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잔치 이야기(2010. 9. 19)
본문) 마가복음 6:30-44
“사도들이 예수께로 몰려와서,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일을 다 그에게 보고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거기에는 오고 가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배를 타고, 따로 외딴 곳으로 떠나갔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것을 보고, 그들인 줄 알고, 여러 마을에서 발걸음을 재촉하여 그 곳으로 함께 달려가서,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으므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헤쳐, 제각기 먹을 것을 사 먹게 근방에 있는 농가나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그러면 우리가 가서 빵 이백 데나리온 어치를 사다가 그들에게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빵이 얼마나 있느냐? 가서, 알아보아라.’ 그들이 알아보고 말하였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하여, 모두들 떼를 지어 푸른 풀밭에 앉게 하셨다. 그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앉았다.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어서, 하늘을 쳐다보고 축복하신 다음에, 빵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다. 그리고 그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빵 부스러기와 물고기 남은 것을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빵을 먹은 사람은 남자어른만 오천 명이었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지난 금요일부터 추석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고향으로 달려가신 분들도 많을 것이고, 이 시간에도 고속도로나 기차로 가고 계신 분들도 계시겠지요. 모두들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을 들으시는 명절이 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원래 공식적으로는 추석을 기준으로 해서 앞뒤 이틀 해서 사흘을 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난 금요일부터 시작해서 토요일과 주일 쉬고 월요일 일하는 날인데 휴가내면 추석 연휴까지 해서 적어도 일주일 이상 많으면 열흘은 쉴 수 있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물론 그렇게 쉬고도 월급을 받으시는 분들은 좋으시겠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연휴가 길다는 말을 듣고는 한숨부터 쉬게 되지요. 저도 연휴가 그렇게 길다는 말을 듣고 맨 처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긴 연휴를 무슨 돈으로 보내나?”
역시 추석 명절은 흩어졌던 모든 가족들이 모여서 풍성한 음식을 먹으며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는 때입니다. 무엇보다 먹을 것이 많아야 하고, 먹어도 먹어도 또 먹게 되는 때가 명절입니다. 그리고 집안의 어르신을 중심으로 모든 자녀손들이 다 모여서 왁자지껄 웃고 즐기는 것이 명절이지요. 물론 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모일 가족이 없으니까 그저 성묘나 잠깐 다녀오면 그것으로 끝이지요. 앞으로 당분간은 명절 기분을 느끼기 어려우리라 생각됩니다.
자, 이제 저는 추석 명절을 맞아 성경에 나와 있는 두 개의 잔치 이야기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비록 두 개가 다 추석 명절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웃고 즐기며 음식을 나누는 잔치 이야기니까 추석에 딱 맞는 본문입니다. 그런데 그 두 개의 잔치가 사실은 엄청난 차이점을 갖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6장에는 두 개의 잔치 이야기가 나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17-29절에는 헤롯왕의 생일잔치 이야기가 나오고, 이어서 30-44절에는 그 유명한 5병 2어의 잔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과 같은 이야기가 마태복음 14장과 누가복음 9장에도 나오는데 거기도 똑같이 두 개의 이야기가 나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성서연구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성서저자들은 성서를 기록하면서 성서본문들 하나하나를 배열할 때 무심코, 아무렇게나 배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본문 하나하나를 깊이 생각해서 어디에 놓아야 할지를 생각해서 기록했습니다. 똑같은 내용의 본문도 그것이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즉 그 앞뒤에 어떤 본문이 있느냐에 따라 그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전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의 예만 들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사건은 네 복음서에 다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서에는 그 사건이 복음서 뒷부분 즉 마지막 일주일의 부분에 들어있는데 비해서 유독 요한복음만 공생애 초기에 그 일을 행하신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같은 사건인데 그 의미는 전혀 달라지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런 점에서 세 복음서 저자는 분명히 두 개의 잔치 이야기를 나란히 놓음으로써 그 두 개를 비교해볼 것을 독자들에게 요구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우선 17-29절에 나오는 헤롯왕의 생일잔치를 살펴봅시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왕의 생일잔치입니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그야말로 절대권력을 쥔 왕의 생일잔치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대단할지, 잘 차린 잔치일지 안 보고도 비디오입니다. 