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왕(2011.11.27)
본문) 이사야서 9:1-7, 누가복음 2:14
“어둠 속에서 고통받던 백성에게서 어둠이 걷힐 날이 온다. 옛적에는 주님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받게 버려두셨으나, 그 뒤로는 주님께서 서쪽 지중해로부터 요단 강 동쪽 지역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방 사람이 살고 있는 갈릴리 지역까지, 이 모든 지역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
‘하나님,
주님께서 그들에게 큰 기쁨을 주셨고,
그들을 행복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곡식을 거둘 때 기뻐하듯이,
그들이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군인들이 전리품을 나눌 때 즐거워하듯이,
그들이 주님 앞에서 즐거워합니다.
주님께서 미디안을 치시던 날처럼,
그들을 내리누르던 멍에를 부수시고,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던 통나무와
압제자의 몽둥이를 꺾으셨기 때문입니다.
침략자의 군화와 피 묻은 군복이 모두 땔감이 되어서,
불에 타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의 왕권은 점점 더 커지고
나라의 평화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가 다윗의 보좌와 왕국 위에 앉아서,
이제부터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심이
이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이사야서 9:1-7, 표준새번역 개정판)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누가복음 2:14, 표준새번역 개정판)
오늘은 대강절이라고도 부르고 강림절이라고도 부르는, 또 어떤 사람들은 대림절이라고도 부르는 절기의 첫째주일입니다. 어쨌든 이 절기는 아기 예수 탄생을 기다리는 날에 해당됩니다. 오랜 기간 동안의 성령강림절 기간으로 보내고 나서 앞으로 4주 동안 아기 탄생을 기다리는 절기라는 말입니다. 초대교회 때 교회력이 만들어지면서 성탄절을 중심에 놓고 그 전 4주를 강림절이라고 부르면서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이때를 새해의 시작이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이 교회력으로 치면 새해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 4주 동안 강림절에 대한 말씀들을 찾아서 읽으며 아기 탄생을 기다리는 계절을 보태고자 합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구약에서 본문을 찾을 수밖에 없고, 주로 예언서를 보게 될 것입니다. 우선 오늘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말씀을 본문으로 택했습니다. 그리고 미리 말씀드릴 것은 오늘날 성탄절이 그만 돈많은 사람들이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선물을 주고받는 지극히 개인적인 절기로 변해버렸는데 사실은 아기 예수 탄생이라는 사실은 엄청난 역사적인 사건이고,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엄청난 사건이며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었던가 하는 것은 이미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기원전과 기원후를 나누는 그것입니다. ‘기원전’을 B.C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바로 ‘Before Christ' 는 예수 탄생 전이라는 말이고, ’기원후‘를 A.D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바로 ’‘Anno domini' 즉 라틴어로 예수 탄생 후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탄생이라는 사건이 단순한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역사적인 배경과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고, 특히 예수 탄생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어떠한 역사적, 시대적인 배경 속에서 기다렸는지를 보고 이해해야 하고, 따라서 오늘 우리들도 우리 개인의 문제가 아닌 여사적인 맥락 속에서 예수 탄생을 기다리고 그 의미를 찾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 이사야서 본문을 읽었는데 그렇다면 이사야가 살았던 시대를 먼저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사야가 살았던 나라는 유다 왕국이었는데 그가 살았던 유다 왕국의 지정학적 위치가 우리나라와 비슷한 면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는 대륙에 붙어있는 반도이고 유다는 반도가 아니지만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우리나라가 중국으로 대표되는 대륙세력과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해양세력이 끊임없이 맞붙었고, 그 두 세력이 상대방을 공격하러 갈 때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반도는 끊임없이 두 세력의 침략을 받아야 했으니 누군가의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가 침략을 받은 것이 천 번에 가깝다더군요.
유다는 반도는 아니지만 양쪽에 두 개의 거대한 문명이 있었습니다. 세계 4대 문명 중의 두 개가 양쪽에 있었고, 그들이 세력을 얻어 확장될 때 반드시 지나가야 했던 곳이 바로 유다 왕국이 있었던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계산해 본 적이 없지만 그들도 역시 천 번 이상 침략을 받았을 것이고, 끊임없이 침략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 유다 민족이 수천 년 역사 속에서 이민족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기들이 조금이라도 다른 지역을 정복했던 시절이 불과 80년이었습니다. 적어도 이천 년이 넘는 그들의 역사 속에서 불과 80년 정도만이었는데 그때가 바로 다윗 왕이 다스리던 40년, 솔로몬 왕이 다스리던 40년이었던 것입니다.
