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의 삶을 산다는 것(2011. 8. 7)
본문) 야고보서 1:26-27
“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혀를 다스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신앙을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며칠 전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교회 중의 하나인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내 친구 허 종 목사가 당당뉴스에 글을 한 편 올렸습니다. 저의 대학원 동기이면서 참으로 신실하고 깊은 영성의 소유자인, 존경하는 친구목사인 허 목사님은 “잘 알려진 대형교회 목사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라는 제목의 시와 같은 글을 올린 것입니다. 먼저 그 글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 죽음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
결국에는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바울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로마서 3장 22절)고 증거하였다.
기억하라. 구원에는 차별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차별이 심하다.
빈부의 차이도, 학벌이나 가문의 차이도, 권력의 차이도 그 차별이 심하다.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나게 하셨을까?
그리고 ‘왜 인생을 사느냐?’ 는 질문을 하게 하셨을까?
부모에게 버림받은 지적장애인(정박아)들을 만나면서 하나님께 물었었다.
‘하나님! 왜? 저들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평생 재활원에서 사는 친구들이었다.
이름도 빛도 없이 살다가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아무도 울지 않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잊혀지는 먼지같은 존재들이다.
아무 저항도 할 줄 모르는 바보들이다.
50년 넘도록 재활원에서 살고 있는 승원이가 있다.
아무도 그의 정확한 나이를 알지 못한다.
50년 넘게 사회복지기관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만 알 뿐이다.
백내장으로 승원이 눈이 허옇다.
그가 재활원에서 맡은 일은 물리치료실 청소이다.
승원이는 아침에 일어나 9시 30분이 되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9시 30분에 물리치료실이 열리면 어김없이 청소하러 간다.
봉규가 심장수술을 한 후부터 봉규가 청소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청소 문제로 다투는 일이 없어졌다.
승원이는 부모도 형제도 친척도 친구도 없다.
30년 전 아주 추운 겨울날이었다.
재활원에 수도가 모두 얼어서 물이 나오지 않았다.
아침이 되었는데도 너무 추우니 아무도 일어나지 않고 모두 이불 안에서
머리만 내놓고 꿈지럭거리고 있었다.
언제 일어났을까?
승원이가 리어카(손수레)에 물통을 싣고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30분이 지났을까 승원이가 물통에 물을 가득 채워서 리어카를 끌고 오고 있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30년 전에 그들과 교회를 개척했었다.
그러나 주안지방 실행위원회에서 장애인교회를 교회로 인정하지 않았다.
담임목회자의 생활을 책임지지 않으면 교회로 인정할 수 없다는 교회법으로 걸었다.
나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파송을 받지 못하고 재활원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28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지금도 재활원에 찾아가면 ‘하 전도사님 오셨어요?’ 하고 승원이가 인사를 한다.
무정하게 그들을 떠난 나를 아직도 그들의 전도사로 기억하고 있다.
인간의 유한함을 슬퍼한들 무엇하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 기도하는 일이다.
나의 주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니라.‘ (마태 10:42)
내 기도책에 승원이의 이름이 써 있다.
30년 전에 만났던 친구들의 이름들이 기도책에 써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다.
유명한 대형교회 목사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왜 승원이 얼굴이 떠올랐을까?
구원에는 차별이 없다는 말씀이 새롭다.
어떤 죽음이든 죽음은 슬프다.
유족들이 얼마나 슬프겠는가?
그러나 너무 슬퍼하지 말라.
하늘에 상이 있나니.....
그의 수고를 하나님이 기억하시리라.
기독교 역사상 한국개신교회가 가장 타락했다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
나는 죽음보다 교회의 타락이 더 슬프다. 』
여러분,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허 목사님의 선하게 생긴 얼굴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가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으로 한국교회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이 글을 썼을지 눈에 선합니다. 그런데 이 글을 읽고 여러 사람이 댓글을 달았는데 누군가가 그랬더군요.
“대형교회 목사의 죽음은 걍 뭐~ 죽음이고
‘대형교회의 타락 이거 망조야’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가?“
대부분의 독자들은 허 목사님의 글에 깊이 공감하는 댓글을 올렸는데 한 사람만은 비웃는 글을 올린 것입니다. 그러나 허 종 목사님은 한 대형교회 목사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사실은 한국교회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악령의 존재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국교회를 타락시키고 있는 악한 영의 존재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나는 죽음보다 교회의 타락이 더 슬프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한국교회를 감싸고 있는 악한 영은 도대체 무엇인가?
