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06.9.17-10.4.18)/2009 년도

2009. 4. 26 / 비극적 대립 / 마태복음 21:12-17

람보 2 2015. 4. 4. 20:59

비극적 대립(2009. 4. 26)

 

본문) 마태복음 21:12-17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뜰에서 팔고 사고 하는 사람들을 다 내쫓으시고, 돈을 바꾸어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성전 뜰에서 눈 먼 사람들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이 예수께 다가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께서 하신 여러 가지 놀라운 일과, 또 성전 뜰에서 “다윗의 자손에게 호산나!”하고 외치는 아이들을 보고, 화가 나서 예수께 말하였다. “당신은 아이들이 무어라 하는지 듣고 있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주님께서는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찬양이 나오게 하셨다’ 하신 말씀을, 너희는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예수께서 그들을 남겨 두고, 성 밖으로 나가, 베다니로 가셔서, 거기에서 밤을 지내셨다.(표준새번역 개정판)

 

 

예수께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가심으로써 마침내 왕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자 스가랴의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울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스가랴서 9:9)

 

그렇게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오신 예수께서 맨 처음 행하신 일은 바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사건, 이름하여 성전정화사건입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대로 성전정화 사건은 예수께서 성전 뜰에서 팔고 사고 하는 사람들을 다 내쫓으시고,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신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그 사건을 행하시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이 사건은 네 복음서에 다 나올 만큼 유명한 사건입니다. 물론 요한복음에는 나오는 위치가 나머지 세 복음서와 전혀 다릅니다마는 어쨌든 네 복음서에 다 기록됨으로써 예수께서 행하신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이 행위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또 마태복음에 나오는 기록이 나머지 세 복음서와 차이점은 없는 것인지, 과연 이 사건 기록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 등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우선 성전 뜰에서 팔고 사고 하는 것과 돈을 바꾸어주는 일이 과연 잘못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제사를 드리러 나오는 사람들이 빈손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출애굽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한 해에 세 차례 나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 너희는 무교절을 지켜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대로, 아빕 월의 정해진 때에, 이레 동안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어야 한다. 너희가 그때에 이집트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너희는 빈손으로 내 앞에 나와서는 안 된다.“ (출애굽기 23:14-15)

 

그래서 오늘날 교회 중에서 모일 때마다 헌금을 하게 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또 그런 교회들은 헌금의 종류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아마 그런 교회들은 돈 걱정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무엇을 바쳐야 하는가? 곡식이든, 기름이든, 짐승이든 먼저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곡식을 거두거나 포도주를 빚거나 올리브기름을 짠 다음에는, 거기에서 얼마를 나에게 제물로 바쳐야 한다.

너희는 맏아들들을 나에게 바쳐야 한다. 너희 소나 양도 처음 난 것은 나에게 바쳐야 한다. 처음 난 것들은, 이레 동안은 어미와 함께 있게 하고, 여드렛날에는 나에게 바쳐야 한다.“ (출애굽기 22:29-30)

 

이러한 말씀들에 근거해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에 소나 양 또는 염소 등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러나 형편이 어려워서 그런 짐승들을 바치지 못하는 사람들은 비둘기를 바칠 수 있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사람이 위에서 말한 것들 가운데서 어느 하나에라도 잘못이 있으면, 그는 자기가 어떻게 죄를 지었는지를 고백하여야 하고, 자기가 저지른 죄에 대한 보상으로, 주에게 속건제물을 바쳐야 한다. 그는 양떼 가운데서 암컷 한 마리나, 염소 떼 가운데서, 암컷 한 마리를 골라서, 속죄제물로 바쳐야 한다. 제사장이 속죄제물을 바쳐서 그의 죄를 속하여 주면, 그는 용서받는다.

그러나 그가 양 한 마리도 바칠 형편이 못될 때에는, 자기가 저지른 죄에 대한 보상으로,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나 주에게 바치는 제물로 가져다가, 하나는 속죄제물로 바치고 다른 하나는 번제물로 바쳐야 한다.“ (레위기 5:5-7)

 

또한 모든 유대인 남성들은 반드시 은화를 신전에 바쳐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물만 바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바쳐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를 세어 인구를 조사할 때에, 그들은 각자 자기 목숨 값으로 속전을 주에게 바쳐야 한다. 그래야만 인구를 조사할 때에, 그들에게 재앙이 미치지 않을 것이다. 인구 조사를 받는 사람은 누구나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내야 한다. 한 세겔은 이십 게라이다. 이 반 세겔은 주에게 올리는 예물이다. 스무 살이 넘은 남자, 곧 인구 조사를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주에게 이 예물을 바쳐야 한다. 너희가 목숨 값으로 속전을 주에게 올리는 예물은 반 세겔이다. 부자라고 해서 이보다 더 많이 내거나,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이보다 덜 내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받아 회막 비용으로 쓸 수 있게 내주어라. 나 주는 이것을 너희 목숨 값의 속전으로 여기고, 너희 이스라엘 자손을 기억하여서 지켜 줄 것이다.” (출애굽기 30:11-14)

