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길이다
요한복음 14:5-14 / 2006년 2월 19일
제가 사는 과천은 인구가 불과 7만 명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도시입니다. 인구 7만이라면 서울에 있는 웬만한 동 하나, 예를 들어서 우리 교회가 있는 사당동보다도 훨씬 적은 숫자의 인구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나마 요즈음은 2개 단지의 아파트 재건축 공사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살던 주민들이 이사를 가서 많이 줄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작은 도시에 이상하게도 제법 큰 교회들이 여러 개 있습니다.
하나는 과천장로교회인데 교인 수가 1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 교회의 버스가 과천 시내는 물론이요, 안양, 의왕 등 꽤 넓은 지역을 운행하면서 교인들을 실어 나르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왕성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아직 건물을 짓지는 못한 것 같은데 시내에 가면 어느 건물에 왕성교회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만 보면 큰 교회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서울에 왕성교회라는 이름의 아주 큰 교회가 있고, 과천에 있는 왕성교회는 일종의 지교회라고 생각하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서울에 있는 왕성교회를 제가 가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왕성교회가 과천으로 크게 건물을 짓고 이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과천 시내에서 인덕원으로 가다보면 아직 녹지로 남아있는 지역이 있는데, 앞으로 그곳이 크게 개발된다는 것입니다. 즉 거기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터인데 그러면 거기에 종교부지가 생겨날 것이고, 왕성교회가 그것을 생각해서 이미 넓은 땅을 사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서울에 있는 왕성교회가 아예 과천으로 이사를 온다는 것이지요.
솔직히 말해서 교회가 넓은 땅을 사 놓고 건물을 크게 지으면 앞으로 유지할 수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마는 교회들마다 그런 짓들을 하고 있지요.
물론 그 두 교회는 소위 정통교단에 속한 교회들이니까 특별히 문제를 삼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문제는 과천에 그 두 교회 말고도 다른 큰 교회들, 그러니까 이단으로 배척받는 교회로서 아주 큰 교회가 두 개나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는 그 유명한 장막성전입니다. 벌써 오래된 이야기입니다마는 유재열이라는 고등학생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는데, 양재동에 가면 일곱 명의 장로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그들을 데리고 과천 청계산 밑으로 가서 장막성전을 지으라고 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유재열이 장로들을 만나 그들을 이끌고 과천 청계산 밑으로 들어가서 교회를 세우고 장막성전이라고 이름 붙이게 되지요.
바로 그 유재열이 스스로를 어린양이라 부르고 결국은 자기가 하나님이라고까지 하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예언도 하고, 기적도 행하고, 병자를 치유하기도 하면서 그는 사람을 모으고, 돈도 모아서 굉장히 넓은 땅 위에 큰 건물을 지었습니다. 지금 그 이름이 바뀌기는 했지만 문원동 안쪽에 여전히 버티고 서 있고, 그 주위에는 장막성전에 나가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문원동 일대에서는 장막성전 측의 지원을 받지 못하면 도의원이나 시의원을 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유재열에게서 능력이 떠났답니다. 그래서 기적도 행할 수 없고, 치유의 은사도 행할 수 없게 되자 유재열은 미국으로 가 버렸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웬 남자가 하나 나타나서 자기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온 메시아라고 주장하면서 장막성전으로부터이 독립을 선언하고 교회를 세웠으니 이름하여 신천지교회입니다. 지금 과천 시내에 신천지교회 본부가 있고 전국적으로 그리고 미국에까지 지교회가 있는데 꽤 많은 교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천지교회 교인들에게는 과천이 성지이고 그래서 그들은 과천에 와서 자기네 교주 곧 자기네 하나님 곁에서 사는 것이 평생소원이랍니다. 그래서 미국에 가서 살다가도 과천에 있는 신천지교회를 나가기 위해 역이민을 해서 과천으로 이사 오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교주가 곧 하나님이시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고, 따라서 자기네 교주 얼굴을 보는 것이 곧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라고 믿는답니다.
그렇습니다.
