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은 비어 있었다.
요한복음 20장 1~10절/2006년 7월 23일
우선 공관복음서 가운데 맨 먼저 기록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마가복음의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마가복음 16장을 보면 빈 무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안식일이 지나니,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가서 예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래서 이레의 첫날 새벽, 해가 막 돋을 때에,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누가 우리를 위하여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내 주겠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마가복음 16장 1~3절)
안식일이 지나니,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가서 향료를 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향료를 산 날은 안식일이 지나고 그날 밤이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안식일이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 질 때까지이니까 토요일 해 떨어지기 무섭게 급한 마음에 향료를 샀겠지요.
당장이라도 그것을 가지고 가서 예수님께 발라 드리고 싶겠지만 때는 밤이고, 여자 셋이 무덤에 간다는 것은 도저히 해 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기다렸다가 이레의 첫날 새벽, 해가 막 돋을 때에, 무덤으로 갔던 것입니다. 가면서도 걱정이 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무덤을 가로막고 있는 그 큰 돌을 누가 치워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눈을 들어서 보니, 그 돌덩이는 이미 굴러져 있었고 그래서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웬 젊은 남자가 흰 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놀란 여인들에게 그 남자가 말했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습니다만, 그는 살아나셨습니다.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그를 안장했던 곳입니다. 그러니 그대들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십시오. 그는 그들보다 앞서서 갈릴리로 가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거기에서 그를 볼 것이라고 하십시오.”(마가복음 16장 6절)
그 여인들은 뛰쳐나와서, 무덤에서 도망하였다고 마가복음 기자는 증거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벌벌 떨며 넋을 읽었기 때문이고,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묻히셨던 무덤에 찾아 갔던 사람들은 세 여인이고, 그녀들이 예수의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맨 처음으로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들은 너무나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그것을 전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태복음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선 마태복음에는 다른 세 복음서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엉뚱한 이야기가 하나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로마 군인들이 예수의 무덤을 지켰다는 기사입니다.
“이튿날 곧 준비일 다음날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빌라도에게 몰려가서 말하였다.
‘각하, 세상을 미혹하던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 사흘 뒤에 자기가 살아난다고 말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흘째 되는 날까지는, 무덤을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해 주십시오. 혹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 가고 백성에게는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이번 속임수는 처음 것보다 더 나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경비병을 내 줄 터이니, 물러가서 재주껏 지키시오.’
그들은 물러가서 그 돌을 봉인하고, 경비병을 두어서 무덤을 단단히 지켰다.’’
(마태복음 27장 62~66절)
그렇습니다.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것으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빌라도에게 부탁하여 예수의 무덤을 지키게 했다는 것입니다. 무덤에다가 큰 돌을 굴려서 입구를 막았는데 그 돌을 봉인하고, 로마 군인들로 하여금 보초를 서게 하여 그 누구도 무덤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예수의 시신을 훔쳐간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마태복음 28장에 넘어가면 안식일이 지나고, 이레의 첫날 동틀 무렵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는데, 갑자기 지진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무덤에 다가와서, 그 돌을 굴려내고, 그 돌 위에 앉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여인들에게 예수가 살아나셨다고 증거 했고, 가서 제자들에게 알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여인들이 뛰어가다가 예수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마가나 마태와는 또 조금은 다른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세 사람이 무덤에 갔다가 두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들이 여인들에게 왜 살아계신 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느냐고, 그분의 말씀을 왜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깨우쳐주었고, 그래서 돌아와서 사도들에게 일어난 일을 알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여인들의 말을 믿지 않았고, 베드로만 급히 무덤에 가서 삼베만 놓인 것을 보고 이상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를 보면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사실 한 가지 외에는 다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 복음서의 공통점은 오직 하나, 예수께서 묻히셨던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밖의 내용들이 다르다고 하는 문제에는 복음서 기자들은 전혀 신경을 쓰고 있지 않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증거하고자 했던 핵심은 바로 하나,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 요한복음으로 와 보십시오. 요한복음 기자는 앞에 나오는 공관복음서 기자들보다 훨씬 더 길게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이 8절, 누가복음이 단 두 절로 소개하고 있는데 비해 요한복음 기자는 무려 열여덟 절이라는 긴 이야기를 우리에게 남겨 놓고 있습니다.
