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년도

2011. 10. 30 / 정의 심어 평화를 / 야고보서 3;18, 시편 85:10-13

람보 2 2015. 4. 6. 17:48

정의 심어 평화를(2011.10.30)

 

본문) 시편 85:10-13, 야고보서 3:18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춘다.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는 하늘에서 굽어본다.

주님께서 좋은 것을 내려 주시니,

우리의 땅은 열매를 맺는다.

정의가 주님 앞에 앞서가며,

주님께서 가실 길을 닦을 것이다.“ (시편 85:10-13)

“정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평화를 위하여 그 씨를 뿌려서 거두어들이는 열매입니다.” (야고보서 3:18)

 

 

오늘은 세계교회가 종교개혁기념주일 494주년으로 지키는 날입니다. 그래서 저도 그 기념설교를 해야 하지만 제 마음에 그런 설교를 할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이 종교개혁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따로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말입니다. 혹 종교개혁 설교를 듣고 싶으신 분들이 있다면 저희 교회 홈페이지 들어오셔서 전에 했던 설교를 찾아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기원전 587년 남왕국 유다가 마침내 바빌론에게 멸망당했습니다. 기원전 1000년 경 사울 와에 의해 시작했고, 다윗 왕 때 전성기를 누렸고, 솔로몬이 죽은 후 두 나라로 갈라졌습니다. 이후 싸우고 대결하다가 먼저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게 멸망당했고, 이어 남왕국 유다만 남아 있다가 마침내 그마저도 멸망당하고 만 것입니다. 이때 남왕국 유다가 얼마나 처참하게 침략당했고, 비참하게 무너졌는지가 열왕기하 2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드기야가 바빌로니아 왕에게 반기를 들었으므로, 시드기야 왕 제 구년 열째 달 십일에 바빌로니아 느부갓네살 왕이 그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도성을 포위하고, 도성 안을 공격하려고 성벽 바깥 사방에 흙 언덕을 쌓았다. 그리하여 이 도성은 시드기야 왕 제 십일 년까지 포위되어 있었다. (그 해 넷째 달) 구일이 되었을 때에, 도성 안에 기근이 심해져서, 그 땅 백성의 먹을 양식이 다 떨어지고 말았다. 드디어 성벽이 뚫리니, 이것을 본 왕은, 바빌로니아 군대가 도성을 포위하고 있는데도, 밤을 틈타서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왕의 정원 근처, 두 성벽을 잇는 통로를 빠져 나와 아바라 쪽으로 도망하였다. 그러나 바빌로니아 군대가 시드기야 왕을 추격하여, 여리고 평원에서 그를 사로잡으니. 시드기야의 군사들은 모두 그를 버리고 흩어졌다. 바빌로니아 군대가 시드기야 왕을 체포해서, 리블라에 있는 바빌로니아 왕에게로 끌고 가니, 그가 시드기야를 심문하고,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처형하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뺀 다음에, 쇠사슬로 묶어서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 제 십구 년 다섯째 달 칠일에, 바빌로니아 왕의 부하인 느부사라단 근위대장이 예루살렘으로 왔다. 그는 주님의 성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건물 곧 큰 건물은 모두 불태워 버렸다. 근위대장이 지휘하는 바빌로니아의 모든 군대가 예루살렘의사면 성벽을 헐어 버렸다. 느부사라단 근위대장은 도성 안에 남아 있는 나머지 사람들과 바빌로니아 왕에게 투항한 사람들과 나머지 수많은 백성을, 모두 포로로 잡아갔다. 그러나 근위대장은, 그 땅에서 가장 가난한 백성 가운데 일부를 남겨 두어서, 포도원을 가꾸고 농사를 짓게 하였다.“ (열왕기하 25:1-12)

 

자, 보십시오. 남왕국 유다가가 결국 멸망당했습니다. 끊임없이 바빌로니아의 공격을 받다가 끝내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왕의 아들들은 다 처형당하고, 왕은 장님이 되어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대부분 포로로 잡혀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땅의 가장 가난한 백성들 일부만 남아서 농사를 짓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비참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자, 이제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은 머나먼 이국땅에서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한 채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고단하고 피곤한 삶을 시편에 남겨놓았는데 바로 시편 137편입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바빌론의 강변 곳곳에 앉아서,

시온을 생각하면서 울었다.

