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06.9.17-10.4.18)/2009 년도

2009. 6. 7 /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 마태복음 22:15-22

람보 2 2015. 4. 4. 21:14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2009. 6. 7)


본문) 마태복음 22:15-22

“그때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면 말로 트집을 잡아서 예수를 올무에 걸리게 할까 의논하였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자기네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이렇게 묻게 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한 분이시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시며,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으시는 줄 압니다. 선생님은 사람의 겉모습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선생님의 생각은 어떤지 말씀하여 주십시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의 간악한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세금으로 내는 돈을 나에게 보여 달라.’ 그들은 데나리온 한 닢을 예수께 가져다 드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이 초상은 누구의 것이며, 적힌 글자는 누구를 가리키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황제의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탄복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남겨두고 떠나갔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서기 6년, 로마의 첫 번째 황제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는 유대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던 헤롯 대왕의 아들 아르켈라오스 왕을 폐위하고 그 대신 총독을 임명하여 직할통치를 시작했습니다. 그 첫 번째 총독의 이름은 코포니우스였습니다.


총독 코포니우스는 유대 지방에 부임한 후 제일 먼저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주민세를 부과했습니다. 주민세란 어린이와 노인만 빼고 열둘 또는 열네 살부터 예순 다섯 살까지의 주민이면 누구나 바쳐야 하는 인두세로서, 주민세 수입은 모두 다 로마 황실 금고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인두세는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주민세는 반드시 로마 은전인 데나리온으로 바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 총독이 정확하게 주민세를 걷기 위해 미리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 그것이 호구조사입니다. 어느 집에 누가, 몇 명이 사는지를 알아야 정확히 세금을 매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총독 코포니우스도 호구조사를 하였고, 바로 거기에 저항해서 반란을 일으킨 이야기가 사도행전 5장 3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뒤에 인구조사를 할 때에, 갈릴리 사람 유다가 일어나 백성들을 꾀어서, 자기를 뒤따라 반란을 일으키게 한 일이 있소. 그도 죽으니, 그를 다르던 사람들은 다 흩어지고 말았소.”

(사도행전 5:37)


여러분!

이 구절은 예수님 당시 유명한 율법교사요,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던 바리새인인 가말리엘이 한 말입니다. 그는 비록 갈릴리 사람 유다의 반란이 실패했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다 흩어지고 말았다고 증거했지만 그가 일으켰던 사건이 바로 로마 총독 코포니우스의 주민세 부과에 대한 거부운동이었고, 이때 생겨난 것이 바로 열심당이었습니다. 이들은 유다가 죽고 나서 곧 없어진 것이 아니라 이후 오랫동안 살아남아서 로마와 그 앞잡이들에 대한 저항운동을 끈질기게 벌였던 것입니다. 그들 중에 예수님의 제자도 있었던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주민세 납부를 거부했는가?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 홀로 이스라엘의 통치자라는 신앙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왕이요, 지배자이신데 로마 황제에게 주민세를 바친다면 이는 황제를 통치자로 인정하는 행위이므로 신앙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민세를 바치면 안 된다고 그들은 주장했습니다. 또 하나는 주민세로 바치는 데나리온 은화에는 왕관을 쓴 황제의 흉상과 황제의 어머니인 대비의 좌상이 새겨져 있고, 황제를 신격화하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데나리온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율법과 유일신 신앙에 어긋나는 돈이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사람 유다와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목숨을 걸고 주민세 납부 거부운동을 벌였고, 여기서 열심당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은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그들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자들이었기에 열심당과 같은 극단적인 저항운동을 벌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양심의 번민을 느끼면서도 온건한 입장을 취해서 주민세를 납부했습니다.