솔로몬 왕이 죽고나서 유다는 둘로 갈라졌습니다. 그때가 기원전 920년 경이었습니다. 이후 북왕국 이스라엘은 200년 정도 유지되다가 기원전 721년 앗시리아 제국에게 멸망당했고, 남왕국 유다는 조금 더 계속되다가 기원전 587년 바빌로니아 제국에게 멸망당하고 포로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언자 이사야는 어떤 시대에 살았던 사람인가? 그의 책 1장 1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다.” (이사야서 1:1)
그러니까 이사야는 유다 왕 4대에 걸쳐서 활동했던 예언자입니다. 그런데 아하스 왕이 16넌, 히스기야 왕이 29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으니 아마도 이사야는 웃시야 왕 말기에 예언활동을 시작해서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에 활동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다스리던 시대는 과연 어떤 시대였던가? 먼저 아하스 왕이 다스리던 시대는 열왕기하 16장에 의하면 시리아와 이스라엘이 남왕국 유다를 쳐들어왔던 때입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시리아의 르신 왕과 이스라엘의 르말리야의 아들 베가 왕이 예루살렘을 치려고 올라와서, 아하스를 포위하기는 하였으나, 정복하지는 못하였다. 그 때에 시리아의 르신 왕이, 시리아에게 엘랏을 되찾아 주었고, 엘랏에서 유다 사람들을 몰아내었으므로, 시리아 사람들이 이 날가지 엘랏에 와서 살고 있다. 아하스는 앗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 왕에게 전령을 보내어,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임금님의 신하이며 아들입니다. 올라오셔서, 나를 공격하고 있는 시리아 왕과 이스라엘 왕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그런 다음에 아하스는 주님의 성전과 왕궁의 보물 창고에 있는 금과 은을 모두 꺼내어, 앗시리아의 왕에게 선물로 보냈다. 앗시리아의 왕이 그의 요청을 듣고, 다마스쿠스로 진군하여 올라와서는 그 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그 주민을 길로 사로잡아 가고, 르신은 살해하였다.” (열왕기하 16:5-9)
그러니까 앗시리아 제국의 도움을 받아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공격을 물리친 것이지요. 그런데 히스기야 왕 때 바로 그 앗시리아가 쳐들어옵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 제 십사년에 앗시리아의 산헤립 왕이 올라와서, 요새화된 유다의 모든 성읍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래서 유다의 히스기야 왕은 라기스에 와 있는 앗시리아 왕에게 전령을 보내어 말하였다. ‘우리가 잘못하였습니다. 철수만 해주시면,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앗시리아 왕은 유다의 히스기야 왕에게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히스기야는 주님의 성전과 왕궁의 보물 창고에 있는 은을 있는 대로 다 내주었다. 그 때에 유다의 히스기야 왕은, 주님의 성전 문과 기둥에 자신이 직접 입힌 금을 모두 벗겨서, 앗시리아 왕에게 주었다. 그런데도 앗시리아 왕은 다르단과 랍사리스와 랍사게에게 많은 병력을 주어서, 라기스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올려 보내어 히스기야 왕을 치게 하였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윗 저수지의 수로 곁에 있는 빨래터로 가는 큰 길 가에 포진하였다.” (열왕기하 18:13-17)
그러니까 히스기야 왕 때 당시 최대 강대국 앗시리아가 쳐들어왔고, 살아남기 위해서 온갖 보물을 갖다 바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도 그 이후로 끊임없이 앗시리아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아까 읽어드린 16장과 18장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지 아십니까? 열왕기하 17장은 바로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번 읽어보시면 이스라엘 왕국이 어떻게 멸망당했는지가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 결과 북왕국 사람들은 다 쫓겨나고, 이방사람들이 들어와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7장 5절 이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앗시리아의 왕이 이스라엘 전역으로 밀고 들어와서, 사마리아로 올라와 세 해 동안이나 도성을 포위하였다. 드디어 호세아 제 구년에 앗시리아 왕은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앗시리아로 끌고 가서, 할라와 고산 강가에 있는 하볼과 메대의 여러 성읍에 이주시켰다.” (열왕기하 17:5-6)
“이스라엘 자손을 사마리아에서 쫓아낸 앗시리아 왕은 바빌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으로부터 사람들을 데려와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성읍에 살게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사마리아를 자기들의 소유로 삼았으며, 이스라엘 성읍들 안에 정착하여 살았다.” (열왕기하 17:24)
결국 정리하자면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당하고 나서 대부분이 포로로 잡혀갔고, 그 땅에는 이방인들이 들어와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18장에서 그 무시무시한 앗시리아의 왕이 예루살렘에 쳐들어와서 공격을 자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칫 잘못하면 남왕국 유다도 똑같이 멸망당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자기들도 죽거나 포로로 잡혀갈 수 밖에 없는 엄청난 공포와 두려움의 기대가 바로 이사야가 살던 시대였다는 말입니다. 이사야서 9장은 바로 이러한 배경을 알고 읽어야 하는 본문입니다. 이사야는 이제 그 엄청난 전쟁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백성들에게 선포합니다.