‘뉴스앤죠이’라는 인터넷판 기독교계 신문이 있는데 거기에 ‘조용기와 슐러의 몰락을 묵상하라’는 제목의 글이 며칠 전에 올라왔습니다. 미주 뉴스앤죠이 기자라고 되어있는 박지호라는 분이 쓴 글인데 내용으로 보아 아무래도 목사님인 것 같았습니다. 그분은 한국을 대표하는 조용기 목사님과 미국을 대표하는 로버트 슐러 목사님을 비교하면서 두 목사님으로 대표되는 현대교회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저도 평소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었기에 그 글을 잠깐 소개하겠습니다.
『 한국에 조용기 목사가 있다면, 미국에는 로버트 슐러 목사가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순복음교회·담임목사 이영훈)를 개척해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로 성장시킨 조용기 목사와 수정교회(Crystal Cathedral Ministries)라는 메가처치로 번영 신학과 교회 성장을 대중화시킨 로버트 슐러 목사는 여러모로 닮은꼴이다.
1958년 목회를 시작한 조용기 목사는 지난 2008년 은퇴를 선언하고 원로목사가 됐다. 로버트 슐러 목사도 비슷한 시기인 1955년에 목회를 시작해 2006년, 목회 현장을 떠났다. 차이라면 조 목사와 달리 로버트 슐러 목사는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줬다는 점 정도다.
둘 다 초대형 메가처치로 교회를 부흥시키며 성장 신화를 남겼다. 순복음교회는 80만 명(지교회 분립 이전)이 넘는 교인 수를 자랑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됐고, 노골적으로 '교회를 기업으로, 전도와 선교를 판매로, 불신자를 고객으로' 비유하며 교회 성장을 추구해온 수정교회도 한때 교인 수가 1만 명이 넘었다.
소위 '긍정의 힘', '번영 신학'의 전도사라는 점도 비슷하다. 조용기 목사는 성공 신학을 토착화한 '삼박자 축복, 오중복음'을 내세우며 하나님의 축복을 부의 획득, 사회적 성공과 연결시켰다. 80년대, 한국 교계에서 이단 시비가 거세게 일었지만 조용기 목사는 이를 잠재우고 영향력을 키워 갔다.
미국 '번영 신학'의 원조 격인 로버트 슐러 목사는 '긍정적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수정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을 이끌었다. "적극적 사고를 통해 성공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외쳐 온 로버트 슐러 목사는 1만 장이 넘는 유리로 뒤덮인 화려한 예배당으로 수정교회의 성장을 만방에 과시했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영향력을 확장한 것도 비슷하다. 순복음교회는 80년대 일간지인 <국민일보>까지 창간하면서 영향력을 키웠다. 평생 구독제라는 전대미문의 제도까지 도입하며 독자를 확보했다. "<국민일보>는 백지를 내도 30만 명이 보는 신문"이라는 말이 빈말이 아닌 셈이다. 로버트 슐러 목사가 출연하는 설교 방송 프로그램인 '아우어 오브 파워(Hour of Power)'는 고정 시청자만 2,0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별도의 언론사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가장 영향력 있는 '텔레반젤리스트(매스미디어를 통한 복음 설교자)'로 꼽히는 그의 영향력은 국경을 초월한다.
두 교회의 규모가 워낙 크다보니 교회 관련 사업 역시 그 규모가 대단하다. 수정교회의 경우 로버트 슐러 목사의 개인 설교 방송 사업부터, 화려하기로 소문한 성탄절·부활절 대형 이벤트 제작 사업, 부동산 사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순복음교회의 경우 신학교서부터 <국민일보>와 관련된 계열사, 순복음교회 관련 사업 등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조용기 목사나 로버트 슐러 목사가 각 교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절대적이다. 그렇다 보니 교회를 둘러싼 사업체와 기관을 조 목사와 슐러 목사의 친인척들이 요직을 나눠 맡으며 특혜를 누리게 된다. 순복음신학대학이 전신인 한세대학교는 조용기 목사의 아내인 김성혜 씨가 총장을 맡아 왔고, <국민일보>는 조 목사의 차남인 조민제 씨가 대표이사로 앉아 있다. 조 목사의 동생, 누이, 매제, 사돈까지 교회 관련 사업들에 얽혀 있다. 조용기 목사는 "친인척 중용을 배제한다"고 교회개혁실천연대와 약속했지만 2010년부터 2011년까지 가족들을 줄줄이 취임시켰다.
