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년도

2011. 11. 6 / 천국에 이르는 길 / 야고보서 4:13-17

람보 2 2015. 4. 6. 17:50

천국에 이르는 길(2011.11.6)

 

본문) 야고보서 4:13-17

“‘오늘이나 내일 어느 도시에 가서, 일 년 동안 거기에서 지내며, 장사하여 돈을 벌겠다‘하는 사람들이여,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 것이고, 또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을 할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우쭐대면서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해야 할 선한 일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그것은 그에게 죄가 됩니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구약에 나오는 위대한 찬송시인 시편에는 모두 150편의 시가 실려 있는데 그 시들이 대부분 참으로 가사도 좋고, 또 곡을 붙이면 아름다운 찬송이 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시들입니다. 저는 특히 시편 23편에 나운영 선생님이 곡을 붙인 찬송을 참으로 좋아합니다. 그런데 시편은 대부분 다윗이 지었다고 나와 있는데 그중에서 위대한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시가 딱 한 편 있습니다. 바로 시편 90편입니다. 성경 본문을 보면 후대 사람이 붙인 제목이 나와 있고, 거기에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라고 나와 있습니다. 모세는 그 시편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은 대대로 우리의 거처이셨습니다.

산들이 생기기 전에,

땅과 세계가 생기기 전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죽을 인생들아, 돌아가거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습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인생은 한 순간의 꿈일 뿐,

아침에 돋아난 한 포기 풀과 같이 사라져 갑니다.

풀은 아침에는 돋아나서 꽃을 피우다가도,

저녁에는 시들어서 말라 버립니다.

 

주님께서 노하시면,

우리의 일생은 사그라지고,

우리의 한평생은 한숨처럼 스러지고 맙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니,

마치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시편 90:1-10)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영원무궁하시지만 우리 인생은 티끌로 만들어져서 하나님이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면 그 순간 돌아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습니다. 인생은 한 순간의 꿈과 같고, 아침에 돋아낫다가 저녁이면 지는 풀이나 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

 

물론 요즘은 평균수명이 늘어났으니 혹 이 구절을

“우리의 연수가 팔십이요

강건하면 구십이라도,“라고 바꾸거나, 아니면

“우리의 연수가 구십이요

강건하면 백이라도,“라고 바꾸고 싶은 분들도 많이 계시겠지요. 요즘 유행하는 말 가운데 ‘구구팔팔 일이삼’이라는 말이 있는데 ”구십구 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일 이분 또는 이 삼분 만에 아프지 말고 죽자“는 뜻이라지요.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큰소리쳐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니, 마치 날아가는 것 같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오죽하면 백삼십 살 먹은 야곱이 바로 앞에서 이렇게 말했겠습니까?

 

“요셉은 자기 아버지 야곱을 모시고 와서, 바로를 만나게 하였다. 야곱이 바로를 축복하고 나니, 바로가 야곱에게 말하였다. ‘어른께서는 연세가 어떻게 되시오?’ 야곱이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창세기 47:7-8)

 

이렇게 사람의 삶이란 것은 험악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고, 평안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사실은 그 내면 깊숙한 곳에는 대부분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것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기 위해 더욱 겉을 꾸미고, 그럴 듯하게 살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어쨌든 시편 기자나 야곱이 말한 것처럼 인생 칠팔십 년의 자랑이 수고와 슬픔뿐이요, 인생 백삼십 년이 험악한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멀리 보지 못하고 눈앞의 이익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오늘이나 내일 어느 도시에 가서, 일 년 동안 거기에서 지내며, 장사하여 돈을 벌겠다.”

 

여러분!

이게 뭐 잘못된 것입니까? 장사가 직업이라면 이렇게 말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돈을 벌어야 먹고 살고, 자식을 키우고, 노후도 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럴려면 미리미리 계획을 세우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렇게 사는 것이 무슨 문제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야고보 장로는 여기서 시편 기자가 했던 말과 같은 의미의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장사를 해서 돈을 벌겠다고 계획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깨닫고, 인생의 모든 일이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먼저 그의 뜻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장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 것이고, 또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을 할 것이다.‘ ”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인지 아닌지 먼저 물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일인지 아닌지 먼저 물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면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사해서 돈을 벌겠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의 잘못이 있으니 이는 바로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었다고 우쭐대며 큰소리친다는 사실입니다. 즉 돈을 버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 욕심을 채우고, 제 자랑을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인데 왜냐하면 사람이 해야 할 선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그것은 그에게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장사를 해서 돈을 버는 것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왜 돈을 벌려하는가, 그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만약 돈을 벌어 제 자랑하고, 우쭐대고 저 혼자 배부르게 먹고 쓰려 한다면 그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생각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게 산다면 아무리 돈을 많이 번다 해도 그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행동을 할 때 기준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그 행동이 선한가 악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말로 사람을 살리는 일인가, 죽이는 일인가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제부터 그 기준이 되는 것을 예수님의 행적을 통해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우선 마태복음 12장 9절부터를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서, 그들이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런데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괜찮습니까?’ 하고 예수께 물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다고 하자. 그것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그것을 잡아 끌어올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괜찮다.’ 그런 다음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을 내밀어라.’ 그가 손을 내미니, 다른 손과 같이 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서,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 (마태복음 12:9-14)

