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년도

2006. 7. 16 / 왕의 장례 / 요한복음 19:38-42

람보 2 2015. 3. 31. 22:05

왕의 장례


2006년 7월 16일/요한복음 19장 38~42절



  여러분!

  ‘왕의 남자’ 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그 영화를 본 사람이 무려 1,200만 명이라고 하니까 우리나라 사람 네 사람 중 한 사람이 그 영화를 본 셈입니다. 우리 아이들도 물론 그 영화를 보았고, 한동안 그 영화를 보지 않으면 친구들 사이에 대화가 되지 않을 정도였답니다.

  그 영화가 얼마나 인기가 있었던지 당연히 그 영화의 속편이 나왔다고 예람이한테 말했더니 너무나 좋아하면서 그 영화 제목이 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시치미 떼고 ‘왕의 여자’ 라고 대답했더니 진짜인 줄로 믿더군요.


  어쨌든 연산군만큼 영화나 연속극의 소재로 많이 이용된 임금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마는 뜻밖에도 연산군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는 사학을 전공한 저도 모를 만큼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왕의 남자’ 상영을 계기로 연산군의 무덤이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것이 알려져서 요즘 그곳을 찾는 사람들이 제법 많아졌다고 합니다.

  물론 그의 무덤은 ‘능’이라는 이름도 붙지 않았고 그저 ‘연산군의 묘’ 라고 불리고 있을 만큼 초라하다고 합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임금이 세상을 떠나면 그야말로 ‘국상’이 일어난 것이니까 거국적으로 장례를 치루고 무덤도 대규모로 만들어서 온갖 치장을 한 것을 우리는 소풍을 가서 많이 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연산군은 쫓겨난 임금입니다. 소위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뒤 강화도로 귀양을 갔고, 그곳에서 병으로 31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때가 1506년 이었습니다. 정확히 500년 전이군요.

  어쨌든 그의 장례식은 그야말로 초라하고 보잘 것 없이 치러졌을 것이고 무덤도 임금이 아닌 ‘군’ 에 해당되도록 만들어 졌을 것입니다.


  자, 어쨌든 그 옛날 군주 시대 때 왕은 왕에 합당하게 장례를 치렀고, 왕자는 왕자에 맞게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돈이 많다든지 권력을 쥐었다든지 하면 거기에 합당하게 장례를 치러서 그 돈과 권력을 과시하려는 욕심들을 누구나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개인이 쓸 수 있는 묘지의 넓이 등이 법으로 정해져 있는데 그것을 어기면서까지 넓게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그렇다면 이제 운명하신 예수의 장례식은 어떻게 되는가요? 아무리 십자가 위 명패에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씌어있기는 했지만 십자가에 달려 죽은 대역 죄인인데 그 장례를 온전히 치를 수 있기나 한 것인가요? 더구나 장례를 치러야 할 남자 제자들은 다 도망갔고, 그렇다고 예수께서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은 것도 아니고, 이제 십자가 밑에는 여자들 두 세 명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도대체 누가 예수의 장례를 치룰 것인가요?

  자칫 잘못했다가는 시신을 십자가에서 끌어내리기는 했지만 시신을 모실 무덤이 없어서 그냥 십자가 밑에 내버려 두어야 하는 끔찍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예수께서는 살아서도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들일 곳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고 말씀하셨는데(누가복음 9장 58절), 이제 돌아가신 후에는 ‘묻히실 곳이 없는’ 딱한 처지에 놓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십시오.

  이제 이 위급한 상황에 오늘의 본문에 보면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요. 다른 하나는 니고데모였습니다. 그 두 사람이 예수의 시신을 모셔다가, 그 시신을 향료와 함께 삼베로 감고, 동산 무덤에 안장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 두 사람이 준비 없이 되는대로 장례를 치룬 것이 아니라 아주 깨끗한 새 무덤에 시신을 모셨고, 더군다나 니고데모는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백 근쯤, 약 34kg이나 될 만큼 많은 양을 갖고 와서 그것으로 정성스럽게 장례를 치렀다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우선 공관복음서를 읽어보면 거기에도 똑같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등장하고, 그가 장례를 치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요셉은 명망있는 유대 공회의원이고(마가 15:43), 착하고 의로운 사람(누가 23:50)이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마가 15:43, 누가 23:51) 이었을 뿐만 아니라 더구나 부자(마태 27:57)였습니다.