수정교회 역시 슐러 목사의 아들과 딸이 번갈아 담임목사를 맡으며 교회를 이끌었다. 사위인 짐 콜맨 씨와 제임스 페너 씨가 로버트 슐러 목사가 진행하는 방송 프로그램 제작 책임자로 있는 등 슐러 목사의 자녀 모두 수정교회에서 월급을 받거나 하청 업체로부터 수십 억대의 월급을 받아 왔다. 매년 가족들이 다양한 명분으로 타 가는 돈이 서류상으로만 120만 불에 달한다. 면세 혜택을 악용해 탈세를 저질러 온 사실도 최근 드러났다.
절대 권력자의 친인척들이 각종 이권 사업에 개입되면서 탈세·횡령 등의 각종 불법이 난무하게 된다. 조용기 목사도 마찬가지다. 탈세·횡령 혐의로 2001년, 일찌감치 구속됐던 장남 조희준 씨는 2005년에도 탈세·횡령으로 징역 3년(집행유예 5년, 벌금 50억 원)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해외로 도피했다가 체포되어 수감됐고, 조용기 목사가 벌금 50억을 대납한 후에야 석방됐다. 조 목사의 아내인 김성혜 씨 역시 배임·횡령·탈세 의혹이 따라다닌다. 최근에는 교회개혁실천연대가 <국민일보> 노조와 함께 김성혜 씨가 교회 돈을 빼돌렸다며 검찰에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조 목사는 "우리 가족이 도둑놈 아니다"고 항변하고 있다.
돈과 권력에 대한 집착은 내부 갈등을 촉발시킨다. 로버트 슐러 목사는 2006년 은퇴하면서 그의 아들인 로버트 안토니 슐러 목사에게 수정교회를 세습한다. 이후 2년간 안토니 슐러 목사가 담임을 맡았지만 2008년, 그의 누나인 실라 슐러 목사가 이사회의 실권을 잡으면서 로버트 안토니 목사가 물러나게 된다. 가족 간의 내분에 휩싸인 셈이다. 최근에는 로버트 슐러 목사마저 이사회에서 투표권을 박탈당하면서 사실상 교회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순복음교회는 좀 더 요란하고 복잡하지만 돈과 권력을 둘러싼 갈등이란 점에서 단순하다. 작년에는 <국민일보> 경영권을 두고 조 목사의 두 아들 간에 암투가 벌어진 사실이 언론을 통해 보도됐고, 최근에는 순복음교회 당회까지 나서면서 교회와 조 목사 가족 간의 갈등으로 증폭됐다. 당회는 조용기 목사 가족들이 교회 관련 사업에서 손을 뗄 것을 요구했고, 이에 조 목사와 가족들이 발끈한 것이다. 급기야 조용기 목사는 순복음교회를 떠나 새로운 교회를 만들 수도 있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결과는 무엇인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긍정의 신학'을 주장해왔던 로버트 슐러 목사가 파산 위기에 직면하는 망신을 당하게 됐다. 미국의 한 일간지는 수정교회의 파산 사태를 두고 '금 간 수정교회'라며 조롱하기도 했다. 조용기 목사 가족의 족벌 경영으로 "교회 헌금으로 가족들 배불린다"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고, 횡령·탈세·배임 등의 단어를 한국 사회에 회자시키며 구린 냄새를 풍기고 있다.
김진호 목사(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는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구원론’은 로버트 슐러 목사의 번영 신학을 받아들이며 '현대화'됐다"고 분석했다. 조용기 목사와 로버트 슐러 목사는 노골적으로 사람들의 탐욕을 정당화하며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목사들에게는 거대한 예배당과 수많은 교인을 꿈꾸도록 독려했고, 교인들에게는 돈과 성공을 향한 욕망을 부추겼다. 물질 축복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동일시하며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있는 것처럼 말했지만 본인들이 그 한계를 몸소 웅변한 셈이다.
남침례신학교 알버트 몰러 총장은 "'성공의 복음'은 예수님의 복음이 아니다. 테라피는 신학을 대체할 수 없다. '긍정적 사고'는 성경 말씀이 아니다"며 파산에 직면한 수정교회와 로버트 슐러 목사의 신학을 비판했다. 번영 신학에 대한 풀러신학교의 김세윤 교수의 일갈은 더욱 강력하다. "안녕과 행복을 보장하고자 하는 것이 맘몬 신앙의 핵심이며, 이는 이웃을 착취하게 만들고, 고난과 죽음을 증대시키는 사단의 통치 방식"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사탄의 통치 방식을 부추기는 번영 신학이 순복음교회와 수정교회만의 신학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대형 교회의 목회자들도 이런 미국 대형 교회의 신학적 영향을 무비판적으로 흡수했다. 설교와 책으로 긍정의 신학, 번영의 신학을 재생산했고, 대형 교회를 꿈꾸는 수많은 중·소형 교회들은 이를 교회 성장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대형 출판사들은 조엘 오스틴 등의 번영 신학 목사들의 책을 열심히 찍어 내며 전파해 왔다. 오늘날도 수많은 부흥사들의 레퍼토리는 조용기 목사와 로버트 슐러 목사의 '축복 신학'에서 파생된 논리들을 되풀이하고 있다. 조용기와 로버트 슐러 목사의 성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이들은 그들의 몰락을 지켜봐야 한다. 』
여러분!