우선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이 누구이겠습니까? 21절에 보면 “헤롯이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요인들을 청하여 놓고, 잔치를 베풀었는데”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노라 하는 고관대작들이 다 참석했을 것입니다. 헤롯왕의 신하들로부터 로마에서 파견나오는 총독과 그의 부하들, 천부장으로 대표되는 군부 지휘관들, 갈릴리의 요인들이라고 표현되는 중요인물들, 부자라든지 해서 한가닥하는 사람들이 다 참석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각자 가장 좋은 선물들을 들고 왔을 것이고, 왕은 그야말로 신해진미로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의 음식과 술로 대접했을 것입니다. 술잔과 술잔이 부딪히면서 음탕한 눈빛과 아첨하는 혀가 재빨리 움직였을 것입니다. 그런 자리는 역시 왕에게 아부해서 한 자리 얻으려는 자들이 득실거렸을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음주가무라고 해서 노래와 춤이 빠질 리가 없지요. 22절에 곧바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서, 헤롯과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여러분이 영화에서 보셨겠지만 이때 헤로디아의 딸이 춘 춤은 지극히 야하고 요사스러운 춤이었을 것이고, 왕을 비롯한 고관대작들은 넋을 잃고 침을 흘리며 거기에 빠져 들었을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왕이 그 소녀에게 “네가 원하는 것이면, 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말했겠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거기 모인 왕과 고관대작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엉뚱하게도, 기가 막히게도 끔찍한 일이 일어납니다. 바로 세례 요한의 목을 자르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25-28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녀는 급히 왕에게로 돌아와서 청하였다. ‘곧바로 서둘러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내게 주십시오.‘ 왕은 마음이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한 것과 거기에 함께 앉아 있는 사람들 때문에, 소녀가 달라는 것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서 왕은 곧 호위병을 보내서, 요한의 목을 베어오게 하였다. 호위병은 나가서,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서, 쟁반에 담아 소녀에게 주고,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요한의 제자들이 이 소식을 듣고 와서, 그 시체를 거두어다가 무덤에 안장하였다.”
여러분, 무슨 말입니까? 그야말로 질탕하게 먹고 마시는 흥청망청한 잔치와 피로 범벅이 되었을 잘린 목이 쟁반에 담겨 나온 잔치, 이것이 헤롯왕의 생일잔치였던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웃고 즐기며 자기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산 사람의 목을 잘라 그 피를 흘리는 끔찍한 잔치, 이것이 바로 헤롯왕의 잔치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그 시간, 왕과 고관대작들이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며 웃고 즐기고 자기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세례 요한의 억울한 목숨을 빼앗던 바로 그 시간에 외딴 광야에 수많은 무리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거기 모인 숫자가 남자 어른만도 오천 명이나 되었는데 기가 막히게도 그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쫄쫄 굶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38절에 기가 막힌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빵이 얼마나 있느냐? 가서, 알아보아라.’ 그들이 알아보고 말하였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
그렇습니다.
남자 어른만 오천 명이고, 어린이와 여자들까지 합하면 어림짐작으로 이만 명은 되는데 그들 모두 하루 종일 먹지 못해 배는 고프고 해가 져서 먹을 것을 조사해 보았더니 어린아이가 갖고 있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라는 것입니다. 그것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 모인 무리들은 그만큼 가난하고 굶주리는, 그야말로 굶기를 밥 먹듯이 하는 그런 무리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서 혹 먹을 것을 주지 않을까 목이 빠져라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먹을 것이라고 모아보니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고요?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코웃음을 쳤을 것입니다. 저걸 누구 코에 붙이느냐고요. 그런데 여러분,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그것을 가지고 축복기도를 하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어쨌든 제자들은 말씀에 순종해서 그것을 나누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누고 나누어도 또 생기는, 그래서 거기 모인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셨을 때 무리들은 그야말로 허겁지겁, 하나라도 더 먹기 위해 집어넣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 모두가 배부르게 먹었고,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였다고 복음서 기자는 증거합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어쨌든 이것은 광야에서 벌어진 뜻밖의 잔치였습니다. 비록 헤롯의 생일잔치와 같이 산해진미와 술이 질펀한 잔치가 아니라 기껏해야 보리빵과 물고기 밖에는 없는 소박한 잔치였지만 그래도 그것만이라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크나큰 기쁨이었고 잔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만족했을 것이고, 모처럼 포식한 기쁨에 한껏 들떴을 것입니다.
