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06.9.17-10.4.18)/2009 년도

2009. 5. 10 / 예수의 권위 / 마태복음 21:23-27

람보 2 2015. 4. 4. 21:02

예수의 권위(2009. 5. 10)

 

본문) 마태복음 21:23-27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다가와서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시오?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를 물어 보겠다.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말하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왔느냐? 하늘에서냐? 사람에게서냐?“ 그러자 그들은 자기들끼리 의논하며 말하였다. ” ‘하늘에서 왔다’고 말하면, ‘어째서 그를 믿지 않았느냐?’ 고 할 것이요, 또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자니, 무리가 무섭소. 그들은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오늘의 본문부터 시작해서 25장까지에는 예수께서 수난을 당하시기 직전에 행하신 가르침들이 집중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섯 장 가까이 되는 이 부분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오늘의 본문부터 23장까지는 예수께서 성전 안에 계시면서 대적들과 치열하게 싸우신 사건입니다. 그리고 24-25장은 성전 밖에서 예수께서 종말에 대한 가르침을 행하신 기록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부터 당분간 예수께서 행하신 말씀들을 주로 다루게 될 것입니다. 그중에서 오늘의 본문은 예수께서 성전 안에 계시면서 대적들과 다투시는 사건의 도입부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자,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아마도 설교를 하셨다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이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다가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시오?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무슨 말입니까?

한 마디로 예수, 당신이 뭔데 함부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성전을 뒤집어엎고, 눈 먼 사람들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을 고쳐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그런 일을 하려면 랍비라고 하는, 일종의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어야 하는데 당신이 언제 랍비가 되었고, 누가 그런 권한을 주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물음에는 예수에 대한 경멸과 비웃음이 들어 있습니다. 아무리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고, 더구나 갈릴리 출신이고, 랍비 교육이라고는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고, 그런 능력을 행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예수,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탄으로부터 온 불의의 사람이라는 비웃음이 한껏 들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유대 사회에서 랍비는 가장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그들은 일반 유대인들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전통을 연구하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유대인 사회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랍비가 참여하고 개입한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세계 어느 곳에 흩어져 살든지 20여 가구만 모이면 반드시 회당을 세우고 랍비를 모셔서 교육을 담당하게 하고, 종교행사와 각종 의식을 주재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랍비들은 모든 유대인들의 정신적 지도자요, 스승이요, 의식의 주재자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유대인들은 랍비들을 최대한 공경하고, 절대적으로 떠받들었습니다.

 

오늘날도 유대인 사회에는 반드시 랍비들이 있는데 랍비가 되는 과정은 아주 까다롭고 엄격합니다. 요즘 미국에서 보면 랍비가 되는 학교는 대학원에 해당하기 때문에 거기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일반대학에서 학사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대학원 과정에서 성서, 히브리어, 아랍어, 이스라엘 역사, 유다 문학, 법률, 심리학, 설교학, 교육학, 철학 등의 시험과 몇 편의 논문도 써야 합니다. 그리고 4년에서 6년 동안 탈무드를 중급 과정부터 공부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과목은 바로 탈무드입니다. 이렇게 배출된 랍비들 중에 훌륭한 사람들을 유대인들은 ‘성인’이라고 부르며 존경합니다.

 

자, 그러니까 유대 사회에서는 그렇게 제대로 공부한 사람들이 권위를 갖고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예수 당신은 아무런 공부도 하지 않았으면서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행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괜히 저 혼자 잘난 척 하지 말고 갈릴리로 가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를 물어 보겠다.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말하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왔느냐? 하늘에서냐? 사람에게서냐?“

 

무슨 말입니까?

세례 요한이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그가 세례를 베푼 권한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세례를 베풀 권한을 주신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 즉 랍비나 대제사장 같은 사람들이 권한을 준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자,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만약 세례 요한의 권한이 하늘에서 왔다면, 즉 세례 요한이 진정 하나님이 보내신 예언자라면 그들은 세례 요한을 믿어야만 했고, 또 회개하라는 그의 요청에 순종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세례 요한을 믿지도 않았고,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반대로 세례 요한이 사람에게서 왔다면 세례 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신 예언자로 여기는 백성들로부터 크게 당할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 모른다고 대답해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자, 그렇다면 진정 예수의 권한은 어디에서 왔는가? 여기서 예수께서 대답하지 않으셨으니 우리도 그냥 모른 척 하고 넘어갈 것인가요? 또 세례 요한의 권위와 예수의 권위는 같은가요, 다른가요? 이제 그것을 좀 찾아볼 차례입니다.

