요한 웨슬리는 후에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했을 때에도 여전히 어머니가 집에서 가르쳐 준 그 엄격한 생활을 계속 유지하였습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모교에서 강사로 일하기도 하였고 특히 1725년 목사안수를 받은 뒤 1729년부터 대학에서 동생 챨스와 함께 기독교적인 정신으로 자신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모임을 만들고 그 지도자가 되었는데 모임 이름을 “Holy Club," 소위 신성구락부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나쁜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종교에 대한 열심을 갖고서 성경을 연구하고 규칙적으로 기도하고 교회출석을 충실히 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그가 그의 부모로부터, 그리고 영국국교회로부터 물려받은 구원관이기도 했습니다. 무언가 내가 공로를 쌓아야, 내가 이러저러한 일을 해야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고 나를 구원해 주신다는 것 말입니다.
웨슬리 일행이 너무나 엄격하게 훈련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그들을 경멸하는 뜻으로 ”Methodist" 즉 “규칙주의자”들로 불렀으니 이것이 후에 중국에 전해지면서 감독 중심의 교회라 하여 감리교회라는 말로 번역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그 옛날 초대교회 때 안디옥에 복음이 전해지면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을 크리스챤을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예수쟁이와 같이 비웃는 듯한 뜻이 담겨있었는데 Methodist 역시 비웃는 뜻으로 시작되어 이후 우리 감리교회의 정식 명칭이 되었습니다.
비웃음으로 시작된 이름들이 나중에 자랑스러운 명칭으로 변했다면 과연 오늘 우리는 그 이름에 걸 맞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요? 참으로 크리스챤이라고 불릴 만한지, 또한 Methodist라고, 감리교인이라고 불리울 만한 철저한 신앙의 훈련을 쌓고 있는지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웨슬리가 Holy Club을 이끌면서 무언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고자 애쓰고 있을 당시 영국 사회는 한참 급격한 산업혁명을 겪으면서 새로 발견한 미 대륙을 식민지로 만들어 한참 개척해 들어가던 때였습니다.
이때 미 대륙 주둔 영국군의 사령관이 오글레토프 장군이었는데 그는 새 대륙에 이상적인 교회를 세워 보겠다는 큰 포부를 안고 귀국하여 그 일을 맡길 만한 젊은 일꾼을 찾았고, 바로 그때 발탁된 사람이 바로 요한 웨슬리였습니다.
웨슬리, 그는 새로운 세상에서 초대교회의 모습을 이루어 보겠다는 이상을 가지고 미 대륙으로 건너가서 죠지아 주를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참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유능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교는커녕 뜻밖에도 그곳에서 한 여인과의 사랑에 실패하고, 또 건강도 잃어버린 채 영국으로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의 일기에 그 당시의 슬픔과 고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인디언들을 구원시키기 위하여 아메리카에 갔었다.
그러나 나를 구원시킬 사람은 누구일까?
이 불신앙의 악한 마음으로부터 나를 구할 자는 누구이며 또 무엇이겠는가!
나는 외관상으로는 아주 독실한 신앙을 갖고 있으며 설교도 훌륭하게 잘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어려움이 없을 때에만 믿음이 좋은 것이다.
나는 밝은 여름철의 신앙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죽음이 내 앞에 직면해 올 때 나의 영혼은 걷잡을 수 없이 괴로워진다.
사도 바울처럼 “죽는 것도 내게 유익하다”라는 고백을 담담히 할 수가 없지 않은가?
오! 누가 나를 이 죽음의 공포로부터 구해 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영국으로 돌아오는 배를 타고 여행하던 중에 웨슬리는 큰 폭풍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파도는 배를 때렸습니다. 배는 마치 하나의 나뭇잎과 같이 이리저리 요동치며 곧 침몰할 것 같은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말할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이제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찬송은 나오지 않았고 기도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배 한 쪽 구석에서 찬송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몇 사람이 흔들리는 배 한쪽 구석에 둘러 앉아 찬송을 부르고 있었는데 그들의 얼굴은 한없이 평화스러워 보였습니다. 웨슬리는 참으로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저들의 평안함은 어디서 오는가 스스로 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목회를 포기해야 되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런던으로 돌아온 웨슬리는 1736년 4월 6일. 바로 그 모라비안 교도였던 피터 뵐러 목사를 만났습니다. 웨슬리는 그에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 자신이 신앙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내가 어떻게 남에게 설교를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믿음이 생기기 전에는 설교하지 않겠다.”
