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년도

2006. 6. 18 / 온 인류의 왕 / 요한복음 19:17-22

람보 2 2015. 3. 31. 20:14

온 인류의 왕


요한복음 19:17-22/2006. 6. 18



  먼저 신명기 26장에 나오는 신앙고백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이 신앙고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신앙고백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내 조상은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아람 사람으로서 몇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몸붙여 살면서, 거기에서 번성하여,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집트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강제노동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더니, 주님께서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우리가 비참하게 사는 것과 고역에 시달리는 것과 억압에 짓눌려 있는 것을 보시고,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하셔서,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내게 주신 땅의 첫 열매를 내가 여기에 가져 왔습니다.” (신명기 26:5-10)


  여러분,

  이 구절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살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추수감사예배를 드릴 때 했던 신앙고백입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네 조상들을 출애굽시켜 주셨던 역사를 회고하면서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신앙고백의 맨 앞에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내 조상은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아람사람으로서 . . . . .”


  내 조상,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민족들의 조상들이 바로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아람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떠돌아다니면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만 살펴보아도 그가 일생동안 만났던 민족들의 수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갈대아 사람(바빌론 사람), 하란 땅의 아모리 사람과 아람 사람, 팔레스타인의 가나안 사람(창세기 12:6)과 브리스 사람(창세기 13:7)과 헷 족속들(창세기 33장), 그리고 이집트인들(창세기 12:10-20),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아모리족, 후리족, 엘람족, 헷족,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온 남쪽의 다섯 왕 등이 아브라함이 만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전쟁이나 영토 분쟁, 혹은 수탈과 억압 등을 피해 떠돌아다니기도 했고, 때로는 홍수, 기근, 가뭄, 지진 등의 천재지변에 의해서 정들었던 곳을 떠나기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끊임없이 떠돌아다니던 무리들이 가장 원했던 것은 바로 한 곳에 정착하여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그 떠돌이 유랑민들에게 하나님께서 정착된 삶을 약속하셨던 이야기가 창세기에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바로 그 유명한 창세기 12장과 1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창세기 12:1-3)

  “롯이 아브람을 떠나간 뒤에,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 있는 곳에서 눈을 크게 뜨고,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을 보아라. 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아주 주겠다. 내가 너의 자손을 땅의 먼지처럼 셀 수 없이 많아지게 하겠다. 누구든지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너의 자손을 셀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땅을 너에게 주니, 너는 가서, 길이로도 걸어보고, 너비로도 걸어보아라.” (창세기 13:14-17).


  그렇습니다.

  12장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자손의 축복을 주시마 약속하신 것이고, 13장은 떠돌이 아브람에게 정착할 땅을 주시마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 두 가지를 합해보면 결국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그의 후손들에게 정착할 땅을 약속하시고, 거기에 사는 후손들이 번창할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약속의 핵심은 바로 12장 3절의 말씀입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이것을 3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는 단순히 정착할 땅을 주시고, 그의 후손이 번창하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고,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구절이 아브라함의 후손들 중에 메시아가 태어나고, 그를 통해 모든 민족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으로 해석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의 가장 깊은 의미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만을 구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그분을 통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뜻이 오늘의 본문을 통해 만천하에 드러났으니, 그것이 바로 빌라도가 써 붙인 명패를 통해서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본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직접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는 데로 가셨습니다. 히브리말로 ‘골고다’라고 하는데, 그곳은 공동묘지여서가 아니라 그 바위의 생긴 모양이 해골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제가 읽은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원어로 보면 ‘예수께서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구레네 시몬이 대신 십자가를 졌다는 이야기는 요한복음에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친히, 몸소, 홀로’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이것은 최후의 순간에 구레네 시몬이 고통을 느낄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주장하는 일부 영지주의자들의 견해를 사도 요한이 반박하기 위해서 쓴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저자 요한이 예수의 완전성, 곧 예수의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강조하는 방법이라는 견해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즉 예수는 세상을 구워하는데 있어서 그 누구의 아무런 도움도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 군인들은 예수를 포함해서 세 사람의 죄수를 끌고 와서 십자가에 달았습니다. 예수를 가운데로 하고, 다른 두 사람을 좌우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각각 죄수들의 죄목을 적은 명패를 써서, 십자가에 붙였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예수님의 명패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


  그런데 여러분!

  빌라도는 분명히 예수님이 무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십자가에 처형할 죄를 지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세 번씩이나 예수가 죄가 없다고 선포했고, 예수를 석방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협박에 굴복해서 예수를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그는 당연히 자기가 유대 지도자들의 농간에 놀아났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종교지도자들에게 복수를 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명패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아무리 큰소리쳐도 빌라도가 보기에는 기껏해야 무기력하고, 비난받고, 처참하게 죽어가는 이 자가 당신네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야유와 모욕이 바로 빌라도가 만든 명패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챈 지도자들이 그래서 명패에 쓰인 내용을 바꿔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십시오.”

  물론 빌라도는 그 요구를 거절했고, 그로써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이 로마 총독에 의해 공식적으로 선포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제 여기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다는 것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도 다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요한복음서에만 그 문장이 히브리말과 로마 말과 그리스 말로 적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요한복음 기자가 이것을 통해 밝히고자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진실로 유대인들의 왕이시면서 동시에 하나님 백성의 왕으로서 모든 민족들의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명패가 히브리 말과 로마 말과 그리스 말로 적혀 있다는 것은 그분의 왕권이 지닌 보편성, 곧 단순한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온 인류의 왕이심을 나타내는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어, 정확히 말하면 아람어는 당시 토착민들의 언어이자 가나안 땅에 살던 대중들의 언어였습니다. 로마 말 즉 라틴어는 지배자의 언어이자 행정과 공무에 쓰이는 언어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 말 즉 희랍어는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는 모든 민족이 공통으로 쓰는 세계 공용어이자 상거래를 할 때 쓰는 언어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토착민들과 대중들의 왕이요, 지배자들과 행정가들의 왕이요, 모든 민족과 일상생활에서의 왕이었던 것입니다.

  동시에 히브리어는 종교에 쓰이는 성스러운 언어요, 로마 말은 정치에 쓰이는 언어요, 그리스 말은 문화세계의 언어였으니 예수는 곧 종교와 정치 그리고 문화 즉 인류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왕이시라는 선포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시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조롱하고 비웃기 위해서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는 명패를 붙였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가 유대인의 왕일 뿐 아니라 온 인류의 왕이심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일찍이 구원은 유대 사람에게서 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4:22). 이제 ‘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이 된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 예수는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유대인의 왕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로마 총독을 통해 이제 유대인만이 아니라 온 인류의 왕이심이 만천하에 선포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선택하셨고, 그의 후손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바로 나사렛 예수께서 그 약속의 성취자로 이 땅에 오셨고, 마침내 유대인의 왕만이 아닌 온 인류의 왕으로 등극하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던 것입니다.

  이제 로마의 황제가 참다운 황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다운 온 인류의 왕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이 믿음 가지고 언제나 당당하게 용기를 내어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