그 강변 버드나무 가지에

우리의 수금을 걸어 두었더니,

우리를 사로잡아 온 자들이

거기에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고,

우리를 짓밟아 끌고 온 자들이

저희의 흥을 돋우어 주기를 요구하며,

시온의 노래 한 가락을

저희들을 위해 불러 보라고 하는구나.

 

우리가 어찌 이방 땅에서

주님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랴.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아,

너는 말라비틀어져 버려라.

내가 너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내가 너 예루살렘을

내가 가장 기뻐하는 것보다도 더 기뻐하지 않는다면,

내 혀야,

너는 내 입천장에 붙어 버려라.“ (시편 137:1-6)

 

그렇습니다.

그들은 그 먼 이국땅 강변에 앉아서 소향을 생각하며 울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어놓고 슬프고 힘들 때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바빌론 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 와서 자기들의 흥을 돋우라고 시킨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힐 노릇이며, 답답한 노릇입니다. 언제 해방이 되어 돌아갈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에스라서에 의하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도무지 무너질 것 같지 않던 바빌론이 페르샤에 의해 무너지고 페르샤의 왕 고레스가 유대인들을 해방시켜주는 엄청난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에스라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왕위에 오른 첫 해이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 고레스는 온 나라에 명령을 내리고, 그것을 다음과 같이 조서로 써서 돌렸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하늘의 주 하나님이 나에게 이 땅에 있는 모든 나라를 주셔서 다스리게 하셨다. 또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에 그의 성전을 지으라고 명하셨다. 이 나라 사람 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은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그 곳에 계시는 하나님 곧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라. 그 백성에게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를 빈다. 잡혀온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누구든지 귀국할 때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그 이웃에 사는 사람은 그를 도와주어라. 은과 금과 세간과 가축을 주고,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에 바칠 자원예물도 들려서 보내도록 하여라.’ “

(에스라기 1:1-4)

 

그 유명한 고레스 칙령입니다. 이렇게 해서 유대인들은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비록 정치적으로 독립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고향에서 농사지으며, 하나님께 제사지내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유대인들은 묻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왜 나라가 망했는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민인데, 또 하나님께서 축복을 약속하신 다윗의 왕국인데 어찌 그런 나라가 망할 수 있었단 말인가?

또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포로생활을 해야 했던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하나님께서는 유대백성을 그렇게도 험하게 대하셨단 말인가?“

 

그리고 놀랍게도 그 이유를 이미 예언자 예레미야가 밝혔음을 발견합니다. 예레미야가 일찍 했던 예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자기들이 행하지 않았음을 발견했다는 말입니다. 예레미야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죄 때문인데 그 죄란 바로 ‘정의를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먼저 예레미야는 그의 책 5장에서 이렇게 선포한 적이 있습니다.

“ ‘나의 백성 가운데는 흉악한 사람들이 있어서,

마치 새 잡는 사냥꾼처럼,

허리를 굽히고 숨어 엎드리고,

수많은 곳에 덫을 놓아, 사람을 잡는다.

조롱에 새를 가득히 잡아넣듯이,

그들은 남을 속여서 빼앗은 재물로

자기들의 집을 가득 채워 놓았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세도를 부리고,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찌고, 살에서 윤기가 돈다.

악한 짓은 어느 것 하나 못하는 것이 없고,

자기들의 잇속만 채운다.

고아의 억울한 사정을

올바르게 재판하지도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지켜 주는

공정한 판결도 하지 않는다.

