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태복음 22:23-33

같은 날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모세가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에게 장가들어서, 그 후사를 세워주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이웃에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장가를 들었다가, 자식이 없이 죽으므로, 아내를 그의 동생에게 남겨 놓았습니다. 둘째도 셋째도 그렇게 해서, 일곱이 다 그렇게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맨 나중에는,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그러니 부활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모두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기 때문에, 잘못 생각하고 있다. 부활 때에는 사람들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두고 말하면서, 너희는 아직도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께서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의 하나님이시다,“ 무리는 이 말씀을 듣고, 예수의 가르침에 놀랐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고자 나섰다가 실패한 후 이번에는 사두개파 사람들이 나섰습니다. 그들 역시 예수를 시험하고자 나섰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선 사두개파란 누구인가?


기원전 164년, 유대 역사상 가장 잔인한 박해자였던 안티오쿠스 4세, 일명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얼마나 악독한 박해를 가했는지는 그의 시대 때 다니엘서로 대표되는 유명한 묵시문학이 등장한 것으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죽고 안티오쿠스 5세가 등장했는데 이미 유대인들은 당시 중동 일대를 다스리던 셀류코스 왕조의 왕들에게 격렬히 저항하며 치열한 독립전쟁을 치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독립전쟁의 지도자 유다 마카비는 안티오쿠스 4세가 죽던 해 12월에 마침내 성전을 탈환하고 예루살렘 성의 상당부분을 관할하게 되었으며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니 이로써 성립된 왕조를 우리는 마카비 왕조 또는 하스모니아 왕조라고 부릅니다.


유다 마카비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던 제단을 허물고, 새로운 제단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레위기에 나오는 초막절 축제기간과 똑같이(레위기 23:33-36) 팔일 간 계속하여 제단봉헌 축제를 지냈습니다. 이 축제는 축제기간 동안 계속해서 켜놓은 촛불로 인해 ‘성화(聖火)의 축제’라고도 불리고,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유대인들은 이 축제를 봉헌을 뜻하는 ‘하누카(Hanukkah)'라는 이름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아마 이명박 대통령이 제일 싫어하는 축제가 이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축제가 소위 ’촛불집회의 원조‘이기 때문입니다.


유다 마카비가 죽은 뒤, 그를 이어 동생 요나단이 등장했습니다. 그는 아주 용감하고 영리한 지도자로서 알렉산더 발라스를 도와서 그가 셀류코스 왕조의 왕이 되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발라스는 왕이 된 후 그 대가로 요나단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했을 뿐만 아니라 유다의 사령관과 왕의 지위까지 인정해 주게 되었습니다. 즉 요나단이 왕권과 대제사장직을 한꺼번에 맡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유대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예루살렘의 고위 제사장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이 요나단 주위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요나단을 내세워 자기들이 갖고 있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모여든 것이었는데 이 무리를 성경은 사두개파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하스모니아 왕조가 계속될 때에는 그 왕권을 지지했고, 후에 로마가 쳐들어와서 하스모니아 왕조를 무너뜨리고 유대 땅을 점령했을 때는 또 로마를 지지함으로써 자기들의 자리를 보존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마치 조선이 망하고 일본이 이 땅을 점령하자 친일파가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던 자들이 일본이 망하고 미군이 이 땅에 들어오자 이번에는 미국의 앞잡이가 되어 권세를 누리던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지금도 우리의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그들은 철저하게 권력을 추종하는 자들이요, 지극히 현실타협적인 기득권층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눈앞에 보이는 권력, 손으로 틀어쥘 수 있는 물질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그들은 누구와도 손잡을 수 있고,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두개인들이 종교적으로는 자기들이 그야말로 최고의 순수성을 지녔다고 큰소리치면서 오로지 모세오경만을 경전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의 구약성경 가운데 모세 오경이 아닌 책들, 즉 역사서와 예언서 그리고 문학서(지혜서)들은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의 차이점이 생겨났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 그 어디에도 부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부활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모세 오경 뿐만 아니라 역사서, 예언서, 문학서(지혜서) 모두를 경전으로 인정했기에 부활신앙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사실 부활이야기는 구약에 세 군데 나오는데 두 군데는 예언서, 하나는 묵시문학입니다.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며,

그들의 시체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무덤 속에서 잠자던 사람들이 깨어나서,

즐겁게 소리 칠 것입니다.

주님의 이슬은

생기를 불어넣는 이슬이므로,

이슬을 머금은 땅이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을

다시 내놓을 것입니다.

땅이 죽은 자들을

다시 내놓을 것입니다.“   (이사야서 26:19)


두 번째는 에스겔서 37장인데 1-14절까지에 예언자 에스겔이 본 바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유명한 환상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도 부활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묵시문학인 다니엘서 12장에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때에 너의 백성을 지키는 위대한 천사장 미가엘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나라가 생긴 뒤로 그 때까지 없던 어려운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 그 책에 기록된 너의 백성은 모두 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땅 속 티끌 가운데서 잠자는 사람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이 깨어날 것이다. 그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수치와 함께 영원히 모욕을 받을 것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하늘의 밝은 빛처럼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한 사람은 별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다.”  (다니엘서 12:1-3)


이렇게 보면 부활이야기는 분명히 모세오경에는 나오지 않고, 따라서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런 자들이 부활은 없다고 주장하면서, 부활 후의 문제를 갖고 예수를 찾아왔으니 그야말로 뻔뻔스럽기 그지없는 자들입니다. 그들도 바리새인들과 똑같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찾아왔고,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는 유대인들을 비롯한 중동지역 사람들에게 있었던 풍습인 형사취수제 다른 말로 수혼법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신명기서 25장에 그 근거가 나와 있습니다.