 

여러분!

마태복음에 의하면 분명히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맨 처음에 전한 메시지는 똑같습니다.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서, 유대 광야에서 선포하여 말하기를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였다.” (마태복음 3:1-2)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마태복음 4:17)

 

분명히 세례 요한과 예수는 똑같이 회개를 선포하고,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슨 권세로 그런 말씀들을 선포할 수 있었던가?

 

마가복음 1장을 보면 세례 요한의 권세가 참으로 대단한 것임을 보여주는 표현이 나오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 기록하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앞서 보낸다.

그가 네 길을 닦을 것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

한 것과 같이,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서,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그래서 온 유대 지방 사람들과 온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에게로 나아가서,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며,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마가복음 1:1-5)

 

잘 보십시오. 세례 요한은 일찍이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서 약속하신 그 예언의 성취로서 나타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에게 말씀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말씀을 주셨고, 그 말씀의 성취가 세례 요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례 요한에게 주신 권세는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문자 그대로 보면 세례 요한이 행하는 세례를 받으면 죄를 용서받게 되는 것처럼, 그래서 마치 세례 요한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야말로 세례 요한은 엄청난 권위의 소유자가 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 오면 이렇게 오해를 불러 일으킬만한 표현은 나오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요한에게로 나아와서, 자기들의 죄를 자백했고, 요한은 ‘죄를 용서받게 하는’이라는 표현은 삭제된 채 단지 세례를 베풀었을 뿐입니다.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었다. 그의 식물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그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부근 사람들이 다 요한에게로 나아가서,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며,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마태복음 3:4-6)

 

그렇습니다.

세례 요한은 분명히 하나님이 보내신 예언자이기는 했지만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말씀을 대언하고, 세례를 베풀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분, 곧 하나님의 대리자였습니다.

 

우선 예수는 이름 자체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요셉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주님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 들여라. 그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 (마태복음 1:20-21)

 

그렇습니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곳곳에서 그러한 권세를 나타내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 대표적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셔서, 바다를 건너 자기 마을에 돌아오셨다. 사람들이 중풍병 환자 한 사람을, 침상에 누인 채로, 예수께로 날라 왔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말씀하셨다. ”기운을 내라, 아이야. 네 죄가 용서받았다.“ 그런데 율법학자 몇이 ”이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고 있느냐?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걸어가거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말하기가 쉬우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들이 알게 하겠다.“ 그리고 예수께서 중풍병 환자에게 ”일어나서, 네 침상을 거두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무리가 이 일을 보고서,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이런 권한을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마태복음 9:1-8)

 

이 본문은 세 번씩이나 예수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으며(9:13),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속죄물로 주러 왔다(20:28)고 선언하심으로써 당신의 권위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께서는 세례와는 다른 성만찬 의식을 제정하심으로써, 죄의 용서가 성만찬 의식 속에 반복적으로 가능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들이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받아서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서 감사 기도를 드리신 다음에, 그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모두 돌려가며 이 잔을 마셔라. 이것은 죄를 사하여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제부터 내가 나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 것을 마실 그 날까지, 나는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절대로 마시지 않을 것이다.’ ” (마태복음 26:26-29)

 

굳이 덧붙이자면 바람과 바다도 예수께 복종하고(마8:27), 귀신들도 복종하고(마 8:32), 심지어 죽음까지도 예수께 복종함으로써(마 9:23-26) 예수의 권위는 바로 하늘로부터 온 것임을 마태복음 기자는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누구이신가? 하늘로부터 모든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위를 받으신 분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로 예수께서 그런 권위를 갖고 오신 분이심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그런 권위를 대놓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그것은 예수의 권위를 말로 한다고 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어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향해 아무리 말로 설명한들 받아들일 리가 없습니다. 결국 그런 점에서 믿음은 체험에서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억하며 살아가는 가운데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을 체험하는 은총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무슨 이상한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말씀에 깊이 사로잡혀 묵상하는 가운데,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의 정신을 드러내려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다가 문득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기를 빕니다. 그래서 예수야말로 하늘에서 오신 분임을 고백하고, 나의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고, 그분의 권위를 믿고 살아가게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