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가?(2009. 5. 17)
본문) 마태복음 21:28-32
“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해라’ 하고 말하였다. 그런데 맏아들은 대답하기를 ‘싫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 그는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대답하기를 ‘예,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서는,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 둘 가운데서 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느냐?” 예수께서 이렇게 물으시니. 그들이 대답하였다. “맏아들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옳은 길을 보여주었으나,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치지 않았으며, 그를 믿지 않았다.” “ (표준새번역 개정판)
저는 오늘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본문을 읽는 가운데 왠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히 내용을 잘 아는 비유인데 앞뒤가 잘 맞지 않는 것이 이상했습니다. 우선 우리가 본문으로 읽고 있는 표준새번역 개정판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포도원 주인에게 아들이 둘 있었습니다. 그는 맏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해라.”
그런데 맏아들은 “싫습니다” 하고 대답했다가, 뒤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즉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것이지요. 그는 “예, 가겠습니다” 하고 대답해 놓고는, 가지 않았습니다.
자, 이렇게 너무나 뻔해 보이는 예를 들어놓고는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둘 가운데서 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느냐?”
31절에 보면 “그들이 대답하였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맏아들입니다.”
그 대답을 듣고 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옳은 길을 보여주었으나,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치지 않았으며, 그를 믿지 않았다.”
자, 이야기를 정리해 봅시다.
우선 이 비유에서 예수님과 질문을 주고받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오늘의 본문이 23절부터 이어지고 있는 것이니까 그들은 분명히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33절부터의 비유 끝부분인 45절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라고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모두 예수를 적대시하고, 예수를 없애려고 벼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본문은 분명히 그들, 즉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한 마디로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꾸짖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자 비유입니다.
그렇다면 포도원 농부의 두 아들이 각각 누구를 나타내는지는 금방 드러납니다.
맏아들 : 싫다고 대답 :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둘째아들 : 예라고 대답 : 실제로는 일하러 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누가 훌륭한 사람이고, 구원받은 사람입니까? 물론 맏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따진다면 맏아들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세리와 창녀들이고 예수께 시비를 거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 그리고 바리새파 사람들은 둘째아들에 해당됩니다. 세리와 창녀들은 맏아들처럼 싫다고 한 사람들, 즉 율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인데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예’라고 대답은 했지만, 즉 율법은 지켰지만 회개하지 않았기에 실제로는 일하러 가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자, 그런데 이렇게 말해 놓고 보면 뭔가 이상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기로는, 또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 바리새인들이 맏아들의 위치에 있으니까 사실은 맏아들이 “예, 가겠습니다” 하고는 가지 않고, 세리나 창녀들이 둘째 아들의 위치에 있으니까 그가 싫다고, 가지 않겠다고 해 놓고는 뉘우치고 가야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가 옛날에 보았던, 또 지금도 대부분의 교회에서 보고 있는 개역성경에는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개역성경으로 같은 본문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개역성경, 마태복음 21:28-32)
자, 어느 것이 맞는 것인가요? 개역성경이 맞는 것입니까, 아니면 표준새번역이 맞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맞고 틀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에는 많은 사본들이 있는데 그 사본 중 어느 것을 번역했느냐에 따라 달라진 것뿐입니다. 지금 막 읽어드린 개역성경은 소위 “바티칸 사본”이라고 알려진 것을 바탕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재로 쓰고 있는 표준새번역이나 최근에 번역된 성경들은 소위 “시내산 사본”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것이 맞고, 어느 것은 틀리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맏아들은 “예‘라고 말해놓고 가지 않고, 둘째 아들은 싫다고 했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갔다고 한 것이 솔직히 더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 그리고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은 말은 그럴 듯하게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거역했고, 반대로 세리와 창녀들은 온갖 죄를 다 지었지만 나중에는 뉘우치고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 등은 구원받지 못했고, 세리와 창녀들은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이 복음서 전체의 이야기와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맏아들은 대제사장과 장로, 바리새인들을 나타내고 둘째아들은 세리와 창녀들을 나타낸다고 해석하는 것이 편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해석을 소위 알레고리적 해석이라고 해서 성경을 해석하는데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가장 경계하는 해석방법입니다. 이것은 가장 쉽고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성경을 읽는 사람이 제 마음대로 정해놓은 틀에 맞춰 해석하는 것이기에 요즘 학자들은 그런 방법을 전혀 쓰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맏아들이 누구고, 둘째 아들이 누구인가가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국 누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결코 누가 맏아들이고 누가 둘째아들인가를 따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가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인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자, 여기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대제사장, 백성의 장로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같은 종교인들, 종교지도자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세리와 창녀로 대표되는 죄인들입니다. 그들 중에 과연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인가?
대답은 너무나 뻔해 보입니다. 세리나 창녀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은 원래 죄인들이고, 율법을 전혀 지키지 않았으니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종교인들, 종교지도자들은 율법도 다 지키고 거룩하게 살았으니 마땅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만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아니면 도대체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이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큰소리쳤습니다. 그리고 세리나 창녀들을 향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멸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전혀 엉뚱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여러분, 여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라고 되어 있는 이 표현은 희랍어성경을 보면 현재형인데 정확히 번역하면 “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즉 “너희들은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죽어서 천당에 가고 못가는 정도가 아니라 지금 들어가고,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해서 세리와 창녀들은 지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고, 종교지도자들은 들어가고 있지 못하다는 말입니까? 32절에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옳은 길을 보여주었으나,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치지 않았으며, 그를 믿지 않았다.”
그렇다면 요한이 와서 옳은 길을 보여 주었다는데 그 옳은 길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알려면 복음서에서 세례 요한을 찾아야겠군요. 마태복음에는 세 군데에 세례 요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3장, 11장, 14장입니다. 그중 11장은 감옥에 갇힌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낸 사건이고, 14장은 요한의 죽음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별 관계가 없고, 하나 남은 것이 3장인데 거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부근 사람들이 다 요한에게로 나아가서,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며,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많은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너희는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를 이미 나무뿌리에 갖다 놓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실 것이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이시다.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는 손에 키를 들고 있으니,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여,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 (마태복음 3:5-12)
여기 보면 세례 요한에게 많은 사람들이 나아가서,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며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요한이 그들을 꾸짖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이 그들을 다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을 때, 요한은 아주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까지 욕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람들이 자기에게 나아온 것이 거짓임을,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쭉정이같이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을 경고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말은 했으나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심판을 당했습니다. 그것을 마태복음 기자는 23장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 (마태복음 23:1-3)
그렇습니다.
이렇게 놓고 보았을 때 오늘의 본문의 핵심은 바로 32절입니다. 너희는, 즉 대제사장들, 장로들, 바리새인들은 요한이 옳은 길을 보여주었으나 믿지 않았습니다. 보고도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들은 비록 죄인이었지만 말씀을 듣고, 믿고 뉘우쳤으며, 세례 요한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예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은 “의롭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뉘우치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일찍이 산상수훈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락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
(마태복음 7:21-23)
자,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갑니까? 대제사장, 장로, 바리새인, 사두개인 등과 같은 입술만의 교인, 머리만의 교인이 들어갑니까? 아니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았지만 말씀을 듣고, 믿고 뉘우치고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까? 결론은 분명합니다. 말씀을 듣고, 믿고 뉘우치고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중요한 것은 무조건 믿느냐가 아니라 믿고 그대로 사는가입니다. 우리 교회 표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이웃사랑으로 나타내느냐 아니냐입니다. 그렇게 산다면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진실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태복음강해(06.9.17-10.4.18) > 2009 년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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