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년도

2010. 9. 26 / 명절이 되어서 / 요한복음 5:1-9

람보 2 2015. 4. 5. 20:26

명절이 되어서(2010년 9월 26일)

 

본문) 요한복음 5장 1~9절

"그 뒤에 유대사람의 명절이 되어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드자다'라는 못이 있는데, 거기에는 주랑이 다섯 있었다. 이 주랑 안에는 많은 환자들, 곧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중풍병자들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님의 천사가 때떄로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는데 물이 움직인 뒤에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나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가 된 병자 한 사람이 있었다. 예수께서 누워있는 그 사람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랜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 것을 아시고는 물으셨다. '낫고 싶으냐?' 그 병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갔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참으로 기나긴 추석 명절 잘 보내셨습니까? 혹 아직도 출근하지 않고 오늘까지 연휴로 보내는 분들도 계신가요? 후유증 생기지 않도록 마무리 잘 하시기 바랍니다.

 

자, 아직 명절 기분이 다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오늘 한 번 더 명절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지난주에 행했던 두 명절 이야기를 읽고 은혜받았다고 메일 보내주신 분이 몇 분 계셨는데 오늘도 한 번 더 은혜를 나누게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요한복음을 읽는 중에 5장 1절에서 '명절'이라는 단어가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명절 이야기를 하루 더 하라는 것으로 알고 이 구절을 여러 번 읽었습니다. 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뒤에 유대 사람의 명절이 되어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다."

 

유대 사람의 명절이 되었다고요? 그렇다면 유대 사람들의 명절에는 어떤 것들이 있고, 그중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명절은 어느 것을 나타내는 것일까요?

 

유대인들이 지키는 명절 가운데에는 ‘하누카’나 ‘부림절’ 같은 것이 있기도 합니다. 하누카는 마카비 왕조 이후에 생겨난 절기로서 개역 성경에는 수전절(修殿節), 표준새번역에는 성전 봉헌절이라 번역되어 있습니다. 안티오쿠스 4세 때 성전이 더럽혀졌다가 마카비 독립 이후 성전을 수리하고 깨끗하게 만든 것을 기념하는 절기인데 지금으로 치면 양력 12월경입니다.

 

부림절은 에스더 왕비와 관련된 유명한 절기입니다. 바빌론에서 포로생활하던 유대인들이 하만의 손에 다 죽을 뻔하다가 에스더 왕비의 지혜와 용기로 인해 살아난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지요. 양력 2월 말이나 3월 초에 지킵니다.

 

이 두 가지 절기는 후대에 생겨난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사 초기부터 그러니까 율법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정해 주신 절기가 있으니 바로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입니다. 이 세 가지가 유대인들의 3대 명절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어디에 살든지 이 명절들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유월절은 다 아시는 대로 모세의 인도를 받은 히브리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해방절이지요. 이때는 겨울 보리를 추수한 것을 감사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는 칠칠절인데 유월절 지나 오십 일 째 되는 날이어서 오순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이때는 여름보리와 밀을 추수하는 때여서 이 전통을 이어받은 한국교회에서 이 날을 맥추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세 번째가 초막절입니다. 일 년 농사 중 마지막으로 포도와 올리브까지 다 수확하고 난 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날이자 동시에 출애굽한 조상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초막 또는 장막에서 지낸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장막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이때가 되면 유대인들은 바깥에 장막을 치고 거기서 먹고 자고 생활하면서 자기네 조상들이 광야생활하던 것을 기억했습니다. 우리로 치면 이것이 추수감사절입니다.

 

이 세 번의 절기를 지키기 위해 유대인들은 성전에 올라가는데 특히 멀리 사는 사람들은 세 번 다 올라갈 수 없으니까 한 번만 올라간다면 주로 초막절에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왜냐하면 이때가 모든 추수를 다 끝내고 새로운 농사를 시작하기 전이니까 일 년 중 사는 것이 제일 넉넉하고 마음도 제일 풍요롭고 여유있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절기는 그 세 가지 절기 중 어느 절기를 말하는가? 아무래도 유월절 아니면 초막절 둘 중 하나일텐데 마침 유월절은 2장과 6장에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유월절을 세 번 겪으시는 것으로 나오고 그래서 공생애 기간을 3년이라고 말하는 근거가 되는데 그것이 2장, 6장, 12장에 나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본문은 5장이니까 2장에 나오는 유월절 사건과 6장에 나오는 유월절 사건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본문이 유월절에 일어난 사건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의 본문에 보면 절기 명칭이 나오지 않고 그냥 “유대사람의 명절이 되어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 입장에서 보면 어느 절기인지 알기 어렵게 되어 있지만 당시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그냥 ‘명절’이라고만 불러도 언제인지 알 수 있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을 보면 곳곳에서 여러 절기 중 유독 초막절만 ‘여호와의 절기’ 또는 단순히 ‘절기’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세 절기 중 초막절이 가장 크고 중요한 절기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전통으로 보면 5장의 명절은 초막절임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초막절은 어떤 날인가? 초막절이 대체 어떤 날이기에 예수께서 본문에 나오는 일을 행하셨단 말인가? 신명기 16장 13~15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들은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에서 소출을 거두어들일 때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켜야 합니다. 당신들은 이 절기에 당신들과 당신들의 아들과 딸과 남종과 여종과 성 안에서 같이 사는 레위 사람과 떠돌이와 고아와 과부까지도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의 모든 소출과 당신들이 손을 댄 모든 일에 복을 주셨기 때문에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16장 13~15절)

