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정들과 여자들
요한복음 19:23-27/2006. 6. 25
우리 주님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많은 말씀들 중에 우리가 그 말뜻을 이해하기 어렵고, 또 어쩌다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 말씀대로 따라 하기가 너무나 어려운 말씀이 바로 다음 구절일 것입니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을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마태 5:40)
아마도 그 말씀을 처음 들었을 유대인들은 하나같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떠들었을 것이고,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옷이란 단순히 몸에 걸치는 천 조각이 아니었습니다. 유대 사상에서 옷이란 바로 그 소유자를 나타내고, 이는 곧 옷이 그 소유자의 인격과 위상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옛날 형들에 의해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던 요셉이 온갖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바로의 꿈을 해몽해 주지요. 그리고 그 결과 바로에 의해 총리대신에 임명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그때 바로가 요셉에게 해 준 일이 몇 가지 있으니 곧 자기 손가락에 끼고 있던 옥새 반지를 빼서 요셉의 손가락에 끼우고, 금목걸이를 목에다 걸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한 가지 더 해 준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고운 모시 옷을 입히고” 라는 것이었습니다(창세기 41장).
그래서 요한복음 13장에 나오는 사건, 즉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는 사건을 설명하면서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기 전에 먼저 당신의 겉옷을 벗으셨다는 것을 통해 예수께서 당신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을 벗어 던지시고 죄인들 앞에 무릎을 꿇으셨다는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조금 아까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함께 찬송을 부르고 있는데 초등학교 3학년인 민준이가 저에게 다가와서 물었습니다.
“목사님, 왜 아직 가운을 안 입으세요?”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민준이가 걱정이 된다네요. 뭐가 걱정이 되는지 모르지만 어린 민준이가 보기에도 목사님이 가운을 입어야 예배를 인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가운은 목사를 상징하는 옷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겉옷이란 당시 사람들이 입었던 외투를 가리킵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속옷과 겉옷을 입은 다음에 허리띠를 매고 샌들을 신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입은 겉옷은 단순히 옷의 역할만을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팔레스타인 지역은 건조한 광야 내지는 사막지역인지라 대체로 일교차가 아주 심한 기후를 갖고 있습니다. 낮에는 기온이 상당히 높이 올라가서 한여름에는 섭씨 40도를 넘는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습기는 많지 않아서 그늘에 들어가면 금세 더위를 피할 수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밤이 되면 기온이 급속도로 떨어지기 때문에 두툼한 옷을 입고 모닥불을 피워도 추운 기운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재판을 받으실 때 사람들이 모닥불을 피워서 그 불을 쬐었고, 베드로도 그 불을 쬐러 갔다가 그만 혼이 난 것이지요.
기후가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겉옷인 외투가 필수품이었고, 겨울이 되면 여러 벌 겹쳐 입기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입는 겉옷은 대개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의 긴 띠처럼 생긴 옷감으로 폭이 2-3 미터 정도의 외투였습니다. 부자들은 여러 벌의 외투를 마련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거리로 삼기도 했고, 외투의 끝을 온갖 화려한 술로 장식해서 그것으로 자기들의 부를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염소 털로 거칠게 짜서 만든 싸구려 겉옷을 입었고, 이들에게 있어서 이 하나밖에 없는 겉옷은 잠잘 때 이불로 쓰였습니다. 그리고 겉에 입는 외투는 그나마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워낙 비싼 것이었기 때문에 사정이 어려운 이들은 한 벌을 가지고 가족 전체가 돌려 입기도 하고, 담보로 잡힌 채 돈을 빌리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율법에 따르면, 겉옷을 담보로 잡았을 경우 해질 때까지는 반드시 돌려주라고 했던 것입니다.
“너희가 정녕 너희 이웃에게서 겉옷을 담보로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가 덮을 것이라고는 그것밖에 없는데, 그가 무엇을 덮고 자겠느냐? 그가 나에게 부르짖으면 자애로운 나는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 (출애굽기 22:26-27)
요즘 예슬이와 예람이가 자기들 방이 작다고 불평을 합니다. 그래도 각자 자기 방이 따로따로 있는데도 그것이 작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제가 어렸을 때 일곱 식구가 단칸방에서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 방이 따로 있을 리가 없지요. 방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추운 겨울에 잘 때가 문제입니다. 큰 이불 하나를 펴 놓고 그 이불 속에서 일곱 명이 함께 자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무리 이불이 크다 하더라도 일곱이 다 덮을 만큼 넉넉할 리가 있습니까? 자다 보면 나도 모르게 추워지니까 이불을 끌어당기는 것이지요. 그러면 또 누군가가 끌어가지 말라고 하면서 도로 당겨가지요. 그럴 때 쓰던 방법, 이불 속으로 발을 넣어 누군가를 쓱 밀어내는 것이지요.
예수님 당시 겉옷은 바로 이러한 이불 노릇까지 하던 중요하고도 꼭 필요한 물건이었던 것입니다.
자, 이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나자, 병정들이 그 옷을 나누어 가졌다는 것입니다.
“병정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뒤에, 그의 옷을 가져다가 네 몫으로 나누어서, 한 사람이 한몫씩 차지하였다. 그리고 속옷은 이음새 없이 위에서 아래까지 통째로 짠 것이므로 그들은 서로 말하기를 ‘이것은 찢지 말고, 누가 차지할지 제비를 뽑자’ 하였다.”