“형제들이 함께 살다가,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아들이 없이 죽었을 때에, 그 죽은 사람의 아내는 딴 집안의 남자와 결혼하지 못합니다. 남편의 형제 한 사람이 그 여자에게 가서,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여자가 낳은 첫 아들은 죽은 형제의 이름을 이어받게 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서 그 이름이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신명기 25:5-6)


결국 수혼법이란 자식 없이 남편과 사별한 형수나 제수와 혼인하여 후사를 세워주는 제도입니다. 이것은 물론 대를 이어주기 위한 제도이지만 동시에 가문의 재산을 유지하고, 과부가 된 여인을 보호하고 살리기 위한 제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수혼법은 유목사회를 배경으로 한 그들 특유의 제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자기들은 믿지도 않는 부활이야기를, 그것도 있지도 않은 상황과 결부시켜 예수를 시험하려 한 것입니다. 일곱 명의 남자가 한 여인을 아내로 삼았다면 이 다음 부활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자, 예수는 뭐라고 대답하셨는가?


“너희는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기 때문에, 잘못 생각하고 있다. 부활 때에는 사람들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두고 말하면서, 너희는 아직도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께서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의 하나님이시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부활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보아야 합니다. 오래 전 크게 유행했던 펄시 콜레의 ‘내가 본 천국’이라는 책에 의하면 부활한 사람들이 간다는 천국은 철저한 물질세계, 자본주의 세계였습니다. 펄시 콜레에 의하면 천국에는 엄청나게 많은 아파트가 세워져 있는데 넓은 것도 있고, 좁은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죽은 후 부활해서 넓은 아파트에 살고, 믿음이 약한 사람은 작은 아파트에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과 비슷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기들이 천국에 가 보았다고 주장하지요.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왜 잘못되었는가? 그것은 그들이 부활을 철저하게 유물론적으로,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로, 현재 삶의 연장으로 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말미암아 부활한 사람들은 질적으로 달라져서 천사들처럼 된다.”

즉 부활은 이승에서의 삶을 저승에서도 똑같이 사는, 죽었다가 회복하는 소생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으로 옮겨가는 창조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정확히 표현했습니다.


“죽은 사람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심는데,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심는데, 강한 것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적인 몸으로 심는데, 신령한 몸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적인 몸이 있으면, 신령한 몸도 있습니다. 성경에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고 기록한 바와 같이,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자연적인 것이 먼저요, 그 다음이 신령한 것입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므로 흙으로 되어 있지만,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났습니다. 흙으로 빚은 그 사람과 같이, 흙으로 되어 있는 사람들이 그러하고, 하늘에 속한 그분과 같이,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흙으로 빚은 그 사람의 형상을 우리가 입은 것과 같이, 우리는 또한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42-49)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흙으로 빚은 아담의 형상을 입고 살지만, 앞으로 언젠가 주님 안에서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입게 될 터인데 그것이 바로 부활의 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은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빌립보서3:29-30) 


그렇습니다.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신령한 몸, 영광스러운 몸으로 새롭게 창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우리가 살았으나 죽었으나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나고, 그분의 자녀다운 삶을 산다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이고, 그렇게 살다가 우리가 육신적으로 죽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변화된 몸, 신령한 몸을 허락하셔서 끝까지, 영원히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 32절의 말씀의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도 죽었고, 이삭도 죽었고, 야곱도 죽었으나 그들이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났기에 그들이 죽은 다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당신의 아들로 인정하시고 받아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아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죽었으나 산 것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죽은 다음에 우리의 몸이 어떻게 되고, 누가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가는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맡겨드리면 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살아서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서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간다면, 그래서 살아있는 사람의 하나님을 만난다면 우리는 당연히 죽어서도 하나님의 품 안에서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또 만났다고 큰소리쳐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사는 그곳이 바로 지옥이요, 그런 사람은 죽은 다음에도 역시 갈 곳이라고는 지옥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하나, 예수님 당시 귀족들이나 사두개인들은 왜 부활신앙을 믿지 않고 비웃었을까요? 이유는 오직 하나, 자기들이 사는 데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권력을 쥐고 있고, 지금 돈이 많아서 사는 것이 넉넉하고 좋은데 천국이 이보다 더 좋을 리도 없고, 굳이 갈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오늘날도 사는 것이 넉넉하고 좋은 사람들은 굳이 부활이나 천국을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지지요. 어느 부흥사가 부자들이 모이는 교회에 가서 물었다지요.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 그랬더니 교인들이 전부 다 손을 들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물었지요. “지금 당장 가고 싶은 사람?” 이번에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지금이 천국보다 좋으니 지금 당장 천국에 갈 생각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다음에 갈 천국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바로 지금 여기서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대답이 바로 오늘의 본문에 이어서 나오고 있으니 그것이 마태복음 22:34-40절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살아 있는 사람의 하나님을 믿고, 이곳에서 천국에서의 삶을 맛보고, 죽음 후에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