자, 그러니까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제물로 바칠 짐승 한 마리씩과 속전으로 바칠 은화 반 세겔을 가지고 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은 문제없지만 멀리서 오는 사람들은 제물로 바칠 짐승을 가지고 오는 것도 문제고, 더구나 흠 없는 제물을 가지고 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성전 안 이방인의 뜰에는 늘 제물로 바칠 짐승을 파는 가게가 열려 있었고, 또 유월절이 가까이 오면 적어도 3주 전부터 특별 환전대가 설치되어 축제를 지내러 온 엄청난 군중들의 돈을 바꾸어 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은 결코 불법이 아니었습니다. 불법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내려주신 율법을 지키기 위해 행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는 그것들을 다 때려 엎으셨는가?

 

문제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드는 유월절 때 제물을 팔고, 돈을 바꾸어줌으로써 얻는 이익이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불과 일주일 어간에 수십 만 명이 모여들고, 따라서 수십 만 마리의 짐승을 팔고 사고, 또 엄청난 액수의 돈을 바꾸어주는 과정에서 제사장들이 벌어들이는 이익이 엄청났다는 사실입니다. 백성들은 그야말로 너무나 가난해서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데 제사장들은 엄청난 폭리를 취하고, 그 돈으로 호화주택을 구입하고, 온갖 호사를 다 누리고 있으니 그야말로 칼만 들지 않은 강도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적 타락, 종교인들의 탐욕은 바로 종말의 징표였습니다.

 

구약에 의하면, 그리고 이후 이천 년에 걸친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종교지도자들이 돈의 맛을 알고, 돈을 벌기 위해 혈안이 되었을 때 교회는 반드시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예언자 아모스를 시켜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을 반드시 심판할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너희는 망한다.

상아 침상에 누우며

안락의자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골라잡은 어린 양 요리를 먹고,

우리에서 송아지를 골라 잡아먹는 자들.

거문고 소리에 맞추어서

헛된 노래를 흥얼대며,

다윗이나 된 것처럼

악기들을 만들어 내는 자들.

대접으로 포도주를 퍼마시며,

가장 좋은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

요셉의 집이 망하는 것은 걱정도 하지 않는 자들.

이제는 그들이

그 맨 먼저 사로잡혀서 끌려갈 것이다.

마음껏 흥청대던 잔치는 끝장나고 말 것이다.

주 하나님이 스스로를 두고 맹세하신다.

만군의 하나님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나는 야곱의 교만이 밉다.

그들이 사는 호화로운 저택이 싫다.

그들이 사는 성읍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내가 원수에게 넘겨주겠다.‘ “ (아모스서 6:4-8)

 

또한 예언자 이사야는 그러한 종교지도자들을 들짐승 또는 도적들이라고 표현합니다.

“들짐승들아,

와서 나의 백성을 잡아먹어라.

숲 속의 짐승들아,

와서 나의 백성을 삼켜라.

백성을 지키는 파수꾼이라는 것들은

눈이 멀어서 살피지도 못한다.

지도자가 되어 망을 보라고 하였더니,

벙어리 개가 되어서

야수가 와도 짖지도 못한다.

기껏 한다는 것이 꿈이나 꾸고,

늘어지게 누워서 잠자기나 좋아한다.

 

지도자라는 것들은

굶주린 개처럼 그렇게 먹고도

만족할 줄을 모른다.

백성을 지키는 지도자가 되어서도 분별력이 없다.

모두들 저 좋을 대로만 하고

저마다 제 배만 채운다.

 

그 도적들이 입은 살아서

‘오너라,

우리가 술을 가져 올 터이니,

독한 것으로 취하도록 마시자.

내일도 오늘처럼 마시자.

아니, 더 실컷 마시자‘ 하는구나.“ (이사야서 56:9-12)

이것이 이사야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사야는 그들을 향해 들짐승들이라고, 벙어리 개, 굶주린 개, 도적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단지 이사야 당시의 모습뿐입니까?

그러면서 동시에 이사야는 그런 자들이 모여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어떠한 곳이어야 하는가를 말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성전을 만민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라고 선포합니다.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 이방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여

주님의 종이 되어라.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안고,

나의 언약을 철저히 지키는 이방 사람들은,

내가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기쁨을 누리게 하겠다.

