뽑힌 사람은 적다(2009. 5. 31)
본문) 마태복음 22:1-14
“예수께서 다시 여러 가지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임금이 자기 종들을 보내서, 초대받은 사람들을 잔치에 불러오게 하였는데,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말하였다. ‘초대받은 사람들에게로 가서, 음식을 다 차리고,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아서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잔치에 오시라고 하여라,’ 그런데 초대받은 사람들은,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떠나갔다.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가고, 한 사람은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의 종들을 붙잡아서, 모욕하고 죽였다. 임금은 노해서, 자기 군대를 보내서 그 살인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도시를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자기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사람들은 이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 그러니 너희는 네거리로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너라.’ 종들은 큰길로 나가서,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만나는 대로 다 데려왔다. 그래서 혼인잔치 자리는 손님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임금이 손님들을 만나러 들어갔다가, 가기에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한 명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묻기를, ‘이 사람아, 그대는 혼인예복을 입지 않았는데,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는가?’ 하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때에 임금이 종들에게 분부하였다. ‘이 사람의 손발을 묶어서, 바깥 어두운 데로 내던져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부름받은 사람은 많으나, 뽑힌 사람은 적다.“ ” (표준새번역 개정판)
자,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세 가지 비유 가운데 맨 마지막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앞에서 두 아들의 비유와 포도원 소작인에 대한 비유를 통해서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배척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엄하게 경고하셨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 즉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분명히 하나님께로부터 초대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도 다 지켰고, 제사도 열심히 드렸으며, 하나님께 많은 것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의롭다 여기고,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아서 그 열매를 맺는 민족에게 주시리라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의 본문인 혼인잔치의 비유를 통해 유대의 종교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새 이스라엘 즉 교회는 과연 어떠한가를 보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전형적인 하늘나라의 비유입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하늘나라 비유들이 대개 “하늘나라는 무엇무엇과 같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것과 같이 오늘의 비유도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오늘의 본문 제목 옆에 나와 있는 괄호 안의 글자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비유는 비슷한 내용이 누가복음 14장에도 나와 있습니다. 비교해서 읽어보면 큰 줄거리는 비슷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마태복음에 나와 있는 비유의 내용은 누가복음에 나와 있는 비유의 내용과는 다른 특징들을 갖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4장에 나오는 비유를 보면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라고 시작함으로써 일반적인 잔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 의하면 하늘나라는 일반적인 잔치가 아니라 어떤 임금이 베푼 아들의 혼인 잔치입니다. 그러니까 대단한 권력을 쥐고,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왕의 아들, 곧 왕자의 혼인잔치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대단히 성대하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이 풍성하고, 초대받는 것이 엄청난 영광임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고위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집안에 혼사가 있을 때 몰래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공연히 널리 알렸다가는 구설수에 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옛날 왕자의 결혼식은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왕자가 결혼을 할 때가 되면 우선 금혼령을 내려서 모든 처녀들이 결혼을 하지 못하게 막아놓고, 간택령을 내려 신부감들을 골라내지요. 그중에서 뽑힌 사람들을 궁궐로 데려와서 고르고 골라 마침내 왕비가 될 사람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나서 치루는 결혼식은 그야말로 나라의 경사 중의 경사이니까 엄청난 비용을 들여 치르게 됩니다. 그러니 그런 잔치에 초대를 받는다는 것은 영광 중의 영광입니다.
따라서 하늘나라를 아들의 잔치를 치루는 임금으로 나타내는 것은 참으로 적절해 보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기쁨과 풍성함을 누리는 것을 나타내는 데 잔치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없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예언자 이사야는 하나님이 베푸실 잔치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만군의 주님께서
이 세상 모든 민족을
여기 시온 산으로 부르셔서,
풍성한 잔치를 베푸실 것이다.
기름진 것들과 오래된 포도주,
제일 좋은 살코기와
잘 익은 포도주로
잔치를 베푸실 것이다.
또 주님께서 이 산에서
모든 백성이 걸친 수의를
찢어서 벗기시고,
모든 민족이 입은
수의를 벗겨서 없애실 것이다.“ (이사야서 25:6-7)
또한 예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마태복음 8:11)
자, 그렇다면 누가 하늘나라 잔치에 초대받았습니까? 누가 하늘나라 잔치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오늘의 본문에 의하면 임금이 자기 종들을 보내서, 초대받은 사람들을 잔치에 불러오게 하였는데,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에게로 가서, 음식을 다 차리고,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아서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잔치에 오시라고 하여라,”
여기까지만 보면 임금이 누구를 초대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5절에 그것을 알 수 있을만한 내용이 약간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받은 사람들은,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떠나갔다.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가고, 한 사람은 장사하러 갔다.”
여러분! 보십시오.
