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년도

2010. 10. 10 / 친구 / 요한복음 15;11-17

람보 2 2015. 4. 5. 20:30

친구(2010.10.10)

 

본문) 요한복음 15:11-17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은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표준새번역 개정판)

 

 

먼저 두 가지 사건을 소개하면서 오늘의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하나는 제가 속해 있는 감리교단의 공식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지난 9월 말에 11개 연회 감독선거가 있었습니다. 아시는 대로 우리 감리교회에는 감독회장이라고 부르는 총대표가 한 분 있고, 미주특별연회를 포함해서 모두 11개 연회가 있는데 그 대표를 감독이라고 부릅니다. 현재 법적으로 감독회장 임기는 4년이고 연회감독은 임기가 2년인데 이번에 새로운 연회감독을 선출한 것이지요. 단독후보가 나와서 무투표 당선된 연회감독도 있지만 후보가 둘 또는 셋 나온 연회들은 치열한 경쟁이 있었고, 그 결과 각각 감독들이 선출되었습니다. 이제 그분들이 앞으로 2년 동안 감독의 직분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감독선거 때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다는 소문이 도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주로 돈과 관계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후보자와 서거인단 사이에 돈이 오고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물론 돈을 주었다는 사람도 없고, 받았다고 고백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지만 소위 ‘심증은 가는데 물증은 없다’는 것이겠지요. 그런 소문이 게시판 상에 떠돌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번에 출마했던 분 중에 한 분이 그것을 지적하면서 앞으로 감리교회의 개혁과 변화를 위해 함께 노력한 동지를 찾는다는 글을 게시판에 올렸습니다. 사실 개혁과 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는 말이지요.

 

그런데 누군가가 그 글에 댓글을 하나 달았습니다. 그래서 열어보았더니 그 글에 찬성하는 댓글이 아니라 거기에 ‘동지’라는 단어를 쓴 것에 대한 시비를 거는 글이었습니다. ‘동지’라는 단어는 북한에서 주로 쓰는 말인데 왜 그런 단어를 썼느냐, 혹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서는 ‘동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니냐 하면서 비웃듯이 댓글을 쓴 것이지요. 저는 그 댓글을 보면서 이렇게까지 심한 편견을 가진 사람이 아직도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지나 동무라는 말이 얼마나 좋은 뜻을 갖고 있는데 그걸 북한에서 사용한다고 해서 마치 북한에 가까운 것처럼 표현하다니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깨동무라는 단어도 쓰면 안 되는 것인가요?

 

또 하나, KTX 소위 고속철도 역 이름 사건입니다. 오는 11월 1일, KTX 경부선 대구~부산간이 개통되는 데 울산과 양산 사이에 역이 생긴답니다. 저는 아직 KTX를 타보지 못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지만 어쨌든 서울에서 부산까지 2시간 20분이면 가게 된다지요. 그런데 그 새로 생기는 역 가까운 곳에 유명한 절인 통도사가 있기 때문에 역명심의위원회에서는 그 역 이름을 “울산/통도사역”이라고 정하고 공식적으로 발표했었답니다. 그런데 역 이름에 통도사라는 절 이름이 들어간 것을 알게 된 그 지역 목사님들이 들고 일어나서 엄청난 압력을 넣었다는 것이지요. 한 마디로 역 이름에서 통도사라는 말을 빼라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코레일(한국철도공사) 측에서 궁여지책으로 통도사라는 이름은 크기를 절반으로 줄여서 쓰면 어떻겠느냐고 의견을 내놓았는데 개신교 측에서 그것도 결단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그랬답니다. 그래서 결국 코레일 측에서는 통도사라는 이름을 완전히 빼고 그냥 “울산역”이라고 결정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불교계에서 가만히 있을 리 있나요? 그 지역은 특히 불교계의 영향력이 큰 지역이지 않습니까? 그 지역 온 불교계가 나서서 통도사라는 이름을 살리기 위한 투쟁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 지역 정치인을 움직인다지요. 자칫 잘못하다가는 대규모 종교분쟁이 일어날 것 같다는 뉴스가 전해졌습니다.

 

문제는 한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온 이 뉴스에 댓글이 100개 정도 달렸는데 거의 대부분이 기독교를 비난하는 것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종교가 종교다워야지. 권력집단으로 변해가는 건 ... 뭐냐 ... 대통령 믿고서 설치는거냐? 개독들아!”

“하나님을 팔아 밥벌이하는 말종들!!!