이런 일들을 내가 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이러한 백성에게 내가 보복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지금 이 나라에서는

놀랍고도 끔찍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예언자들은 거짓으로 예언을 하며,

제사장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시키는 대로 다스리며,

나의 백성은 이것을 좋아하니,

마지막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 (예레미야서 5:26-31)

 

보십시오.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시대 즉 남왕국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의 모습입니다. 악한 자들이 가득 차 있는데 한 마디로 정의를 행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언자들조차 악을 행하고 있으니 망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6장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힘 있는 자든 힘없는 자든,

모두가 자기 잇속만을 채우며,

사기를 쳐서 재산을 모았다.

예언자와 제사장까지도

모두 한결같이 백성을 속였다.

백성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괜찮다! 괜찮다!’ 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

그들이 그렇게 역겨운 일들을 하고도,

부끄러워하기라도 하였느냐?

천만에!

그들은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쓰러져서

시체더미를 이룰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벌을 내릴 때에,

그들이 모두 쓰러져 죽을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예레미야서 6:13-15)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예언자와 제사장마저도 거리낌없이 악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성전 앞으로 보내서 이렇게 설교하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주님의 성전 문에 서서, 주님께 예배하려고 문으로 들어오는 모든 유다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을 큰소리로 일러주라고 하셨다.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너희의 모든 생활과 행실을 고쳐라. 그러면 내가 이곳에서 너희와 함께 머물러 살겠다. ‘이것이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 하고 속이는 말을, 너희는 의지하지 말아라. 너희가, 모든 생활과 행실을 참으로 바르게 고치고, 참으로 이웃끼리 서로 정직하게 살면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지 않고, 이곳에서 죄 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겨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으면, 내가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 하도록 준 이 땅, 바로 이곳에서 너희가 머물러 살도록 하겠다.

그런데도 너희는 지금 전혀 무익한 거짓말을 의지하고 있다. 너희는 모두 도둑질을 하고, 사람을 죽이고, 음행을 하고, 거짓으로 맹세를 하고, 바알에게 분향을 하고,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섬긴다. 너희는 이처럼 내가 미워하는 일만 저지르고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으로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우리는 안전하다’ 하고 말한다. 너희는 그런 역겨운 모든 일들을 또 되풀이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다. 그래,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이, 너희의 눈에는 도둑들이 숨는 곳으로 보이느냐? 여기에서 벌어진 온갖 악을 나도 똑똑히 다 보았다. 나 주의 말이다.“ 』 (예레미야서 7:1-11)

 

그렇습니다.

예레미야가 살던 시대, 그 백성들은 거룩한 척 하지만, 교회에는 열심히 나가는 것처럼 보엿지만 그들이 삶은 거짓되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안전하다고 큰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정의를 행하라고, 옳은 행위를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멸망시켜서 쫓아내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나라가 왜 망했는가? 평화는 왜 사라졌는가? 한 마디로 정의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불의와 부정, 거짓과 부패가 가득 찼기에 평화가 사라졌던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춘다.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는 하늘에서 굽어본다.

주님께서 좋은 것을 내려 주시니,

우리의 땅은 열매를 맺는다.

정의가 주님 앞에 앞서가며,

주님께서 가실 길을 닦을 것이다.“ (시편 85:10-13)

 

여러분, 이 시편 85편은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들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서 부른 노래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내용이 85편 1절에 나와 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주님의 땅에 은혜를 베푸시어,

포로가 된 야곱 자손을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그들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정의가 사라졌기에 나라가 망했고, 포로가 되었었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이제 정의가 살아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노래했으니 그것이 바로 시편 85편입니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춘다.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는 하늘에서 굽어본다.

주님께서 좋은 것을 내려 주시니,

우리의 땅은 열매를 맺는다.