과천에는 하나님이 한 분 살아 있다가 미국으로 갔고, 현재 또 하나의 하나님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혹 하나님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은 분이 있다면 제가 사는 과천으로 이사오면 됩니다. 물론 저도 아직까지 그 하나님의 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자, 지난 주에 살펴본 주님의 말씀을 되돌아보십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너희에게 말했겠느냐?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그러자 대뜸 도마가 나섰습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어디로 가시는지를 알아야, 주님이 말씀하시는 ‘내 아버지의 집’이 도대체 어디인지를 알아야 그곳으로 가는 길을 알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여러분!
여기 이 짤막한 대화에서 도마의 말과 예수님의 말씀 사이에 존재하는 질적 차이, 차원의 차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있을 곳을 예비하러 간다고 하니까 도마는 대뜸 그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길은 물리적인 길, 눈에 보이는 길, 우리가 걸어가고 차를 타고 가는 길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다다르는 수단으로, 아버지와의 만남을 위한 방법으로서 영적인 의미로 사용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슬이나 예람이가 교회에 있는 아빠를 만나러 오려면 버스를 타고 와야 합니다. 그 아이들은 당연히 아빠가 어디 있는지 알고, 따라서 몇 번 버스를 타고 어디에서 내려서 오면 되는지를 압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교회로 아빠를 찾아와서 만난다 하더라도 그 아이들이 아빠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아빠가 자기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살아간다면 그래서 아빠의 마음과 그들의 마음이 멀어져 있다면 그들은 결코 아빠에게 오는 길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 구절을 몇 번이고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본문 안에는 두 가지 핵심요소가 있으니 하나는 “하나님 아버지께 다다르는 길”이요, 또 하나는 “아버지께로 가는 자체”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개를 나란히 쓴 것은 “길”이란 하나님을 향한 움직임을 전제로 하며, 아버지께 가기 위한 인간의 의무 곧 하나님께 닿기 위한 방법, 그분과 자녀로서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가리키는 상징으로서 “길”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를 계시하기 때문에 “길”이신 분이시오, 당신이 아버지와 인격적이고 개인적으로 만나기 위한 중개자이시기에 “나는 길이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서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은 “길”의 의미를 더욱 명료하게 설명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생명”으로 이끄는 “진리”를 계시하고, 그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실현하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기도 가운데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3)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중개자이시오, 계시자이시며 동시에 구원자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온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유일한 존재이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완전한 방법으로 드러내고 세상에 구원을 알리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그분을 이미 보았다.” (7절)
그렇습니다.
‘길’의 목적지는 ‘아버지’이신데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오직 한 길이니 그 ‘길’이 바로 예수 자신이시라는 말입니다. 오로지 예수 안에서 ‘아버지’를 알 수 있고, 또한 구원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 당신이 곧 하나님이시오, 따라서 예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자 빌립이 말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옛날이나 지금이나, 즉 초대교회 때나 지금이나 직접적인 하나님 체험을 갈망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때는 유대주의적 신비가들이나 그리스도교적 영지주의자들이 직접 하나님을 보았다고도 하고, 또 직접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겠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유혹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자칭 그리스도니, 자칭 감람나무니 하면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하기도 하고, 자기가 직접 하나님을 만나서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유혹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습니다.
그런 예수께서 분명히 대답하셨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예수가 곧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직접 눈으로 보려 하거나 특별한 환시적인 신 체험을 가지려고 추구하지 말고, 오직 예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그것은 바로 예수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예수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그것은 바로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이 성경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유혹하거나 자기가 바로 하나님이고 자기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해준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모두가 다 분명히 가짜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를 읽어야 하고, 연구해야 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예수를 만나야 하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버지께 이르는 길은 예수 자신이십니다. 여러 가지 잡다한 법규들이나 율법조항들의 모음도 아니고 준수해야 하는 여러 가지 계명들도 아니고 오직 사람이신 예수께서 바로 그 길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이르는 ‘길’이십니다.
우리는 줄줄이 나열된 진리조항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리’이신 사람을 통해서 목표에 도달할 것입니다. 우리 개인이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뿐만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가 나아갈 길도 오직 예수이시오, 교회의 진리도 오직 예수이십니다. 더구나 교회는 아득하게 멀리 있는 생명을 얻으려고 열망하며 이곳 지상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도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와 함께 하시는 그분이 바로 ‘생명’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길’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진리’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생명’이십니다.
이 믿음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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