자, 바로 그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제 예수를 찾아와서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온갖 좋은 말은 다 늘어놓았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한 분이시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시며,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으시는 줄 압니다. 선생님은 사람의 겉모습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물론 입에 발린 소리입니다. 예수께서도 그것을 뻔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면서 듣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마침내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니 선생님의 생각은 어떤지 말씀하여 주십시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바리새인들은 지금 함정을 판 것입니다. 예수께서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을 판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께서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면 그는 당장 정치적 반역죄로 체포될 것입니다. 반대로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말한다면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우상숭배를 인정했다고 해서 온갖 비난을 다 받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은 실망하고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어쩌면 열심당들이 예수를 암살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생겨날 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참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생각해도 기가 막힌 질문을 던졌다고 생각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흉계를 다 아셨습니다. 그 질문이 함정인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18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간악한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간악한 자들입니다. 겉으로는 예수를 한껏 높이고, 온갖 미사여구를 다 썼지만 속으로는 예수를 잡아 죽일 생각만 하는 간악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겉으로는 사람이 한없이 선하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인 것 같은데 속에는 다른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악독한 것이 들어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종교인들 중에, 그중에서도 스스로 거룩한 척 믿음이 좋다고 자랑하는 무리들 중에 이런 간악한 자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세금으로 내는 돈을 나에게 보여 달라.’ 그들은 데나리온 한 닢을 예수께 가져다 드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이 초상은 누구의 것이며, 적힌 글자는 누구를 가리키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황제의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자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이 사건이 일어나던 당시 로마 황제는 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 아우구스투스였습니다. 따라서 당시 사용되던 데나리온에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흉상이 조각되어 있었고,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신의 아들 아우구스투수 아우구스투스” 이를 번역하면 “티베리우스 황제, 지존한 신의 지존한 아들”입니다.


물론 간교한 로마당국자들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감수성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유대인들의 영토에서는 황제의 흉상을 새기지 않은 화폐를 만들어서 사용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단, 황제에게 세금을 바칠 때에는 반드시 황제의 흉상이 새겨진 데나리온을 바치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바로 그 데나리온, 황제의 흉상이 새겨진 데나리온을 가져오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이때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굳이 “세금으로 내는 돈을 나에게 보여 달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데나리온 한 닢을 예수께 가져다 드렸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황제의 흉상이 새겨진 그 돈을 자기들 주머니에 갖고 있었던지, 아니면 적어도 손으로 건네받아서 들고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율법을 일점일획도 어기지 않고 다 지켰다고 큰소리쳤지만 사실은 이미 황제의 흉상이 새겨진 데나리온을 사용하기도 했고, 손으로 만지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주민세를 내고 있었고, 따라서 새삼스럽게 질문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질문한 것이야말로 그들이 얼마나 간악한 자들인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초상은 누구의 것이며, 적힌 글자는 누구를 가리키느냐?“라고 예수께서 물으시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대답했습니다. ”황제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그렇습니다.

당시 사고방식대로 하면 황제가 만들어서 사용하게 한 데나리온은 당연히 황제의 전유물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황제를 황제로 인정한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그 데나리온을 사용함으로써 이미 황제의 통치권을 시인한 셈입니다. 그러니까 황제가 주민세금으로 데나리온을 요구하면 납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어라”는 말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예수께서 거기까지만 말씀하셔도 충분한 대답이 된 것이고, 그 누구도 더 이상 시비를 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전혀 뜻밖에도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이 무슨 말입니까? 데나리온에는 황제의 흉상이 들어있으니 그것을 황제에게 세금으로 내면 되지만 너희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니 너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는 창세기 1장 27절의 말씀을 기억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창세기 1:27)


그렇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들이기에 인간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인간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황제에게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을 바침으로써 그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나 자신을 온전히 바침으로써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마태복음 22:37)

그리고 이것은 신명기 6장에 나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들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신명기 6:4-5)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리라”는 말씀은 인간인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뜻,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황제에게 세금을 바칠 것인가를 놓고 논쟁을 벌이고, 그것으로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 했지만 예수께서는 그것을 뛰어넘어 전혀 다른 차원의 말씀을 그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 드려라.”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전혀 다른 차원의, 그야말로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너희가 동전을 황제에게 바쳤다면, 너희는 너희 자신은 누구에게 바쳤느냐?”


그렇습니다.

오늘의 사건의 핵심은 결국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사는가?”입니다. 물질이 사람을 부리는 주인이 될 수 없듯이 정치권력도 사람을 부리는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질이 사람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되듯이 황제도 사람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제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되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누구를 위해 사느냐?”


그렇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으로 시작했지만 결국은 예수께서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너희는 너희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고 있느냐?” 그리고 바로 그 예수께서는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묻고 계십니다.

“너희는 너희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고 있느냐?”


여러분, 여기에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나는 과연 나 자신을, 내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고 있는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 이 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온전히 나 자신을, 내 삶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