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저물었을 때(2010. 9. 12)
본문) 요한복음 6:16-21
“날이 저물었을 때에, 예수의 제자들은 바다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갔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께서는 아직 그들이 있는 곳으로 오시지 않았다. 그런데 큰 바람이 불고, 물결이 사나워졌다. 제자들이 배를 저어서, 십여 리쯤 갔을 때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무서워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래서 그들은 기꺼이 예수를 배 안으로 모셔 들였다.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수천 년 역사상 최고의 지도자는 모세였습니다. 그 옛날 유대인의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 하고 있을 때, 그것도 우리 민족처럼 35년 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무려 400년이나 되는 오랜 세월 동안 노예로 지내고 있을 때,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을 갖지 못하게 되었을 때, 이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 그 민족에게 주셨던 약속을 다 잊어버리셨다고 모두들 체념하고 있었을 때, 바로 그때 나타나 유대인들을 이집트의 바로로부터 해방시켜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했던 지도자 모세, 세상에 그보다 더 위대한 인물은 없었습니다. 세상에 그보다 더 위대한 지도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후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모세와 같은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바랐고, 메시아가 온다면 그는 바로 제2의 모세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도 예수가 메시아라고 증거하면서 끊임없이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가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가를 드러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꾸 모세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있음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1장에서 예수는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제일 먼저 안드레를 부르셨고, 그를 통해 그의 형인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세 번째로 부른 제자가 빌립인데 빌립은 자기 친구 나다나엘을 예수께로 데려가기 위해 찾아가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습니다. 그분은 나사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 (요한복음 1:45)
예수님 당시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 최고 지도자 중 하나인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한밤중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와서 대화를 나누었다는 이야기가 요한복음에만 나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니고데모가 잘 알아듣지 못하자 예수께서 당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모세와 비교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인자 밖에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3:13-15)
그렇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구리뱀을 들어 몇 사람을 살렸지만, 예수는 당신이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세보다 훨씬 뛰어난 이가 바로 나, 예수라고 증거하고 계신 것입니다.
5장에 보면 예수께서 38년 동안이나 앓아 누워있던 병자를 고치신 사건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날이 안식일이라고 해서 유대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논쟁이 붙었습니다. 치열한 논쟁 끝에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말아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온 모세이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모세가 나를 두고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가 모세의 글을 믿지 않으니, 어떻게 내 말을 믿겠느냐?” (요한복음 5:45-47)
그리고 이제 6장에 그 유명한 5병2어의 기적 사건이 나오는데 이것 역시 모세의 사역과 정확히 비교됩니다. 6장 1-15절까지 그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먼저 4절에 의하면 그때가 마침 “유대 사람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습니다. 유월절은 바로 모세가 유대인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올 때, 하나님께서 이집트의 장자들을 치셨던 날을 기념하는 명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유월절 하면 이는 곧 모세의 날이었습니다.
바로 그 유월절이 가까운 때 어느 날, 예수님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이 남자만 오천 명, 그러니까 여자와 어린아이들까지 계산하면 엄청난 수인데 그들은 한결같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기껏해야 어린아이 하나가 갖고 온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16장에 의하면 모세를 따라 나온 이스라엘 온 회중은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파 죽겠다고 난리를 칩니다.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렀다.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둘째 달 보름이 되던 날이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항의하였다.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 땅 거기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음식을 먹던 그 때에, 누가 우리를 주님의 손에 넘겨주어서 죽게 했더라면 더 좋을 뻔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지금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나와서, 이 모든 회중을 다 굶어 죽게 하고 있습니다.’ ” (출애굽기 16:1-3)
그러니까 모세를 따라 나왔던 유대 백성들도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있고, 예수님께 나아왔던 무리들도 배가 고파서 뭔가 먹을 것을 주지 않나 하고 기다리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자, 이런 상황 가운데 예수께서는 빌립을 시험해 보셨다고 복음서 기자는 증거합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서,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모여드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어디에서 빵을 사다가,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예수께서는 빌립을 시험해 보시고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었다.” (요한복음 6:5-6)
마찬가지로 출애굽기 16장 4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도 백성들을 시험하여 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먹을 것을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줄 터이니, 백성이 날마다 나가서, 그날 그날 먹을 만큼 거두어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그들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하여 보겠다. 매주 엿샛날에는, 거두어들인 것으로 먹거리를 준비하다 보면, 날마다 거두던 것의 두 배가 될 것이다.’ ” (출애굽기 16:4-5)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도 그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넉넉하게 주실 것이고, 또 하나님께서도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광야의 유대인들이 먹을 것을 넉넉하게 주실 것인데 그것이 그들이 믿음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는 도구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것과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하신 역사가 같은 것입니다.