 

자, 보십시오. 사람들이 예수를 시험하려고 묻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괜찮습니까?’ 왜 이렇게 물었나요?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안식일에 병을 고친다는 말은 안식일에 율법을 어겨도 되느냐는 말입니다. 그것을 모를 리가 없는 예수께서 대답하기 곤란하셨을 터인데 예수께서

아주 기가 막히게 대답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괜찮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좋은 일이냐 아니냐, 그리고 그 기준은 병에 걸린 사람을 살리느냐 죽이느냐 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손을 내밀라고 하셨고, 그래서 낫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밖에 나가서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행동의 기준이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는 선하냐, 악하냐, 사람을 살리는 일이냐 죽이는 일이냐 였던 데 비해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냐 어기는 것이냐 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과 똑같은 본문이 누가복음 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시는데, 거기에는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예수가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지 엿보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이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가운데 서라.’ 그래서 그는 일어나서 섰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물어보겠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건지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예수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서, 그 사람에게 명하셨다. ‘네 손을 내밀어라.’ 그 사람이 그렇게 하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 그들은 화가 잔뜩 나서,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였다.”

(누가복음 6:6-11)

 

보십시오, 여기 더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그러면서 예수는 아주 대놓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숨을 건지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그러니까 예수의 기준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였지 그것이 안식일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조항에 맞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느냐 아니냐가 판단의 기준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느냐 죽이느냐 가 판단의 기준이었던 것입니다.

 

“그 젊은이가 예수께 말하였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다 지켰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 (마태복음 19:20-21)

 

보십시오.

사람이 해야 할 선한 일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그것은 그에게 죄가 되는데 선한 일이란 바로 사람을 살리는 일이요,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인 것입니다.

 

어제 저녁 가까운 형님 아들 결혼식에 갔었습니다. 재미있는 결혼식을 보고 식사를 한 후에 뒤풀이자리에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함께 지냈던 동지들을 만나서 여러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러다가 한국 교회와 교인들의 신앙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이야기며, 천주교회 이야기 등을 나누다가 젊은 친구 하나가 그러더군요. “결국 교회 가는 목적이 죽어서 천당 가는 것 아닌가?” 그래서 제가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살아서 제 욕심만 차리고 온갖 못된 짓 다 하고, 베풀 줄도 모르고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극악스럽게 살면서 단지 주일이면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고 직분 맡고, 헌금 바친다고 해서 천국에 간다는 말이냐? 그렇게 사는 사람의 삶이 곧 지옥인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겠느냐? 만약 그런 사람이 천국에 간다면 그 순간에 천국이 지옥으로 변할 것이고 그런 사람들이 갈 천국이란 없다. 살아서, 여기서 천국같은 삶을 살아야 죽어서도 천국에 간다.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해 주신 사람의 목적이 무엇이고, 무엇을 위해 살라고 하시는지 끊임없이 물으면서 내게 베풀어 주신 것 가지고 나도 베풀고 나누며 일생을 살다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 날,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썼습니다.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애썼는데 이제 하나님께서 부르시니 하나님 앞으로 가겠습니다. 나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여러분,

예수께서 주기도문을 통해 가르쳐 주신 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The Kingdom Come)라고 우리가 기도하는 것처럼 여기에서 시작되어 마지막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삶이 지옥같은 사람들, 제 욕심만 차리고 거짓되고 탐욕스러운 사람들은 죽어서도 지옥으로 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삶이 천국이라면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은 영원히 당신의 품에 품어주실 것입니다.

입으로는 예수 믿는다고 말하고 교회에 가지만 나머지 엿새 동안 제 욕심만 차리고 엉망으로 산다면 그것은 지옥으로 이르는 길입니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우리의 삶이 잠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안개 같은 것임을 기억하면서 그 짧은 생애 속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의 뜻을 깨닫고 더불어 사는 이웃들에게 나누고 베풀며 함께 살겠다고 다짐하고 최선을 다해 사는 것입니다. 바로 그 길을 걸어가는, 그래서 영원한 하나남의 나라에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