 

그렇습니다.

초막절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복을 감사하며 즐거워하는 날입니다. 특히 초막절은 모든 추수가 끝나서 곡식도 풍성하고, 포도주도 잔뜩 담근 때이기에 모처럼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는 때입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유대인들은 초막절 잔치 때는 취할 만큼 포도주를 마시곤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신명기 16장 9~12절에 나오는 칠칠절 기록에도 똑같은 내용이 들어있습니다마는 초막절을 지킬 때 그것을 지키는 사람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초막절의 기쁨을 자기네 가족끼리만 즐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와 내 아내와 내 자식들하고만 그 기쁨을 나누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기쁨을 남종과 여종 즉 주인집의 농사와 살림을 위해 수고한 종들과 함께 나누라고 하나님은 명령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 안에 사는 레위 사람과 떠돌이와 고아와 과부까지도 불러다 음식을 나누며 함께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명령입니다. 명절에는 자기들끼리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과 함께 즐기라는 것입니다.

 

여기 성 안에 사는 레위 사람이 왜 나올까요? 레위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 때 토지 분배를 받지 못한 지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제사를 돕는 일을 했기에 나머지 지파들 동네에 들어가서 살았고, 따라서 동네 사람들은 자기네 동네에 들어와 사는 레위 사람들을 먹여 살릴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들과 떠돌이, 고아, 과부 등 혼자 힘으로 살 수 없는 사람들, 그래서 명절 때가 되면 더 쓸쓸해지고 외로워지는 사람들을 모른 체 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즐기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평소에도 그들을 보살피는 것이 유대인들의 가장 큰 의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명절이란 많이 가진 사람들이 자기네들끼리 먹고 마시고 즐기는 기간이 아니라 형편이 어렵거나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들을 기억하고 도와줄 것을 하나님께서 깨우쳐주는 기간이었던 것입니다.

 

자, 오늘의 본문은 바로 그 명절날 일어난 일입니다. 때는 초막절이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몰려 들어왔고, 그들은 먹고 마시며 즐기고 있었습니다. 분위기는 들떠 있었고, 사람들은 왁자지껄 웃고 떠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그 누구도 명절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거기가 바로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바로 그곳입니다.

 

예루살렘 성에 있는 양의 문, 그러니까 제물로 바칠 양들을 가지고 들어가는 야의 문이 있고, 그 곁에 히브리말로 베드자다, 어떤 사본에는 베데스다라는 이름이 붙은 연못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위에 다섯 개의 주랑 즉 행각이 있었는데 거기에 온갖 병자들이 모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연못의 물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천사가 때때로 연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는데 물이 움직인 뒤에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나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크나큰 축복인가요? 누구나 제일 먼저 연못에 들어가기만 하면 무슨 병이든 낫는다니 이것을 대단한 기적이요 축복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이것은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사실 이것은 너무나도 삭막하고 처절한 경쟁사회인 인간들의 삶을 나타냅니다. 바로 우리들이 사는 세상, 우리들이 사는 사회를 그대로 나타냅니다.

 

여러분, 한 번 잘 보십시오. 3절에 그 연못 주위에 있던 환자들의 종류가 나와 있습니다. 눈먼 사람들, 다리 저는 사람들, 중풍병자들이 그들입니다. 여기 중품병자를 개역성경에서는 혈기 마른 자라고 했는데 이는 결국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전신마비 내지는 반신불수가 되어 먹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해서 비쩍 마르고 꼼짝없이 누워만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소경은 앞을 볼 수 없으니까 천사가 내려와도 알 수 없고, 안다 해도 혼자서는 한 발짝도 걸어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다리 저는 사람들은 걷는 데 여러 가지로 불편한 사람들이고 중풍병자들 역시 혼자서는 꼼짝도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그 연못주위에 몰려 있는 환자들은 다 제각기 걷는 데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고 따라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같이 장애를 갖고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면서 물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리는 상황입니다. 그러다가 물이 움직이는 기미가 보이기만 하면 내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먼저 들어가야겠다고, 남은 어찌되든 나만 물에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상황입니까?