웨슬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그가 아무리 훌륭한 목사요, 옥스퍼드 대학 출신이요, 또한 그 대학의 교수요, 모든 영국인이 부러워하는 유망한 청년이었다 할지라도 그의 마음속에 가졌던 심각한 갈등 속에서 방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피터 뵐러 목사는 웨슬리에게 “절대로 설교를 그만 두지 마시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웨슬리는 “그러나 내가 뭣을 설교해야 합니까?”라고 물었고 이에 대해 뵐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신앙을 가질 때까지 신앙을 설교하시오. 그러면 당신은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신앙을 설교하게 될 것이오.”
그러나 이후에도 웨슬리는 여전히 인간의 선한 행위, 율법을 지킴 등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과 자기 자신의 죄를 도저히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는 미국 죠지아 주에 있을 때 스팬겐버그(Spangenberg)로부터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웨슬리는 “나는 그가 이 세상의 구주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라고는 대답했지만 “정말로 그가 당신의 구주이심을 아십니까?” 라는 다그치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렇다면 오죽이나 좋을까?” 라고 밖에는 대답을 할 수 없었는데 그 상태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운명의 날, 1738년 5월 24일 웨슬리는 일생이 바뀌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일(1738년 5월24일)의 일기에서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으니 이제 그의 일기를 직접 읽어 보겠습니다.
1738년 5월 24일 (수)
오전 5시경 신약을 열고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베드로후서 1:4)”하는 말씀을 읽었다.
또 외출하기 전에 성경을 펴니 “너는 하늘나라에서 멀지 않다”는 말씀이 나왔다. 하오에 성 바울 성당에 갔다. 그곳에서 찬송가를 들었다.
주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사오니 주여, 내 목소리를 들으시옵소서.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옵소서. 주여! 만일 주께서 모든 불의를 주시하시면 누가 감히 주 앞에 서리이까? 그러나 주께는 자비가 있으매 사람들은 주를 경외하나이다. 이스라엘아 주를 의지하라. 주 안에는 자비가 있으며 풍족한 구속이 있으니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로부터 구원하여 내시리로다.
저녁에 나는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모이는 집회에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그곳에 갔었다. 집회에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었다. 9시 15분 전쯤 그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서 역사하사 일으키시는 변화를 말할 때에, 내 마음이 이상하게도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리스도를 의지하였다. 구원에 있어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나 같은 죄인의 죄까지도 없이하시고 사망과 죄의 율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자, 5월 24일에 있었던 이 올더스게이트 체험이 어째서 그렇게 중요한가요? 이 사건 이전에 웨슬리가 갖고 있었던 믿음, 그의 부모가 갖고 있었고 당시 영국 교회가 갖고 있었던 믿음은 신념이었습니다. 즉 믿음은 하나의 인간적 행위 곧 동의와 신뢰의 행위였습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예수에 관한 복음의 진리들”에 대한 동의였습니다. 이것은 곧 믿음이란 예수께서 이러저러한 설교를 하셨다든가, 이러저러한 기적을 행하셨다는 사실에 대해 내가 동의한다는 차원이었습니다. 믿음이란 예수에 대하여 아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산상설교를 행하셨다든가, 여러 가지 비유를 가르치셨다든가, 5병 2어의 기적을 행하셨다든가,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가 하는 성경의 기록을 그것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동의하고 그런 일이 있었다고 믿는다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올더스게이트 사건 이후 이렇게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 믿음이란 머리 속에서만 맴도는 생명없는 차디찬 동의이거나 어떤 이론과 같은 사변적이고 합리적인 것이 아니고 마음의 상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그리스도의 보혈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의 공로에 대한 신뢰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세상에 오셨고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신 우리의 구속이 되시고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분으로 알아 의지하는 것이다.“
결국 웨슬리에게 있어서 믿음은 예수님에 관하여 아는 단계가 아니라, 그 단계를 넘어서서 예수께서 바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그것을 믿기만 하면 나를 의롭다 인정하시고 내 모든 죄를 없이 하시고 나를 당신의 자녀 삼으신다는 것을 마음으로 느끼고 뜨겁게 체험하는 일, 그것이 바로 올더스게이트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깨달음을 체험할 때 웨슬리의 마음을 움직였던 말씀, 그것이 바로 로마서1:17에 나오는 바로 그 말씀이었으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이었고 그는 그 체험 후 오늘 저와 똑같은 제목 곧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고 이것은 감리교회의 기본을 이룬 설교였던 것입니다.