자, 이 두 개의 잔치를 비교해 보십시오, 먼저 헤롯왕의 생일잔치는 어떻습니까? 그야말로 춘향전에 나오는 어사 이몽룡이 불렀던 시와 너무나 똑같지 않습니까? 여러분 모두 아시는 대로 변사또가 자기 생일을 맞아 잔치를 베풀고 춘향에게 수청을 들라고 강요합니다. 한참 먹고 마시며 흥을 돋우는데 어사가 출현했고, 그가 이 시를 읊습니다. 제가 그 시를 소개하겠습니다.
“금준미주(金樽美酒)는 천인혈(千人血)이요
옥반가효(玉盤佳肴)는 만성고(萬姓膏)라
촉루락시(燭淚落時)에 민루락(民淚落)하니
가성고처(歌聲高處)에 원성고(怨聲高)하노라“
우리말로 쉽게 풀이하면 이렇게 됩니다.
“금잔에 담긴 향기로운 술은 천백성의 피요,
옥쟁반의 맛있는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물이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던 곳에 원망 소리 높아간다.“
여러분!
헤롯왕의 생일잔치가 이것과 기가 막히게 똑같지 않습니까? 헤롯왕의 생일잔치는 권력자들, 지배자들의 어리석고 기괴한 탐욕에 사로잡힌 삶의 방식이 일반백성들에 대한 끊임없는 착취에 기반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신약학자 호슬리가 지은 “갈릴리 : 예수와 랍비들의 사회적 맥락”이라는 책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 갈릴리에 살던 백성들은 적어도 세 군데에 경제적 부담을 져야 했습니다. 로마인들에게는 조공을 바치고, 헤롯왕에게는 세금을 바치고,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들에게는 십일조와 헌물을 바쳐야 했다는 것입니다. 각각 10분의 2씩만 바친다 해도 피땀 흘려 번 돈의 60퍼센트 이상을 세금 등으로 내야했던 것입니다. 또 끊임없이 벌어지는 대규모 공사의 노역판에 끌려가야 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얼마나 가난하고 굶주렸을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헤롯왕의 생일잔치는 바로 그런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 치러지는 잔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이 바로 잔혹한 폭력이었습니다. 말 안 들으면 때리고, 감옥에 집어넣고, 죽이고 했으니 생일잔치에서 세례 요한의 목을 쳤다는 것은 바로 그 잔혹한 폭력의 한 가지 예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힘없는 자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대가로 부귀영화를 누렸던 것이고 그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헤롯왕의 생일잔치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 당시 로마 제국의 상류계층이 즐겼던 잔치는 결코 누구나 한 밥상에서 같은 음식을 나누는 평등한 잔치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전해지는 잔치 풍습에 따르면 손님의 지위고하에 따라 잔치의 상석과 말석이 정해졌습니다. 그래서 어느 자리에 앉는가에 따라 나오는 음식의 양과 질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당시 살았던 마셜이라는 사람이 친구가 초대한 잔치에 갔다가 괄시를 당하고 화가 나서 쓴 글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분개했습니다.