임금님의 아들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의 신분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자기 밭을 가고, 장사하러 갔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임금이 보낸 종들을 붙잡아서, 모욕하고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복음에서 보면 그들이 누구인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핑계를 대기 시작하였다. 한 사람은 그에게 말하기를 ‘내가 밭을 샀는데, 가서 보아야 하겠소. 부디 양해해 주기 바라오’ 하였다.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시험하러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기 바라오’ 하고 말하였다. 또 다른 사람은 ‘내가 장가를 들어서, 아내를 맞이하였소. 그러니 가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누가복음 14:18-20)
밭을 샀고, 겨릿소 다섯 쌍을 샀고, 또 장가를 들었다는 것은 그들이 제법 유족한 생활을 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 당시 세상에서 밭을 소유한 지주, 겨릿소를 다섯 쌍이나 살 수 있는 부자, 여유 있게 장가를 갈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형편이 좋은 사람들이요,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바로 그들이 임금의 아들 혼인잔치의 초대를 거부하였고, 심지어는 그것을 알리러 온 종들을 붙잡아서, 모욕하고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간단하게 표현되었지만 임금의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부자들, 가진 것이 넉넉한 자들, 사는 것이 여유가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곧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들이 하늘나라의 초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초대를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셨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을 보내 회개하라고 촉구해도 회개하지 않고, 예수를 보내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7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임금은 노해서, 자기 군대를 보내서 그 살인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도시를 불살라 버렸다.“
그렇습니다.
여기까지는 분명히 하늘나라에 초대받은 자들, 즉 유대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냅니다. 그들을 향해 경고하시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에 이제 하나님께서는 새 이스라엘을 불로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공으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8-9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사람들은 이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 그러니 너희는 네거리로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너라.’ 종들은 큰길로 나가서,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만나는 대로 다 데려왔다. 그래서 혼인잔치 자리는 손님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자, 여기서 비유는 끝나도 됩니다. 이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심판받았고, 새 이스라엘 즉 교회가 하늘나라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해피 엔딩(Happy Ending)으로 마무리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까지만 놓고 본다면 비유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하늘나라의 주인공은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억압받고 천대받는 백성들,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세리나 창녀 같은 이들이 하늘나라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실제로 누가복음은 거기서 비유의 내용이 끝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태복음은 거기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가 가득 찼다는 것으로 끝나면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태복음에는 조금 이상한 표현이 들어있습니다. 임금은 종들에게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라고 명령했고, 종들은 나가서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만나는 대로 다 데리고 왔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거기에 예복을 갖춰 입고 오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러놓고 나서, 임금이 손님들을 만나러 들어갔다가, 거기에 혼인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한 명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물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아, 그대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았는데,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는가?”
그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자, 임금이 종들에게 분부하였습니다.
“이 사람의 손발을 묶어서, 바깥 어두운 데로 내던져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혼인잔치에 참석할 사람들은 단순히 있는 모습 그대로 참석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예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입어야 하는 예복이 무엇입니까? 비싼 양복점에 가서 맞춰 입는 양복입니까? 아니면 백화점에 가서 사는 아름다운 양복입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얼마짜리 이상의 옷을 입어야 한다면 부자들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물론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예복이란 무엇인가요?
우리가 성경을 찾아보면 여기서 말하는 예복이 무엇일지를 보여주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먼저 사도 요한이 그의 책 계시록에서 표현한 그대로입니다.
“할렐루야,
주 우리의 하나님,
전능하신 분께서 왕권을 잡으셨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어린 양의 혼인날이 이르렀다.
그의 신부는 단장을 끝냈다.
신부에게 빛나고 깨끗한
모시옷을 입게 하셨다.
이 모시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다.“ (요한계시록 19:6-8)
예언자 이사야 역시 정의의 겉옷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랑에게 제사장의 관을 씌우듯이,
신부를 패물로 단장시키듯이,
주님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혀주시고,
의의 겉옷으로 둘러 주셨으니,
내가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할 것이다.“ (이사야서 61:10)
그렇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이 입어야 할 예복은 바로 “정의”입니다. “의로운 행위”입니다. 정의를 행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는” 것으로 표현했고, “새 사람을 입는” 것으로 나타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26-27)
“여러분은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골로새서 3:9-10)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이 단지 유대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합당한 예복 즉 정의와 사랑의 행위, 사람을 살아야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오늘의 본문 맨 마지막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부름 받은 사람은 많으나, 뽑힌 사람은 적다.”
여러분!
우리 교회의 크기가 작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교회가 크다고 해도 뽑힌 사람이 하나도 없는 교회가 있을 수 있고, 아무리 작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뽑힌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교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름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냐 하는 것이 아니라 뽑힌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바로 하나님의 정의를 행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국 문제는 어떻게 사는가입니다. 정의의 편에 서서 사랑의 삶을 사는가 아니면 불의의 편에 서서 남들을 미워하며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 산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들에게 증거하며 산다면 우리는 뽑힌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다 단순히 부름받은 사람만이 아니라 뽑힌 사람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태복음강해(06.9.17-10.4.18) > 2009 년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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