결국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복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성공철학이 있고, 긍정적 사고방식과 축복철학은 있지만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이 아니기 때문에 복음인 것처럼 포장해야 했고, 그래서 필요했던 단어가 바로 ‘순복음’인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그 누구보다 자기들이 복음적이요, 말씀의 사도요, 경건의 사람이라고 큰소리쳤지만,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들을 축복하셔서 교회를 성장시켜 주셨고, 엄청난 일을 하게 하셨다고 큰소리쳤지만 결국 이제 와서 드러난 것은 복음과는 거리가 먼 말씀을 선포했다는 것과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의 그 누구보다 더 세속에 물들어있고, 자기와 가족들만을 위해 엄청난 돈을 쓰면서 맘몬의 종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들은 과연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 하나님 앞에 가서 뭐라고 할 것인가요?
그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그 누구보다 더 경건한 척, 그 누구보다 더 하나님의 시도인 척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들을 하나님의 사도로 믿고 몰려가서 말씀을 들었습니다마는 그러나 이제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설 날이 가까워지면서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종이 아니고 맘몬의 종, 탐욕의 종, 바알의 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렵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쓴 야고보 장로는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 우리들에게, 스스로 경건한 척 하며 살아가는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 깨우침의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혀를 다스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신앙을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실은 자기 마음 속에는 온갖 탐욕이 다 들어있는데, 세상적인 욕심이 다 들어있는데 혀로는 아무리 스스로 경건한 척 하고, 아무리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떠드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짜 경건한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거룩하고 경건한 것은 무엇인가?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 전한다고 떠드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위대한 로버트 슐러 목사님과 그의 가족들이 받는 돈이 120만 달러라지요. 도대체 얼마나 되는 돈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돈을 받으면서 경건하다고요? 아닙니다. 그것은 경건과 관계없습니다. 경건은 주위 사람들을 돌보아 주며,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속에 물든 삶이란 결국 자기만을 위해서 살고, 탐욕에 빠지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경건한 척 폼을 잡아도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고, 세속에 물들어 있으면 그것은 경건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경건한 삶을 산다는 것은 과연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유명한 마더 데레사 수녀는 다음과 같이 그것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늘나라를 받을 만한 자격을 주시려고 한 가지 조건을 주셨습니다. 죽음의 순간에, 당신과 내가 누구였든, 어디에 살았든,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하나님의 손으로 만들어졌으므로, 하나님 앞에 선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어떻게 대했으며 그들에게 무엇을 주었는지에 따라 판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름다운 판단 기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가난한 사람들이 바로 인간성의 희망이라는 사실에 눈떠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대했는가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옥좌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는 굶주렸고 헐벗었고 집이 없었다. 그리고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우리의 고통당하는 이웃도 하나님의 형상임을 깨닫게 될 때, 그리고 이 진리의 결과를 이해하게 될 때, 가난이라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사랑의 선교사인 우리도 할 일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경건의 삶을 산다는 것은 오늘의 본문에 나온 그대로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 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뭐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인가요? 준비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참다운 경건의 삶을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한 품에 안아주실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심판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 모두 참된 경건의 삶을 기억하고 살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시인 정종수의 시 한 편을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길가의 돌 / 정종수
『 나 죽어 하느님 앞에 설 때
여기 세상에서 한 일이 무엇이냐
한 사람 한 사람 물으시면
나는 맨 끝줄에 가 설 거야.
내 차례가 오면
나는 슬그머니 다시 끝줄로 돌아가 설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세상에서 한 일이 없어
끝줄로 가 서 있다가
어쩔 수 없이 마지막 내 차례가 오면
나는 울면서 말할 거야.
정말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무엇인가 한 일을 생각해 보라시면
마지못해 울면서 대답할 거야.
하느님,
길가의 돌 하나 주워
신작로 끝에 옮겨놓은 것 밖에
한 일이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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