그중 앞부분인 오늘의 본문은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제자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세 사람의 제자들의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식일이 지나고 제일 먼저 무덤을 찾아간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녀는 주간의 첫날 이른 새벽에 무덤을 찾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덤을 막은 돌이 이미 옮겨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이때 마리아가 한 행동을 보십시오. 성경에는 그녀가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다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물론 예수의 시신을 누가 가져갔는지 모르겠다고 외친 것으로 보아 들여다보기는 했을 것입니다마는 복음서 기자는 그것을 정확히 밝히고 있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그녀는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주님의 시신을 도둑맞았을 거라는 걱정부터 하게 됩니다. 그래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제자들에게로 향합니다. 그것도 마음이 급해서 뛰어가지요.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로 가서 소리쳤습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상하게도 다른 제자들, 특히 열 두 제자 중의 나머지 제자들은 나오지 않고, 그들은 어디로 갔는지 전혀 밝히지 않고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 둘만 있는 것으로 요한복음 기자는 기록합니다. 그리고 숨가쁘게 뛰어온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 놀라기는 그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두 제자도 즉시 무덤을 향해 뛰어갔습니다. 둘이 함께 뛰었는데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먼저 도착했습니다. 그가 몸을 굽혀서 들여다보니 고운 베가 놓여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는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답니다. 그리고 나니까 베드로가 숨이 턱에 찬 채 도착을 했고, 그는 냉큼 무덤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고운 베가 놓여 있었고, 예수의 머리를 쌌던 수건은 그 고운 베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한 곳에 따로 개켜 있었다.”(요한 20:6-7)
라고 요한복음 기자는 증거합니다. 그리고 나서야 먼저 무덤에 도착했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그 다음에,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는 표현 바로 다음에 이상한 표현이 한 가지 나옵니다.
“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분명히 앞에서는 “보고 믿었다”고 해놓고, 바로 뒤이어서는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라고 되어 있으니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조심해서 읽어보면 제자들이 믿었다는 이야기와 예수의 부활에 관한 성경말씀을 깨닫지 못했다고 하는 상반된 이야기가 섞여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한 무언가를 “보았다”는 표현이 네 번이나 나오면서도(1, 5, 6, 8절) 동시에 ‘모르겠다’(2절) 내지는 ‘깨닫지 못했다’(9절)는 표현도 나오면서 이것도 역시 뒤섞여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눈으로 보았다는 것이 곧바로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것은 분명히 예수의 부활을 알리는 표징이었습니다마는 아직 막달라 마리아, 베드로 그리고 예수께 사랑받던 그 다른 제자 즉 예수와 가장 가까웠고,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제자들마저도 아직 그 표징을 분명히 깨닫지 못했고, 부활의 믿음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덤은 비어 있었다는 사건의 기록을 통해 복음서 기자들은 그 사건이 인간이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사건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마는 그러한 신비스러운 사건도 우리를 부활의 믿음으로 이끌어가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여러분!
요한복음 기자의 재미있는 표현을 보십시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세 사람 중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입구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사랑하던 제자는 무덤 안에 놓여져 있는 삼베 즉 염포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염포들과 수건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는 그야말로 새로운 천상적인 실존,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신령한 몸’, ‘부활의 몸’을 취했기에 몸을 둘러쌌던 ‘염포들’이나 ‘수건’을 남겨두고 무덤을 떠나갔던 것입니다.
이제 한 가지 비교할 것이 남았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소생이냐, 부활이냐 하는 것입니다. 소생은 일시적으로 살아났다가 다시 죽는 것이고, 부활은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죽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생사건은 바로 요한복음 11장에 나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외치시니, 죽었던 사람이 나왔다. 손발은 천으로 감겨 있고, 얼굴은 수건으로 싸매여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를 풀어주어서, 가게 하여라’하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1:43-44)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11장의 이 표현과 오늘의 본문을 통해 소생과 부활의 차이를 이야기하고, 예수는 부활하셨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제자들은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는 것으로 오늘의 이야기가 끝납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무덤을 떠나갔다는 사실입니다. 없어진 시신을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보고는 뭔가 의아해하며 결정을 보류하고 있는 상태라고 해석됩니다.
빈 무덤만을 보고 예수가 부활하셨다고 주장하기에는 증거가 불충분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남겨진 염포와 개켜진 수건은 무엇을 말하는가?
사라진 주님을 대체 어디로 가셨단 말인가?
알아보아야 할, 캐내야할 진실들이 너무나 많은데 제자들은 그대로 집으로 갔다는 것은 뭔가 행동을 하기에는 아직 기다림이 필요한 시기라는 것을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삼베는 남아 있었고, 수건은 개켜 있었는데 거기 계셨던 예수는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제 무언가 결정적인 것이 남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디쯤 와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어디까지 와 있습니까?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무덤은 비어 있는 것 같은데 부활하신 주님은 어디 계신지 알 수 없는 단계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비어 있는 무덤을 떠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은총 속에서 살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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