 

여러분!

베드자다라는 이름은 '자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데, 그러면 '자비의 연못'이 되어야 합니다마는 그 이름과는 정반대로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너무나 무자비한, 그야말로 너무나 처절한 싸움터였던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양보가 있고, 자비의 마음이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너 죽고 나 살자요, 장애인과 난치병 환자들의 치열한 경쟁만 있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오늘의 본문은 인간들의 세상을 그대로 나타냅니다.

 

거기에 무려 서른여덟 해 동안 누워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중풍병자였으리라 생각됩니다. 참으로 오랜 세월 그 물만 쳐다보며 이제나 저제나 나을 날을 기다렸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고 세월만 지났습니다. 그리고 그러다 결국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말 것입니다. 이제 가족들도 다 떠나갔고, 세상의 그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설혹 다시 천사가 와서 물을 헤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거기에 가서 물에 제일 먼저 들어갈 가능성은 눈꼽만큼도 없습니다. 어쩌면 그는 이제 모든 것을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거기에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초막절을 맞이해서 예루살렘에 올라온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아무도 그 환자들을 돌아보지 않았는데 오직 예수만이 그 환자들을 기억하고 거기를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중에 38년 된 환자를 보시고, 또 이미 오랜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 것을 아시고는 물으셨습니다. "낫고 싶으냐?"

그 병자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갔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자, 이제 여러분들 중에 누군가는 물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많은 병자들 중에 왜 하필이면 그 사람 하나만 고쳐 주셨는가? 나머지는 그대로 내버려두었단 말인가? 이왕 모처럼 오셨는데 거기 있던 환자들 다 고쳐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예수님은 그럴 능력도 있으신 분 아닌가? 그런데 그 한 사람만 고쳐주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었는가?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은 사실은 그 뒤, 그러니까 5장 17절부터 47절까지 나오는 제법 긴 설교말씀을 하기 위해 도입부로 기록된 것입니다. 예수가 당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으셨다는 것, 당신이 하니님께로부터 생명과 심판의 권세를 받으셨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한 도입부라는 말입니다. 저는 분명히 예수께서 베드자나 연못에 있던 병자들 중 낫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다 고쳐주셨다고 믿습니다. 성경에는 한 사람만 고쳐주신 것으로 나오지만 이것은 대표적인 예일 뿐, 예수께서 다 고쳐주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문제는 한 사람 고쳤느냐, 다 고쳤느냐 그것이 아니라 초막절이라는 큰 명절에, 분명히 남종과 여종과 레위 사람과 떠돌이와 고아와 과부들을 돌아보고 함께 즐거워해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던 그 큰 명절에 신앙심 좋다는 유대인들, 모세의 율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다 지킨다고 큰소리치는 그 유대인들 중에 그 누구도 그 병자들을 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돌아보고 위로하고 도움을 주기는커녕 10절에 나오는 대로 '오늘은 안식일이니,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은 옳지 않소' 라고 시비나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16절에 보면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신다고 해서 예수를 박해하였고, 심지어는 18절에 "유대 사람들은 이 말씀 때문에 더욱더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다"고 까지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똑같은 명절이 예수께는 병자들을 보살피고 돌아보고 살리는 때인데 비해서 소위 믿음이 좋고 율법을 다 지킨다고 큰소리치는 유대인들에게는 시비를 걸고, 의인을 박해하고 죽이려고 까지 하는 죽음의 때였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요한복음 5장에도 역시 두 잔치, 두 명절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명절을 정해 주셨을 때 그 명절의 뜻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사는 명절이 아니라 가난하고 불쌍하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보고 함께 살기 위한 절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명절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특히 스스로 믿음이 좋고 율법을 다 지킨다고 큰소리치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기 배만 불리고 자기 기분만 돋우고 즐기는 때가 되기도 합니다. 어느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 여러분!

오늘 이 시대 잔치는 과연 어떤 날입니까? 아니 우리들이 지키고 있는 잔치는 어떤 날입니까? 주님께서는 이번 명절에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요? 우리 모두 주님께서 어디에 계신지 돌아보십시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남은 날들이 예수와 함께 참다운 잔치가 치러지는 날들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