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년도

2006. 2. 5 / 새로운 표징 / 요한복음 13:31-35

람보 2 2015. 3. 31. 18:17

새로운 표징


요한복음 13:31-35 / 2006. 2. 5



  오늘의 본문은 다섯 절 밖에 되지 않는 짧은 내용이지만 사실 이 안에 우리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 두 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31-32절에 나오는 영광에 대한 것입니다.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 하나님께서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면, 하나님께서도 몸소 인자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렇게 하실 것이다.’ ”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아먹기로 작정하고 나간 뒤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


  여러분!

  영광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언가 대단히 기쁘고 보람찬 일을 하게 되었을 때, 그래서 이름이 알려지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는 것이 영광을 받는 것이지 않습니까?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이 4강에 올라간 것이 우리나라에는 영광이 되었고, 선수들 자신에게도 크나큰 영광을 돌려주지 않았습니까?

  예를 들어서 제가 예배를 집례할 때 이러한 가운을 입고 집례를 합니다. 이제는 이런 가운을 벗어버리고 그냥 양복만 입고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간혹 목사님들 중에는 박사학위 가운을 입고 강단에 서는 분들이 있습니다. 대부분 목회학박사 학위가운이지요. 가운 소매에 화려한 색깔도 들어가고, 후드도 대단한 치장을 해서 한눈에 금방 대단히 비싸다는 것이 드러나지요. 그걸 걸친 목사님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근엄하고 거룩하게 행동하느라고 애를 쓰는 모습이 참으로 딱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러면 교인들은 자기네 목사님이 박사라고, 참으로 대단하다고 좋아하지요. 아마도 박사 가운을 입고 설교를 하면 더 은혜가 넘치는가 봅니다. 그러면 그 목사님은 영광을 누리는 것이지요.


  그렇습니까?

  오늘의 본문에서 말하는 영광이 바로 그런 영광을 말하는 것입니까?


  여러분!

  주님과 동료 제자들을 떠나간 가룟 유다가 다시 나타나는 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18장에서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뒤에,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셨다. 거기에는 동산이 하나 있었는데, 예수와 그 제자들이 거기에 들어가셨다. 예수가 그 제자들과 함께 거기서 여러 번 모이셨으므로, 예수를 넘겨줄 유다도 그곳을 알고 있었다. 유다는 로마 군대 병정들과, 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을 데리고 그리로 갔다. 그들은 등불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있었다.” (18:1-3)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스스로 영광을 받았다고 말씀하신 사건은 철저하게 당신의 죽으심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증거를 성서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2:20 이하에 보면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 중에 그리스 사람 몇이 있었는데, 그들이 빌립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청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빌립이 먼저 안드레에게 이 말을 전했고, 빌립과 안드레가 함께 가서 그 말을 예수께 전하자 예수께서 대뜸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나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죽을 것을 알고 계셨고, 그것을 통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고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27절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니까 이것을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할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곧바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때에 왔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시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그래서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낸ㄴ 것은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일, 바로 그것으로 되는 일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곧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는 일인데 그것은 오직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으로 증거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기자는 이방인인 백부장의 입을 통해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를 마주보고 서 있는 백부장이, 예수께서 이와 같이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서 말하였다.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 (마가복음 15:39)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예수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신 것은 오직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 이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 곳곳에서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목사님들이 추구하는 영광이나 교인들이 추구하는 영광이 과연 무엇입니까? 교회성장이나 대형교회 건축, 어마어마한 숫자, 받는 월급의 많음 등이 그들이 추구하는 영광이 아닙니까? 그것이 과연 예수께서 얻고자 하셨던 영광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자, 이제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두 번째 진리를 찾을 때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새로운 계명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당신과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던 제자들에게서 막 떠나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장차 스승이신 예수님을 따라가게 될 것이지만 예수께 다다르기까지 살아야 할 삶의 방식이 있고, 바로 그것에 대한 가르침이 오늘의 본문인 것입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여러분!

  이 구절은 레위기 19장에 나오는 말씀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너는 동족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이웃이 잘못을 하면, 너는 반드시 그를 타일러야 한다. 그래야만 너는 그 잘못 때문에 질 책임을 벗을 수 있다. 한 백성끼리 앙심을 품거나 원수 갚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다만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레위기 19:17-18)


  그렇습니다. 분명히 구약의 율법에도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살아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여러분!

  이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 분명히 구약에서도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라고 가르쳐 주셨고, 예수께서도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왜 예수께서는 굳이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핵심은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요한복음 13:14-17에 나오는 것처럼 사랑이 가득한 봉사와 십자가 사건으로 보여주신 죽음으로의 헌신을 통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철저하게 낮추시되 제자들 앞에 무릎 꿇고 발을 씻겨 주실 정도로 철저한 봉사를 통해서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것도 당신을 배반할 것을 뻔히 아는 제자의 발 앞에서까지 무릎을 꿇으시고 그 발을 씻겨 주실 정로로 말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렇게 사랑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사랑을 해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그 사랑의 행위가 제자들이 예수가 누구이심을 나타내는 새로운 표징이 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잘 기억하십시오. 예수께서 지금까지 일곱 가지 표징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표징들로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증거하셨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심으로써 당신이 생명의 물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고 중풍병자를 고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당신이 생명의 빵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물 위를 걸으심으로써 자연의 주인되심을 증거하셨습니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심으로써 생명의 빛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소생시키심으로써 당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가시면 누가 예수를 증거할 것인가? 바로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해야 합니다. 즉 제자들이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나타내는 표징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표징이 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그렇다면 예수의 표징이 되는 사랑을 나타내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요한기자가 그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머물겠습니까? 자녀 된 이 여러분, 우리는 말이나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 (요한1서 3:16-18)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말이나 혀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갖고 있는 돈과 재물을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아무리 형제자매를 사랑한다고 말을 하더라도 어려움 당하는 사람을 돕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수 백 억 원 씩이나 되는 돈을 들여 교회를 짓는다면, 그래서 그 돈을 모으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또 그 건물을 채우기 위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느라 주위의 작은 교회들로부터 교인들을 빼내 간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만 커지고, 우리 교회만 성장하기 위해 어려운 이웃 교회들을 돌아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찬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말이나 혀가 아니라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만이,

  내가 가진 재물로 이웃을 도우며 사는 사랑의 행위만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증거하는 표징이 되는 방법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새로운 표징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단 한 번 사는 삶을 통해 새로운 표징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