물론 로마 제국 당시 병정들에게는 죄인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다음에 그 처형된 자들의 옷을 차지할 권리가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군인들도 당연한 권리를 행사한 것인데, 겉옷을 네 조각으로 나눈 것으로 보아 형 집행에 참여한 군인들의 수가 네 명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겉옷을 네 조각으로 나누어서 한 조각씩 가졌고, 통으로 된 속옷은 제비를 뽑아서 어느 한 사람이 가졌다는 것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당시 대제사장들의 상의가 통으로 되었다는 기록을 남겨놓았고, 초대교회 교부였던 필로는 ‘통으로 된 속옷’을 통해 ‘교회의 일치’ 내지는 ‘모든 것들을 결속하는’ 말씀의 상징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천주교회 측에서는 이 구절을 이용하여 로마제국이 무력으로 여러 민족들을 한데 묶어서 억지로 이루어진 것과 달리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은 하나의 통일된 전체이고, 그것이 오늘날의 천주교회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기자는 그 사건이 바로 예언의 성취임을 강조합니다.
“이는 ‘그들이 나의 겉옷을
서로 나누어 가지고,
나의 속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았다‘
하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병정들이 이런 일을 하였다.“
(요한 19:24)
그런데 여러분,
지금 저의 관심은 예수의 죽음이 대제사장으로서의 죽음이라든지, 교회의 하나됨이라든지, 또는 예언의 성취라든지 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지금 로마병정들이 하는 일 자체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병정들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병정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큰 죄를 짓고 있는지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무 죄 없이 십자가에 달려 온갖 고통을 다 당하시는데도 그들은 그 아픔과 고통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한 채 어떻게 하면 자기들의 물질적인 욕심을 채울까 하는 문제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단순히 로마병정들만의 이야기입니까? 로마병정들만 예수의 죽음 자체에는 관심도 없이, 그 의미나 나와의 관계에는 관심도 없이 물질적인 욕심에만 관심을 기울인 것입니까? 솔직히 말해서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는 기독교인들 중에 과연 몇 사람이나 예수께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 얼마나 많은 아픔과 고통을 겪으셨는지를 생각할까요?
그야말로 아무런 혐의도 없이 억울하게 붙잡혀 모함을 당하고, 부당한 재판을 거친 후에 매맞고, 채찍으로 얻어터지고, 머리에 가시관을 뒤집어써서 피를 흘리고, 그 무거운 십자가를 홀로 지고 걸어가야 했던 예수를 오늘날 누가 기억하고 있는가요? 죄수들 틈에 끼어 십자가에 매달려 두 손과 발목에 못이 박혀 피가 흐르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해야 했던 예수의 아픔과 고통을 과연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기억이나 하고 있는가요?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신 아픔과 고통은 이제 더 이상 기억되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다들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교인들은 이제 더 이상 십자가니, 고난이니, 죽음이니 하는 것들을 강단에서 듣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설교자들도 더 이상 그런 설교하기를 꺼려합니다. 오직 십자가는 금이나 은으로 만든 장식품이 되어 교인들의 장식품으로 옷에 걸리거나 자동차 운전자들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부적이 되었을 뿐입니다. 심지어 어느 큰 교회에서는 장로는 금 십자가, 권사는 은 십자가 등으로 해서 십자가가 계급의 상징으로 쓰여진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밑에 있던 로마 병정들처럼 예수로 인해서 내가 얼마나 물질을 챙길 수 있는지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교회가 교인들의 돈벌이 수단이 된 지는 이미 오래 되었고, 교회다니는 이유도 단순히 복 받아서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들은, 특히 한국 감리교회를 대표한다는 어느 교회 목사님은 공공연하게 복음을 ‘성공철학’으로 바꾸어버렸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니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받고, 세상에 희망을 주기는커녕 절망에 빠져들고 있는 한국교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십자가에 달려있는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밑에 있는 병정들을 바라보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뀌지 않는 한 한국교회의 장래는 어두워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물질로 판단하고, 숫자로 판단하고, 세속적인 성공으로 기준을 삼는 기독교인들, 그들은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니며, 그런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며, 그런 복음은 더 이상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성공철학을 복음이라고 설교하는 목사는 더 이상 목사라는 간판을 갖고 있을지 몰라도 더 이상 주의 종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십자가 밑에는 다행히도 로마병정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몇 사람의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의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서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기가 막히게 여자 네 사람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병정이 네 사람이었는데 우연인지 모르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곁을 지키고 있던 사람은 여자 네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곁에 ‘사랑하는 제자’ 하나가 서 있었으니 합해서 다섯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온갖 고통을 다 겪으시면서도 당신 곁에 와 있는 여인들과 제자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어머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그 다음에 그 제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자,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그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모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병정들은 오로지 물질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그 시간에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셨습니다. 사람들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새로운 관계를 맺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바로 이들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 가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물질만을 보는 사람들을 통해서는 역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사람들을 보고, 사람들의 관계를 회복시키시는 작업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물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관심,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그것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던 여자들과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제자같은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의 십자가 밑에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병정들이요, 다른 하나는 여인들과 제자였습니다. 그들 중 누가 하나님의 사람들인지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도 너무나 분명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 안에서 인간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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