“식사에 나를 불러놓고, 그것도 전처럼 돈 주고 사온 손님도 이젠 아닌데 왜 당신이 받은 상과 똑같은 음식을 내게는 안 주는 거요? 당신은 류크린 호에서 자란 통통하게 살찐 굴을 먹는데 나는 고막을 빨아먹고, 당신이 송이버섯을 먹는데 나는 피리버섯을 먹고, 당신이 커다란 참가재미를 먹는데 나는 막가재미를 먹지 않소? 노란 기름이 흐르는 산비둘기의 살찐 엉덩이를 당신은 포식하는데 내 앞에는 새장 안에서 죽은 까치가 놓여 있소. 여보게, 폰티우스, 내가 당신과 식사를 같이 하지만 자네 없이 혼자 먹는 것만도 못하잖아? 근심걱정도 사라졌으니 이제 그 덕이나 좀 보지 그래, 음식이라도 같은 것을 먹어보세!”
그렇습니다.
헤롯왕을 비롯한 고관대작들의 잔치는 지극히 낭비적이고 폭력적인 자리입니다. 우정과 환대를 나누는 자리가 아니라 먹으면서도 지위고하를 느끼고 열등한 신분을 드러내는 차별의 식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예수는 궁궐이 아니라 들판에 있었습니다. 왕과 고관대작들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배고프고 굶주린 무리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함께 먹었다는 것은 헤롯왕의 잔치와는 전혀 다른 현실, 전혀 다른 잔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적은 음식을 가지고 오천 명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았다는 것은 물론 예수의 능력을 나타내는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가난한 백성들이 예수와 함께 경험한 공동체적 삶의 넉넉함과 기쁨을 나타낸 것이 아니겠습니까? 단순히 보리빵과 물고기가 초자연적으로 늘어났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족한 음식이나 보잘 것 없는 음식을 서로 나눌 때 오히려 풍족하게 먹을 수 있다는 삶의 신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헤롯왕의 생일잔치는 함께 먹는 가운데 하나됨과 기쁨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우월한 자리에 있는 자는 다시 한 번 자기의 높은 신분을 과시하고, 열등한 자리에 있는 자는 쓰디쓴 입맛을 다져야 하는 자리입니다. 이들의 잔치는 여흥으로 의인의 목과 피를 요구합니다. 잔칫상 앞에서 그들은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시기와 질투, 증오의 불꽃이 이글거립니다. 그야말로 음산하고 천박한 잔치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무리들과 함께 하셨던 잔치는 소박한 몇 가지 음식만으로도 그 어떤 산해진미의 잔치보다 풍성하게 즐길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 누구도 차별받지 않고, 그 누구도 소외당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더 먹지 않고, 그 누구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참여한 사람 모두기 다 똑같이 배부르고, 즐겁고, 기쁜 잔치입니다.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기가 사람이라고 느끼고, 사람으로 대접받는 것을 느끼는 잔치입니다. 그렇기에 비록 가진 것이 없지만 더불어 살아가면서 동고동락하는 공동체의 삶을 오늘의 본문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두 개의 잔치가 마가복음 6장에 나란히 나와 있습니다. 헤롯의 잔치와 예수께서 베푸셨던 보리빵과 물고기 잔치였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개의 잔치는 엄청난 차이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추석입니다. 곳곳에서 잔치가 벌어질 것입니다. 아니 이미 음식준비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음식을 먹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내가 속해 있는 가정, 교회, 사회, 국가에서 벌어지는 잔치는 과연 어떤 잔치입니까? 헤롯왕과 같은 소수의 무리들이, 재물과 권력을 쥔 자들이 자기들끼리 모인 잔치에 혹 참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가진 것이 없지만, 차린 것이 별로 없지만 그러나 예수를 모신 잔치에 여러분이 참여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한국사회와 한국교회가 열어놓은 잔치가 과연 어떤 잔치인지 돌아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한국사회와 한국교회가 추구하는 세상이 과연 어떠한 세상인지 우리는 끊임없이 물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연 잔치에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계십니까?
두 개의 잔치, 그 중에서 우리는 지금 어느 잔치에 참여한 것입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대답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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