하나님의 이름으로 치장한 사탄들!!!“

“예수가 이 뉴스 보면 기절초풍. 그렇게도 타 종교에 대한 배려가 없냐? 하여간 아주 희한한 종교야. 단군상을 목을 따지를 않나? 무섭다.”

 

그리고 이러한 댓글들마다 찬성 추천이 수십 개 씩 달리고 반대는 기껏 있어야 한 개입니다. 심지어는 이런 댓글까지 있었습니다.

“아..... 개독 ..... 이래서 개독이라 합니다.

때려잡자 개독, 박멸하자 개독“

그리고 여기에는 무려 찬성표가 175표, 반대표는 달랑 1표가 붙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일들을 보면서 이 시대 한국사회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또한 목사로서 예수를 증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저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한다고, 제 설교주제는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하고 있는데 과연 그 하나님의 나라란 어떤 나라인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인터넷에 쓰는 글에다 ‘동지’라는 단어를 썼다고 해서 그 사상을 의심하는 사람들, 목사들, 기차역 이름에 절이 들어갔다고 해서 그것을 빼라고, 빼지 않으면 종교전쟁도 불사하겠다고 떠들어대는 목사들, 또 그것을 개독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이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요? 이렇게 답답하고, 혼란스럽고,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과연 예수는 무엇을 전하러 오셨고, 그가 선포했던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그 예수는 어떤 사람들에게 찾아오셨고 어떤 나라를 전하려 했는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 땅에 오셔서 소위 공생애를 지내실 때 그분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부자들도 물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나타난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나중에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 장례를 치르게 되었을 때 몰약에 침향 섞은 것을 100근을 가져 왔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꽤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또 세리 삭개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인데 그도 역시 큰 부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부자들도 기꺼이 맞아주셨고, 당신에게 오는 사람들을 품어주셨습니다. 결코 그들을 내치지 않으셨고, 그들을 당신의 제자로 삼아주셨습니다. 또 사는 것이 넉넉한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청해서 대접하고 싶어 했을 때 그분은 기꺼이 가셔서 함께 식사를 하며 친교를 나누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들을 제외한다면 예수는 한결같이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찾아가시고 만나주셨습니다.

첫 번째 복음서로 알려진 마가복음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아예 1장부터 예수께 귀신들린 사람들과 병자들이 찾아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1장 16-20절까지에서 제자 네 사람을 부르신 후 곧바로 등장하는 인물이 다름아닌 귀신들린 사람이었습니다. 이어서 32-34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가 져서 날이 저물 때에, 사람들이 모든 병자들과 귀신 들린 사람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온 동네 사람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그는 온갖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많은 귀신을 내쫓으셨다.” (마가복음 1:32-34)

 

이어서 나병환자, 중풍병 환자를 고치시고 2장 13절부터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레위는 세리였습니다. 한 마디로 당시 유대인들로부터 로마의 앞잡이요, 민족반역자라고,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예수는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마가복음 8장에 보면 4천 명을 먹이시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그 무렵에 다시 큰 무리가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 한 마디로 굶주린 무리들이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놓고 말씀하셨다. ‘저 무리가 나와 함께 있은 지가 벌써 사흘이나 되었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가엾다. 내가 그들을 굶은 채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그 가운데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 -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먹을 게 없는데 그냥 돌려보냈다가는 가다가 굶어 죽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이 빈 들에서, 어느 누가, 무슨 수로, 이 모든 사람이 먹을 빵을 장만할 수 있겠습니까?’ ” - 그렇습니다. 거기 무슨 빵집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일곱 개가 있습니다.’ ”

그리고 맨 끝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사람은 사천 명쯤이었다.” - 그러니까 사람은 그렇게 많은데 빵은 달랑 일곱 개뿐인 상황입니다. 참으로 가난하고 굶주리고 배고픈 무리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찾아온 사람들,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병들고, 굶주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어디에 가서도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고, 주눅 들고, 의기소침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군인들, 헤롯의 정탐꾼들, 바리새인이나 제사장들로부터 끊임없이 수탈당하고 구박받고 움츠러들어야 했던, 도무지 그 어디에서도 사람답게 살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 당시 일반 백성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농사를 지어보았자 로마황제, 헤롯왕, 예루살렘 성전에 이것저것 다 뜯겨야 하는 사람들, 그래서 결국 땅 팔아먹고 집 없이 땅 없이 떠돌아다녀야 했던 무리들, 그래서 날품팔이를 하든지 거지가 되든지 안되면 도둑이 되든지 하던 사람들, 그러다 병이라도 걸리면 병원 한 번 못가보고 죽기만을 기다려야 했던 무리들입니다. 그래서 비쩍 마르고, 옷은 남루하고, 온몸에 땟국이 묻어있을 사람들, 그 누구도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

 

그런데 여러분!