또 출애굽기 16장의 기록과 요한복음 5장의 기록을 보면 모세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께서는 배고프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넉넉히 베풀어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6장 12절에서 “너희가 저녁이 되면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빵을 배불리 먹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에 너희는 나 주가 너희의 하나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진 것처럼, 요한복음 6장 12-14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배불리 먹은 뒤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남은 부스러기를 다 모으고, 조금도 버리지 말아라.’ 그래서 보리빵 다섯 덩이에서,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표징을 보고 ‘이 분은 참으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그 예언자이다’하고 말하였다.”
결국 요한복음 기자는 지금까지 살펴본 이 모든 기록들을 통해 예수는 누구인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최고지도자로 손꼽고 있는 모세보다 더 뛰어나신 분,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모세를 통해 유대인들을 구원해내신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아니 더 정확하게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도 일반 백성들은 조금 나은 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예언자라고, 왕으로 모셔야 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14-15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표징을 보고 ‘이 분은 참으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그 예언자이다’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억지로 자기를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올라가셨다.“
문제는 바로 제자들입니다. 예수께로부터 친히 선택받고, 특별교육까지 받고 있는 제자들입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요?
날이 저물었을 때에, 예수의 제자들은 바다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 가버나움을 향해 갔습니다. 이미 어두워졌는데, 예수께서는 아직 그들이 있는 곳으로 오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짤막한 도입부분에 ‘날이 저물었을 때에’, ‘이미 어두워졌는데’ 라고 해서 두 번씩이나 어둠에 잠기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어둠에 잠긴다는 것, 빛이 사라지고 무언가를 보기 어려워지는 상황입니다. 저는 이것을 단지 해가 지고 어두워졌다는 것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요한복음 저자가 두 번씩이나 그런 표현을 썼을까요? 물론 시간적으로 해가 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마는 그보다는 제자들이 여전히 믿음의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영적 어둠에 머물러 있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어둠이 이미 짙어졌는데도, 예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돌아오지 않으셨다”는 표현을 제가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더 나아가서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가 누구이신지 깨닫지 못하고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무서워하였다’고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분명히 걸어오고 있는 분이 예수님이신데 제자들이 이를 보고 반갑게 맞이한 것이 아니라 무서워했다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나오는 ‘무서워하였다’는 표현은 곧 ‘겁에 질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제자들은 분명히 자기들 눈앞에서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쯤 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기들 손으로 직접 광주리 하나씩을 들고서 남은 것을 모았는데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찬 것을 본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마땅히 예수야말로 모세보다 더 위대하신 분,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분, 인간의 모든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분이심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중 그 누구도 그런 깨달음을 고백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깨닫기는커녕 예수가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무서워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렇습니까? 이유는 오직 하나, 예수님의 열두 제자마저도 예수님을 배고픈 내 배 채워줄 수단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그 굶주린 유대인들처럼,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그 굶주린 무리들처럼 예수를 자기네들이 원하는 것을 얻는 데 도움이 되는 한갓 수단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서 저자가 ‘날이 저물었을 때’라고, ‘이미 어두워졌다’라고 표현한 이유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유대인들 그리고 요한복음에 나오는 유대인들과 제자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하나님을 그리고 예수님을 수단으로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모세를 따라나섰고, 예수를 따라나섰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욕망을 채울 수 없게 되자 끊임없이 모세를 배반하고, 욕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끝내 광야에서 죽어갔습니다. 또한 예수를 끊임없이 비방하고, 시비하고, 논쟁하다가 끝내 예수를 팔아 넘겼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무엇에 굶주려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 단순히 돈 몇 푼 벌고, 좋은 직장 얻고, 건강을 얻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인간으로 궁극적으로 얻어야 할 그 무엇을 찾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6:26-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여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줄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자를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여러분!
요즘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마치 ‘날이 저물었을 때’를 사는 것 같습니다.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세상은 점점 더 악해져가는 것 같고, 모두들 욕심에 가득 차서 자기 이익들만 챙기느라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는 것이 무섭고, 무언가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계시지 않는 것처럼, 우리 곁을 떠나가신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저를 포함한 기독교인들도 결국 나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 주실 분으로서의 예수만 찾고 있는 것 때문은 아닌가요? 그런 점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날이 저물었을 때’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두려움을 떨쳐 버릴 때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큰 바람이 불고, 물결이 사나워졌지만 바다를 건너 우리에게 다가오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하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예수를 모셔 들임으로 우리 모두 새로운 삶을 살아가십시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십시다. 어둠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지만 한 줄기 빛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그리고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약속하시는 주님을 맞아들입시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2010 년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0. 9. 26 / 명절이 되어서 / 요한복음 5:1-9 (0) | 2015.04.05 |
---|---|
2010. 9. 19 / 두 잔치 이야기 / 마가복음 6:30-44 (0) | 2015.04.05 |
2010. 9. 5 / 공정한 사회 / 미가서 7:1-7 (0) | 2015.04.05 |
2010. 8. 29 / 우리의 꿈 / 이사야서 40:1-11 (0) | 2015.04.05 |
2010. 8. 22 / 왜 엘리야인가? / 마가복음 6:14-16 (0) | 2015.04.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