또한 그들이 내 제단 위에 바친

번제물과 희생제물들을

내가 기꺼이 받을 것이니,

나의 집은

만민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이사야서 56:6-7)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만민이 모여 기도하는 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끝에서 두 번째로 나오는 스가랴를 통해 만군의 주님의 성전 안에서 다시는 상인들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이 오면, 말방울에까지 ‘주님께 거룩하게 바친 것’이라고 새겨져 있을 것이며, 주님의 성전 안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에 있는 그릇들과 같이 거룩하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과 유다에 있는 모든 솥도 만군의 주님께 거룩하게 바친 것이 되어,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와서, 그 솥에 제물 고기를 삶을 것이다. 그 날이 오면, 만군의 주님의 성전 안에 다시는 상인들이 없을 것이다.” (스가랴서 14:20-21)

 

여러분! 보십시오.

이사야와 스가랴를 통해 이루어진 예언이 예수를 통해 마침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뜰에서 팔고 사고 하는 사람들을 다 내쫓으시고 돈을 바꾸어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신 것은 단순히 성전의 의식을 정화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상인들이 성전에 바쳐진 제물을 판매하지 않고 동전을 바꾸어주지 않는다면 성전예식은 제대로 수행될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이는 곧 성전의 종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결코 예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정리하신 사건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불충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드리는 예배가 단죄되었음을 선고하는 사건입니다. 옛날 구약시대에는 예언자들로부터 그 불충함을 고발당했고, 이제는 하나님께로부터 파견된 자에 대한 신앙을 거부함으로써 그 불충함이 극에 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께서 그들을 향해 성전에서의 예배는 끝났다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은 성전정화사건이라는 표현은 결코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사실은 성전멸망 예고사건이라고 표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여기까지는 다른 복음서에도 다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 나와 있지 않은 사건이 덧붙어 있으니 바로 14-16절의 말씀입니다. 먼저 이렇게 시작합니다.

“성전 뜰에서 눈 먼 사람들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이 예수께 다가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왜 하필이면 그렇게 많은 환자들 중에 눈 먼 사람들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는가요? 이는 바로 사무엘하 5장의 사건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다윗 왕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에 사는 여부스 사람을 치려고 하니, 그들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너는 여기에 들어올 수 없다. 눈 먼 사람이나 다리 저는 사람도 너쯤은 물리칠 수 있다.“ 그들은, 다윗이 그곳으로는 들어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다윗이 시온 산성을 점령하였으므로, 그곳의 이름을 ‘다윗 성’이라고 하였다.) 그 날, 다윗이 이렇게 명령을 내렸다.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려거든, 물을 길어 올리는 바위벽을 타고 올라가서, 저 여부스 사람들 곧 다윗이 몹시 미워하는 저 ’다리 저는 자들‘과 ’눈 먼 자들‘을 쳐죽여라!” (그래서 ’눈 먼 사람과 다리 저는 사람은 왕궁에 들어갈 수 없다‘는 속담이 생겼다.) (사무엘기하 5:6-8)

 

그렇습니다.

다윗이 여부스 사람들로부터 조롱받는 바람에 눈 먼 사람과 다리를 저는 사람은 왕궁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는데, 이것이 근거가 되어 후대에 성전이 지어지고 나서도 역시 그들은 성전 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바로 그 눈 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을 고쳐주심으로써 그들을 성전예배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셨고, 사실상 성전을 둘러싸고 있던 제도로서의 장벽을 허물어뜨리셨던 것입니다.

 

또한 성전 뜰에서 아이들이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에게 호산나!”

그러자 그것을 본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화가 나서 예수께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아이들이 무어라 하는지 듣고 있소?”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맞받아쳤습니다.

“그렇다. ‘주님께서는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찬양이 나오게 하였다’ 하신 말씀을, 너희는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여기에서 시편 8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으시면서 당신이 바로 찬양받으실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주 우리 하나님,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서

어찌 그리 위엄이 넘치는지요?

저 하늘 높이까지

주님의 위엄 가득합니다.

 

어린이와 젖먹이들까지도 그 입술로

주님의 위엄을 찬양합니다.

주님께서는

원수와 복수하는 무리를 꺾으시고,

주님께 맞서는 자들을 막아 낼

튼튼한 요새를 세우셨습니다.“ (시편 8:1-2)

 

그렇습니다.

오늘의 사건을 통해 예수는 하나님 대신 물질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마음은 늘 물질과 권력에 가 있으면서 형식적으로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이 멸망할 것을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이제는 성전에 와서 제물을 바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건물로서의 성전이 인간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 자신이 그 어떤 종교적인 건축물이나 값비싼 제물보다 더 빛난 하나님의 현존이며, 눈 먼 사람들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과 어린아이들로 나타난바 소외된 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분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오늘의 사건을 통해 인간의 모습을 입고 이 땅에 예수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같은 권위자들과의 비극적 대립이 서서히 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마태복음에 의하면 단순한 성전정화사건이 아니라 성전의 종말 예고요, 예수와 제도로서의 성전을 지키기 위한 권위자들 간의 비극적 대립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제목이 “비극적 대립”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께서는 바로 그 권위자들에 의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웅장한 건물이나 값비싼 제물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한 구원입니다. 이 믿음 가지고 끝내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