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년도

2006. 8. 6 /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 요한복음 20:19-23

람보 2 2015. 3. 31. 22:48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요한복음 20장 19~23절/2006년 8월 6일


  

  여러분!

  요한복음 기자는 오늘의 본문을 참으로 긴박한 어조로 시작합니다.

  “그 날, 곧 주간의 첫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그 날, 그러니까 주간의 첫 날이었습니다. 그 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는 두 번 씩이나 주님의 무덤에 갔었고,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18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막달라 사람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보았다는 것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전하였다”


  그렇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를 분명히 만났고, 그 분의 명령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확실하게 제자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 소식을 들은 제자들은 여전히 무서움에 사로잡혀 있었고,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문을 모두 걸어 잠그고 숨어 있는 제자들의 얼굴에는 공포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공포보다도 더 뚜렷이 드러나고 있는 것은 그 얼굴에 쓰여 있는 실망, 즉 절망적이고 최종적이며 돌이킬 수 없는 실망입니다. 그들은 당황하고 어리둥절하고 난처한 기색으로 말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도 비탄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입을 벌려 말을 할 수도 없었고, 영혼조차 마비되어 기도할 수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은 끝났습니다. 그들은 운명에 의해 짓밟혔습니다. 그래서 살아갈 아무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이 방은 사도행전 1장에 나오는 바로 그 다락방일 것입니다. 다락방이라면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문도 있을  것이고, 사방으로 창문도 나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혹시나 로마 군인들과 유대 사람들이 자기들을 붙잡으러 올까 두려워서, 방문은 물론이요 창문들까지 완전히 잠그고 두려워 떨며 침묵 속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분명히 모든 문이 다 닫혀 있는데, 그 누구도 문을 두드리지 않았고, 또 그 누구도 문을 열어 준 적이 없는데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말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이때 제자들이 얼마나 놀라고 큰 충격을 받았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그는 손과 발을 그들에게 보이셨다. 그들은 너무 기뻐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그에게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니 예수께서 받아서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누가복음 24장 37~43절)


  그렇습니다.

  여기 부활의 신비가 있습니다. 과학으로 설명 할 수 없고,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부활의 신비가 있습니다. 부활한 예수께서는 혼자서는 도저히 옮길 수 없는 커다란 돌무덤을 열고 나오듯이 굳게 닫힌 문을 통해서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몸은 두 손에 못 자국이 있고, 옆구리에 창으로 찔린 자국이 남아있기에 분명히 인간의 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완전히 닫힌 문을 통해서도 들어올 수 있는 신비의 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도 없고, 나타낼 수도 없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하늘에 속한 몸” 또는 “신령한 몸” 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나타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 번씩이나 평화가 있기를 기원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평화”

  일찍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요한복음 14장 27절)


  그렇습니다.

  세상은 평화를 준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평화가 아닙니다. 로마의 평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평화는 평화가 아니고 불안이고 공포입니다. 로마가 주는 평화는 전쟁에 의한 평화, 정복에 의한 평화입니다. 피흘림과 살인, 약탈에 의한 평화입니다. 피가 피를 부르고, 정복이 저항을 부르고, 폭력이 폭력을 부르는 평화입니다. 따라서 끊임없이 불안하고, 두려워떠는 평화입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주는 평화는 로마에 빌붙어 사는 자들이 누리는 비굴함이요, 백성들을 착취하는 평화입니다. 그것은 로마당국과 유대지도자 자신들의 평화일지는 모르나 백성들의 평화는 아니었습니다. 주의 제자들의 평화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는 세상이 주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평화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니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복음 16장 33절)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세상은 이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 때문에 환난을 당할까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주님께서는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평화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제자들에게 주신 이 평화는 그저 혼자 누리라고 주신 것입니까? 나 혼자 예수 믿어서 마음 편하게 살라고 평화를 주신 것입니까? 우리 가족이 잘되고, 건강하고, 돈 많이 벌고, 그야말로 어느 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대로 ‘영혼이 잘 되고,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바라는’ 축복이 이루어져서 누리는 평화를 주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 평화는, 주님이 주신 평화는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언하기 위해 주신 평화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이제 파견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파견 받은 분”으로 사신 것처럼 우리들도 “파견 받은 사람” 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인 우리들은 이 세상에 보내진 주님의 표징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듯이, 사람들은 우리들을 보고 예수님을 알고,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임을 알게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알릴 방법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 22절을 보십시오. 참으로 놀라운 선언이 나옵니다.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주님의 모습이 여기 그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22절)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이 너무나도 짤막한 한 구절로서 예수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증거합니다.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기 2장 7절)


  바로 여기, 창세기에 나오는 “생명의 기운”이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숨”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 곧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된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숨” 곧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으셨으니 이제 그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기운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성령을 받아 참된 제자가 된 사람들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사람들을 살리는 일입니다. 그것을 주님은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는” 것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이 바로 사람들을 살리는 일이었고, 사람의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사람을 살리는 일의 핵심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벳세다 연못가에 가셨을 때, 38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고쳐주지 못했는데 예수께서 그의 병을 고쳐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죄도 용서하셨습니다.

  “보아라, 네가 말끔히 나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그리하여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생기지 않도록 하여라.” (요한복음 5장 14절)


  또한 예수께서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온 여인을 향해 죄의 용서를 선언하시고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요한복음 8장 11절)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사람들이 하는 일, 그것은 바로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소위 성령을 체험했다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특히 보수교단에 속해 있거나 뜨거운 신앙을 가졌다는 사람들일수록 성령을 체험했다고 자랑하고 큰소리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성령을 체험했다고 자랑은 하면서도 너무나 쉽게 다른 사람들을 향해 성령체험하지 못했다고 손가락질하고, 지옥에 갈 것이라고 저주합니다. 작게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심에 사로잡혀 탐욕에 물들어있고, 크게는 교회나 국가마저도 자기의 이익을 위해 남을 짓밟고 전쟁도 일으키면서 그래도 자기들은 성령을 체험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령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요, 악령은 생명을 죽이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성령을 체험했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 중에는 사실은 악령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 교인들, 지도자들이 많이 섞여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정확히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들에게 평화와 생명을 주셨습니다.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이 세상에 평화와 생명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평화를 이루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한다면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반대로 평화를 해치고, 생명을 죽이는 일을 한다면 아무리 교회에 다닌다 하더라도 악령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평화와 생명을 전파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