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년도

2011. 12. 11 /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 이사야서 53:1-6, 마가복음 14:50-52

람보 2 2015. 4. 6. 18:01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2011. 12. 11)


본문) 이사야서 53:1-6, 마가복음 14:50-52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님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님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이사야서 53:1-6 / 표준새번역 개정판)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다. 그런데 어떤 젊은이가 맨몸에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니, 그는 홑이불을 버리고, 맨몸으로 달아났다.” (마가복음 14:50-52 / 표준새번역 개정판)



우리가 매주일 신앙으로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의하면 예수의 생애는 다음과 같이 정리됩니다.

탄생 -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죽음 -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 -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승천 -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재림 -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그러니까 사도신경에는 예수께서 어떻게 자라시고, 설교하시고, 능력을 행하시고, 어떤 일들을 행하셨는지와 같은 생애에 대한 말씀이 단 한 구절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같이 예수의 생애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사도신경에 대해 불만이 많고, 사실은 예배에서 빼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많습니다. 솔직히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도신경을 만든 로마시대 때 믿음의 선조들은 예수의 생애보다는 죽음과 부활 사건에 훨씬 더 많은 관심과 의미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어쨌든 예수의 생애 가운데 네 복음서에 빠짐없이 다 기록된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입니다. 탄생 사건도 마태와 누가복음에만 나오고 마가와 요한복음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이나 설교도 네 복음서에 다 나오는 것이 많지 않은데 십자가 사건과 부활만은 네 복음서에 다, 그것도 아주 자세하게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의미와 중요성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물론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이 네 복음서에 다 나오고 큰 줄거리에서는 차이가 별로 없지만 그래도 세부적인 면이나 구체적인 면에 들어가면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고, 또 하나의 복음서에만 나오는 독특한 표현들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표현들 중에 오늘 제 눈길을 끄는 표현이 하나 있으니 바로 마가복음 14:50-52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다. 그런데 어떤 젊은이가 맨몸에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니, 그는 홑이불을 버리고, 맨몸으로 달아났다.” (마가복음 14:50-52)

참으로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6:16에 같은 구절의 본문이 나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다.”


이 구절은 두 군데의 내용이 같은 것인데 이상하게도 그 다음에 나오는 51-52절은 마태복음에는 나오지 않고 오직 마가복음에만 나오는 내용입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한 젊은이가, 즉 예수를 따라다니던 제자 중 하나인 한 젊은이가 맨몸에 홑이불을 두르고, 붙잡혀가는 예수를 따라가다가, 사람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니까 그만 놀라서, 기겁을 해서 도망을 갔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는 속옷을 입지 않은 채 홑이불을 겉옷처럼 걸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잡으니까 그것을 벗어버리고 벌거벗은 몸으로 도망쳤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는 목숨을 부지했고, 어디론가 사라졌으며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성경 어디에도 기록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 기자는 이 부끄러운 이야기를 왜 남겨놓았는가요? 아마도 이 사건이 너무나 부끄러운 사건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마가복음을 읽었던 제자들이 다른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이 이야기를 빼버렸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사건은 실제로 있었던 사건으로 생각됩니다. 어쨌든 마가복음 기자는 그 사건을 왜 기록했을까요?


어떤 학자들은 여기서 도망간 젊은이는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아무런 증거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기 나오는 이 젊은이를 포함해서 예수님의 제자들 모두가 다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께서 붙잡혀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되는 그 순간에 다 도망쳤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 제자로 선택받고, 함께 먹고 자면서 많은 가르침을 배우고, 온갖 기적을 다 보았던 그 제자들이, 끝까지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큰소리쳤던 그 제자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살기 위해서 도망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서 버림받고 외롭고 쓸쓸하게, 모든 고통을 홀로 안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월이 지난 후 그렇게 도망갔던 제자들이 다시 믿음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들은 다시 모여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것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예수를 따르는 진실된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다시 한 번 예수가 누구이신지, 어떤 분이신지, 왜 그런 죽음을 당하셨는지 묻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예수가 메시아라면 어떤 의미에서 메시아인지 묻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그 근거를 찾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약을 다시 읽었고, 마침내 오늘의 본문 구절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님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님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결코 겉모습을 보고 따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결코 고운 모양이나 훌륭한 풍채로 사람들을 끌어들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사람들이 예수를 그렇게 핍박하고, 손가락질하고, 못살게 굴고 그러다가 결국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는데 제자들도 역시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허물과 악함 때문에 질리고, 상처를 받고, 징계를 받고, 매를 맞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6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그렇게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큰소리쳤던 제자들이 왜 그렇게 허무하게 도망을 쳤던가? 바로 이 구절입니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그러니까 저 살겠다고, 저 혼자 살아남겠다고 제 갈 길로 흩어졌는데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6절까지로 잡았습니다마는 이어서 7절부터에서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그 세대 사람들 가운데서 어느 누가,

그가 사람 사는 땅에서 격리된 것을 보고서,

그것이 바로 형벌을 받아야 할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느냐?

그는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았고,

거짓말도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악한 사람과 함께 묻힐

무덤을 주었고, 죽어서

부자와 함께 들어가게 하였다.“ (이사야서 53:7-9)


유명한 고난의 종의 노래입니다. 물론 이 구절은 원래 유다 민족이 당한 고통과 아픔의 의미를 제 2 이사야가 밝힌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활동했던 예언자 제2 이사야, 그는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가서 온갖 조롱받고, 신앙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물음의 답이 바로 53장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인 유다 민족이 세상의 아픔을 대신 짊어지고 고통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유다 민족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고통을 짊어진 고난의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유다 민족이 끝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저버리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난 후 이 구절은 고스란히 예수를 나타내는 것으로 재해석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제2 이사야가 남긴 이 구절을 읽으면서 초대교회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했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 교인들은 오늘의 본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마치 연한 순과 같은 분으로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고난과 핍박을 받았지만 그러나 묵묵히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감당했던 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던 분,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과 평화를 허락하신 분, 우리는 그것이 무서워서 제각기 다 갈 길로 흩어졌지만 그러한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초대교회 교인들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강림절이란 바로 우리가 지금 누구를 따라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묻는 계절입니다. 오늘날 일 천만 명에 이른다는 기독교인들이 과연 누구를 따라서, 무엇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묻는 계절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중에 과연 몇 명이나 되는 사람이 진심으로 예수를 다르고 있는가요? 사실은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져간 것은 아닌가요?

진심으로 아기 예수를 따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가고 있는가, 아니면 눈에 보이는 사람이나 물질을 좇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 다가올 성탄절이 과연 어떤 날인가요? 아기 예수 탄생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요? 주님께서 묻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