서기 1483년 독일에서 농부였다가 후에 광부가 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마틴 루터, 그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출세할 수 있는 길인 법학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친구와 둘이서 시골 길을 걷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와 함께 벼락이 내리쳤는데 그만 옆에 가던 친구가 벼락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놀라서 겁에 질린 마틴 루터는 저도 모르게 털썩 무릎을 끊고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성 안나여, 나를 도우소서. 나는 수도승이 되겠나이다.”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끝내 수도승이 된 마틴 루터는 수도원에서의 엄격한 수행, 진지한 학문과 가르침, 꽉 짜인 경건의 일정 등을 거쳤지만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지옥에 대한 불안 등으로 두려움에 빠져 그것을 이기기 위해 로마에 가서 남들이 하던 대로 성 베드로 대성당의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며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마틴 루터의 마음에 힘차게 울려 퍼진 말씀, 그것은 바로 로마서 1:17의 말씀이었으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던 계단에서 벌떡 일어섰고 후에 종교 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었습니다.
남왕국 유다의 350년 역사상 나타났던 스무 명의 임금 중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올바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했던 임금 가운데 하나로 꼽히던 요시아 임금 때 주위의 강대국 앗수르가 세력을 잃고 애굽도 약해져서 유다는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다시 한 번 다윗시대의 영광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요시아 임금은 두 번에 걸친 종교개혁으로 우상숭배를 없애버리고 또 주위 영토도 많이 되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유다민족을 축복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뜻밖에도 요시아 임금은 애굽 군대와 싸우다가 그만 40세의 한창 나이에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유다 왕국은 급속히 몰락하기 시작했고 바빌론이라는 나라가 급격히 세력을 얻으면서 순식간에 유다 온 땅을 휩쓸었습니다.
바로 이 시대에 한 사람의 예언자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이 바로 하박국이었습니다. 그는 요시아 임금에게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역사를 이루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요시아 임금은 죽었고 또다시 나라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지배층은 지배층대로 권력을 행사하고 백성들은 못살겠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고
“폭력이다!” 하고 외쳐도
구해주지 않으시니
주님,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어찌하여 나로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악을 그대로 보기만 하십니까?
약탈과 폭력이 제 앞에서 벌어지고,
다툼과 시비가 그칠 사이가 없습니다.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합니다.
악인이 의인을 협박하니,
공의가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표준새번역, 하박국서 1:2-4)
어째서 악인은 큰소리치고 의인은 어려움을 당해도 내버려 두시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엉뚱하게도 바빌론 사람들을 들어 쓰시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바빌론 사람들이 심판의 도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박국은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아니 바빌론 같이 악한 민족이 하나님의 도구라니 어찌 그럴 수 있는가? 하박국은 그럴 수 없다고, 그래도 유다 민족은 선민이고 율법을 지키느라고 애썼는데 바빌론 사람들의 침략을 그대로 당해야 하다니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하나님께서 항의하였습니다.
“내가 초소 위에 올라가서 서겠다.
망대 위에 올라가서
나의 자리를 지키겠다.
주님이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지 기다려 보겠다.
내가 호소한 것에 대하여 주께서
어떻게 대답하실지를 기다려 보겠다“ (표준새번역, 하박국서 2:1)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하신 대답 그것이 바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2:4)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이 정도면 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나는 율법 조항을 성경구절을 다 지켰으니 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내가 교회에서 이런 저런 직분을 맡아 그 누구보다 열심히 했으니 다 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네 신앙생활이 왜 그 정도냐고 손가락질할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내 힘. 내 노력. 내 생각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만이 나를 위해 돌아가셨음을 믿을 때 구원받는 것입니다. 예수를 내 삶의 전부로 알고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살아갈 때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께서 살아계셔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심을 날마다 체험하며 살아가는 삶의 과정이 곧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인 것입니다.
물론 이 일은, 구원의 확신은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구원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서 처절한 씨름을 해야 할 때도 있고, 며칠 몇 밤을 기도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내 삶의 근원이 어디인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는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인지,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내 삶의 목표는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등의 문제를 놓고 치열한 고민과 번민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되고,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구원의 감격 속에서 하나님께 헌신하면서 사는 삶이 곧 웨슬리 목사님이 말씀하신 성화의 과정인 것입니다.
결국 웨슬리가 깨달은 것은
믿음으로만(Sola fide)
성서만으로(Sola Scriptura)
은총만으로(Sola gratia)
인 것이고 오늘 우리의 구원은 오직 믿음, 성서, 은총 만으로인 것입니다. 창립 100주년을 향해 가고 있는 우리 교회가 나아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그것 역시 웨슬리 목사님이 깨달은 바 믿음으로, 성서만으로, 은총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교회되는 것입니다.
웨슬리의 회심주일을 맞아 믿음만으로, 성서만으로, 은총만으로 구원받는 은혜가 그리고 은혜에 감격하여 사는 삶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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