오직 예수만이 그들을 찾아가셨고, 또 찾아오는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단 한 번도 그들을 내친 적이 없으셨고, 차별하신 적이 없으셨으며, 왜 그 모양이냐고 큰소리 한 번 치신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도 화를 내고, 욕을 하고, 저주를 퍼부은 적이 있지만 그것은 오로지 바리새인이나 제사장같은 종교지도자들을 상대로 했을 때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가난하고 무지하고 천대받던 무리들을 향해서는 단 한 번도 그런 일을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주고, 위로하고, 고쳐주고, 먹여주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서 그런 사람들을 친구라고 불러주신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나 로마의 권력자들이나 헤롯왕으로부터 도무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던 그들을 친구라고 불러주셨던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에수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은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께 나아오는 제자들을, 무리들을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친구라고 부르신 분입니다. 저는 그들을 친구라고 부르신 예수께서 저도 친구라고 불러주실 줄로 믿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시는 예수를 저는 나의 주님으로 믿습니다.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시며 친히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예수를 저는 주님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믿고 그분의 삶을 본받아 사는 사람들이 모인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예수께서 마음속에 갖고 계셨던 따뜻함을 회복하면 좋겠습니다. 그가 얼마나 좋은 옷을 입었는지 아닌지, 얼마나 돈이 많은지 아닌지, 그가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 아닌지를 묻지 않고 당신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친구로 불러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따뜻한 마음이 한국교인들의 마음속에 가득 차게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한국교인들이 참된 우정을 회복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정신을 되살릴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가난하지만, 가진 것 없지만 서로 나누고 위로하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들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한국교인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 다 내 친구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교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예수께서 한국교회 어디에나 함께 계시게 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끝으로 참된 친구는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준 화가 이중섭에 얽힌 이야기 하나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화가 이중섭에게는 시인인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어느 날, 그 친구는 폐 절단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누구누구는 꼭 문병을 올 거야. 중섭이야 제일 먼저 달려오겠지.’

그러나 올 만한 사람들은 다 병문안을 다녀갔는데도 친구인 중섭은 오지 않았습니다. 친구는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럴 수가? 중섭이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지?’

우정에 대한 불신이 친구의 마음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습니다. 마침내 중섭이 병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중섭은 평소처럼 남루하게 들어왔습니다. 그 친구는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자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나는 다른 그 누구보다도 자네가 제일 먼저 달려올 줄 알았네. 다른 사람은 오지 않아도 자네만은 와줄 거라 믿었단 말일세.’

친구의 물음에 이중섭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친구가 누워 있는 병상 곁에 앉아 머리를 긁적거릴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이중섭은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습니다. 담뱃갑 속지인 은박지를 꺼내더니 그 자리에서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는 이중섭이 내민 담뱃갑 속지를 들여다보았습니다. 그걸 한 입 베어 물면 당장이라도 기운이 솟을 것처럼 탐스런 천도복숭아였습니다.

‘왜, 이걸 먹으면 어떤 병이든지 낫는다고 하지 않아...... .’

이중섭은 얼굴을 붉히며 말끝을 흐렸습니다. 그때만 해도 생계를 꾸려나가기조차 힘든 무명화가였던 이중섭은 작은 선물 하나 사올 돈이 없어 문병을 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보고 싶은 마음을 이기지 못해 무작정 찾아와서는 친구가 평소에 좋아하던 천도복숭아 그림으로 선물을 대신했던 것이지요.

이중섭의 말에 친구의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이중섭이 내민 천도 복숭아 그림 하나, 작지만 그 어떤 선물보다도 값진 우정이 병실 안을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그 빛은 친구의 마음속에 어두운 그늘을 지게 했던 불신과 미움까지 몰아냈지요.

등에 졌던 힘든 짐들을 모두 내려놓고 이 세상을 떠나던 날까지 그의 서재에 천도 그림을 걸어두었던 친구의 이름은 구 상(시인)이었습니다.

 

여러분!

한국교회가, 이 땅에 있는 교인들이 그런 참된 우정을 회복하게 되면 좋겠습니다. 그러한 친구들이 우리들 곁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세상 친구들 중에는 그런 분들이 없을지라도 그런 친구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러분 모두 우리의 친구가 되시는, 우리를 친구로 불러주시는 예수를 맞이하시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분들이 모두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