“어둠 속에서 고통받던 백성에게서 어둠이 걷힐 날이 온다. 옛적에는 주님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받게 버려두셨으나, 그 뒤로는 주님께서 서쪽 지중해로부터 요단 강 동쪽 지역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방 사람이 살고 있는 갈릴리 지역까지, 이 모든 지역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이 땅에 어둠이 가득 차 있지만, 앗시리아라고 하는 그 강대국의 침략 앞에서 모든 사람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러나 그 어둠이 걷힐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멸시받고 있는 땅이 영화롭게 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
이제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추었는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인가요? 오직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 ‘하나님,
주님께서 그들에게 큰 기쁨을 주셨고,
그들을 행복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곡식을 거둘 때 기뻐하듯이,
그들이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군인들이 전리품을 나눌 때 즐거워하듯이,
그들이 주님 앞에서 즐거워합니다.
주님께서 미디안을 치시던 날처럼,
그들을 내리누르던 멍에를 부수시고,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던 통나무와
압제자의 몽둥이를 꺾으셨기 때문입니다.
침략자의 군화와 피 묻은 군복이 모두 땔감이 되어서,
불에 타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
그렇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앗시리아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을 내리누르던 멍에를 부수시고,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던 통나무와 압제자의 몽둥이를 꺾으신다는 것입니다. 침략자의 군화와 피 묻은 군복이 모두 땔감이 되어서, 불에 타 없어질 것이라고 이사야는 선포합니다.
여러분,
도대체 이런 선포를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그렇게도 강대하던 앗시리아가 어떻게 멸망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보십시오. 19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를 그렇게도 괴롭히고 침략하던 앗시리아의 산헤립 왕의 최후가 나와 있습니다.
“그 날 밤에 주님의 천사가 나아가서, 앗시리아 군의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쳐죽였다. 다음날 아침이 밝았을 때에 그들은 모두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앗시리아의 산헤립 왕이 그 곳을 떠나, 니느웨 도성으로 돌아가서 머물렀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자기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예배하고 있을 때에, 그의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쳐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도망하였다. 그의 아들 에살핫돈이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열왕기하 19:35-37)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역사가 끝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그런 사건을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이루실 참다운 평화의 나라를 보고 있습니다. 단순히 앗시리아의 왕이 죽는 것으로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참된 평화의 나라를 이루실 왕이 오신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제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한 아기를 보내실 것인데 그는 모든 백성의 통치자가 될 것입니다. 그는 ‘놀라우신 조언자’가 될 것이며,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불릴 것이며,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릴 것입니다. 즉 그는 아기로 이 땅에 오시지만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궁극적으로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니 이 땅에 참된 평화를 이루실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의 왕권은 점점 더 커지고
나라의 평화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가 다윗의 보좌와 왕국 위에 앉아서,
이제부터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심이
이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실 것인데, 그래서 평화의 나라를 세우실 것인데 그 평화의 나라는 공평과 정의로 이루어지는 나라인 것입니다. 즉 평화란 공평과 정의에 바탕을 둔 나라입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실 것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바로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있었고, 그것을 이루실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실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아기 예수가 태어나셨을 때 천사들이 나타나 이렇게 찬양했던 것입니다.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누가복음 2:14)
그렇습니다.
예수는 평화의 왕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강림절 첫째 주일, 평화의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는 이 땅에 어떤 평화를 이루기 위해 오시는 분이십니까? 이 땅에 전쟁을 그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진정으로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더 이상 전쟁은 안 된다고 소리높여 외쳐야 합니다. 전쟁을 어떤 이유로든 획책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반대하는 자요, 하나님께 도전하는 자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자들이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북한에 있는 사람들이든 남한에 있는 사람들이든 그 누구든간에 전쟁을 하려고 군비확장하고, 기회를 엿보는 자들은 하나님의 적대자요, 아기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평화의 나라는 공평과 정의를 바탕으로 세워지는 나라이기에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 실천해야 합니다. 아무리 아기 예수 탄생을 기다린다고, 성탄절이 오기를 기다린다고 말하더라도 그런 사람들이 삶으로 공평과 정의를 이루는 일에 헌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짜요 엉터리이며 거짓된 성탄절을 기다리는 자들일 뿐입니다 성탄절이란 공평과 정의를 바탕으로 한 평화의 나라를 이루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이 아기 예수를 만나는 날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강림절은 공평과 정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질 평화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아기의 몸을 입고 오시는 예수를 진심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이 함께 축하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입으로만,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행함으로 아기 예수와 함께 살아가겠다고 다짐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함께 하며, 즐거워하는 절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강림절은 평화의 절기요, 공평과 정의의 절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아기 예수 탄생을 기다리면서 이사야가 기다렸던 아기 예수를 우리 모두 다 함께 만나는 역사가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우리의 삶을 헌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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