정의가 주님 앞에 앞서가며,

주님께서 가실 길을 닦을 것이다.“ (시편 85:10-13)

 

그렇다면 이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포로에서 돌아왔으니 끝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 시편기자가 노래했던 그 정의의 열매, 평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바로 그 시대에 살았던 예언자 제2이사야는 이제 이렇게 선포합니다.

“ ‘너희는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 주민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일러주어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죄에 대한 형벌도 다 받고,

지은 죄에 비하여

갑절의 벌을 주님에게서 받았다고 외쳐라.‘ “ (이사야서 40:1-2)

 

여러분,

시편 85편의 저자가 살던 시대와 제2이사야가 살던 시대가 같은 시대입니다. 이제 포로에서 돌아온 그 무렵, 이사야는 하나님의 위로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선포합니다.

 

“한 소리가 외친다.

‘광야에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

사막에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실 큰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계곡은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깎아 내리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어라.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니,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함께 볼 것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것이다.‘ “ (이사야서 40:3-5)

 

이제 해야 할 일, 주님께서 오실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계곡은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깎아 내리고, 거친 길과 험한 곳은 평탄하게 하라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바로 이것이 이루어졌다고 성서는 증거하고 있으니 바로 누가복음 3장입니다. 세례 요한이 등장함으로써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성서는 증거합니다.

 

“요한은 요단 강 주변 온 지역을 찾아가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그것은 이사야의 예언서에 적혀 있는 대로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하여라.

모든 골짜기는 메우고,

모든 산과 언덕은 평탄하게 하고,

굽은 것은 곧게 하고,

험한 길은 평탄하게 해야 할 것이니,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 “ (누가복음 3:3-6)

 

여러분, 보십시오. 세례 요한은 이사야가 40장에서 선포한 그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곡은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깎아 내리고, 거친 길과 험한 곳은 평탄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나타내며 무슨 뜻입니까?

 

누가복음 3장에 의하면 사람들이 요한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으려하자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는 열매를 맺어라.”

 

그렇다면 회개에 알맞은 열매란 무엇입니까?

“무리가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요한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너희에게 정해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 또 군인들도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를 하여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하게 여겨라.’ ” (누가복음 3;10-14)

 

그렇습니다. 여기 소위 가진 자들이 나옵니다. 옷과 빵과 넉넉하게 가진 자들, 세리와 병사로 나타나는 부자들과 권력자들이 나옵니다. 그들을 향해 요한은 너희들이 가진 것을 나누어주라고, 욕심 부리지 말고 빼앗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한 마디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은 채워주고, 부자들과 권력자들은 내놓고 낮추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평등한 세상,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평화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정의를 통해 이루어지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저자는 오늘의 본문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정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평화를 위하여 그 씨를 뿌려서 거두어들이는 열매입니다.”

 

그렇습니다.

정의를 심어야만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평화는 정의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지난 10여 년 동안 평화의 시대와 불안의 시대를 다 맛보고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시대 때 우리는 평화를 맛보았습니다. 비록 그때 서해에서 충돌이 있었지만 그때 그 누구도 불안해하지 않았고, 사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금강산에 자유로이 다녔고, 개성공단은 활기차게 돌아갔습니다. 이산가족은 끊임없이 만났고, 남북교류는 활발했습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고 나서 지난 몇 년 사이에 우리는 엄청난 불안을 맛보고 있습니다. 남북교류가 끊기고, 금강산에 갈 수 없고, 왕래가 끊어졌으며,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그 근원에 무엇이 있습니까? 바로 이 땅에서 정의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나랏돈이 수십 조 원씩 강바닥에 처박히고, 온갖 불법을 다 저지른 자들이 높은 자리는 다 차지하고 있고, 권력을 이용해 축재하는 사람들이 끝없이 이어지는데 수사도 하지 않고,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불안에 떠는 세상, 정의가 사라진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평화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찾아야 할 것, 바로 정의로운 세상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 정의의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평화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정의 심어 평화를”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