  그렇지만 요셉이 아무리 공회의원이라 하더라도 반역자로 죽은 예수의 장례를 치룬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기에 마가복음에 의하면 아리마대 요셉은 ‘용기를 내어’(15:43) 총독 빌라도에게 시신을 내어 달라고 했고, 빌라도는 예수가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고, 부하들에게 예수가 확실히 죽었는지 확인해 본 후 시신을 내어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어쨌든 요셉은 삼베를 사 가지고 와서, 예수의 시신을 그 삼베로 싸서, 바위를 깎아서 만든 무덤에 그를 모시고, 무덤 어귀에 돌을 굴려 막아 놓았다고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증거 합니다. 이로써 예수의 장례는 무사히 끝났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장례를 혼자서 치렀는지 궁금합니다. 그것을 이해시키느라 마태복음 기자는 요셉을 가리켜 “그도 역시 예수의 제자였다”(27:57)라고 기록해 놓았지만 마가와 누가에는 그런 기록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설혹 제자라 하더라도 그가 어떻게 예수님의 장례를 치룰 수 있었겠습니까? 시신을 내리고, 옮기는 것도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그것을 혼자서 했다 하더라도 동굴 입구를 막는 거대한 돌멩이를 혼자서 옮겼다는 것은 더욱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공관복음 기자들은 그런 문제에 대한 대답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요한복음 기자에 의하면 예수의 장례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공관복음서는 세 군데 모두 다 요셉이 혼자서 예수의 시신을 삼베로 싸서 장사지냈다고 되어있지만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요셉은 무덤과 삼베를 준비했고, 니고데모는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으로 장례 준비는 되었습니다.


  요셉이 준비한 무덤이 있는 장소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동산에 있는 새 무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장소는 명당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묘를 쓸 때 풍수지리설에 따라 명당자리를 찾는데 유대에는 그런 것은 없지만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요셉이 준비한 무덤 자리는 명당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이다음에 메시아가 올 때 올리브 산에 내려와 공동묘지의 중앙 길을 통과해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간다고 믿었고, 따라서 올리브 산에 묻힌 사람들이 제일 먼저 부활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제 시신을 내렸으면 소위 “염”이라는 것을 해야 하지요. 시신을 목욕시켜 주고 새 옷을 입히는 과정을 “염”이라고 하는데 저는 전도사 시절에 그것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먼저 눈을 감겨주고 이어서 시신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로 깨끗이 닦아주고 그 다음에 향유를 바른 후에 삼베로 감았습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요셉은 향유를 바르지 않았는데 요한복음에 의하면 바로 그 일을 니고데모가 하고 있습니다.


  여기 니고데모가 가져온 몰약은 올리브기름을 섞은 향기 좋은 송진이고, 침향은 향내가 나는 나무의 일종인데 이 두 가지 향료를 가루로 만들어서 섞은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요셉과 니고데모는 가루로 된 향료를 염포들, 곧 삼베 사이에 뿌려 시신을 염한 것입니다.

  이는 시신의 냄새를 막기 위한 것으로서 죽은 자에 대한 최대의 영예와 존경을 나타냅니다. 더구나 향료의 양이 일백 리트라이나 되는 막대한 양인 것은 예수의 장례가 보통 사람의 장례가 아니라 왕의 장례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 경험으로 보면 여기 이 컵 하나 정도의 향유만 있으면 충분히 장례를 치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엄청난 향유를 준비했다는 것은 예수를 왕으로 장례 치렀다는 것으로밖에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의 선정, 동산에 자리한 무덤의 위치, 엄청나게 많은 양의 향료 등은 모두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나 마리아를 비롯한 예수의 가족들 중 그 누구도 이렇게 예수의 장례를 성대하게, 아주 철저하게 준비해서 치룰 줄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니고데모를 시켜 예수의 장례를 치루게 하셨습니다. 그것도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기는 했는데, 유대사람이 무서워서, 그것을 숨기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복음서 기자는 기록하고 있고, 니고데모는 밤에 몰래 예수를 찾아 왔었지만 전혀 자기를 드러내지 않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인물들이 뜻밖에도 등장해서 이렇게 장례를 치렀으니 이는 곧 요한복음 19장 19절에 나오는 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

라는 명패에 합당한 장례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짤막한 장례기사 하나를 통해서도 예수는 곧 “유대인의 왕”이요, “온 인류의 왕”이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으로서의 장례, 왕의 장례기록을 남겨놓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온 세상의 왕이시오, 온 우주의 왕이십니다.


  “나다니엘이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    (요한복음 1장 49절)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억지로 자기를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 가셨다.”      (요한복음 6장 15절)


  “다음날에는 명절을 지키러 온 많은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말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는 꺾어 들고, 그 분을 맞으러 나가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 왕에게 복이 있기를!‘

하고 외쳤다.”        (요한복음 12장 13절)


  “빌라도는 또한 명패도 써서, 십자가에 붙였다. 그 명패에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썼다.”       (요한복음 19장 19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만이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것도 군림하고 지배하는 왕이 아니라 한없이 낮아지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왕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만을 우리의 왕으로 믿고 따르는 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