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년도

2006. 2. 12 / 내 아버지의 집 / 요한복음 13:36-14:4

람보 2 2015. 3. 31. 18:19

내 아버지의 집


요한복음 13장 36절 - 14장 4절 / 2006년 2월 12일



  자, 재미있는 이야기 하겠습니다.

  여러분, 며칠 전에 제가 집에서 예슬이하고 예람이에게 물었습니다.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영화 ‘왕의 남자’의 속편이 나왔는데 뭔지 아니? 그랬더니 두 아이가 놀래서 그게 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왕의 여자”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다시 말했습니다. 제 3편도 나왔다던데. 그게 뭐냐고 다시 묻길래 그랬죠. “여왕의 남자” 두 아이는 그제서야 웃기는 이야기인 줄 알고 웃더군요. 여러분, 재미있지요?


  여러분,

  혹 예고편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영화에서 주로 사용되는 말이지요. 영화 전체를 상영하기 전에 미리 그 영화를 선전하기 위해서 맛보기로 보여주는 것을 예고편이라고 말합니다. TV에서 보는 연속극들 중에서도 예고편을 보여주는 것들이 있지요. 요즘 제가 즐겨보는 신돈이라는 제목의 사극도 맨 나중에 나오는 다음 주 예고편까지 보아야 다 보았다고 생각하게 되지요.


  물론 영화의 예고편이나 연속극의 예고편들은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다음에 자기네 영화나 연속극을 꼭 보게 만들기 위해서 흥미진진한 내용으로 만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예고편을 보면 앞으로 그 영화나 연속극의 내용이 어떻게 전개될 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한복음 13장 21-38절에는 예수께서 행하신 세 가지의 예고편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앞으로 일어날 사건 세 가지를 미리 예고하는 내용들이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우선 13장 21-30절에는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할 것이라고 하는 배신예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마음이 괴로우셔서, 환히 드러내어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물론 제자들은 놀랐을 것이고,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할지 몰라서 서로 쳐다보며 수군거렸을 것입니다. 그때 시몬 베드로가 예수의 품에 기대어 있는 제자에게 고갯짓을 했고, 그래서 그 제자가 예수께 물었습니다.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이 빵조각을 적셔서 주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리고 그 빵조각을 적셔서 시몬 가룟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그가 빵조각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31-35절에는 예수께서 이제 제자들을 떠나가신다는 이별예고가 나와 있습니다.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 . . . . .  어린 자녀들아, 아직 잠시 동안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유대 사람들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고 말한 것과 같이, 이제 나는 너희에게도 말하여 둔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7장 33절에서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잠시 동안 너희와 함께 있다가, 나를 보내신 분께로 간다. 그러면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내가 있는 곳에 너희가 올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이제 당신이 제자들을 떠나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 이렇게 되자 그 누구보다 마음이 급했던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께 물었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나중에는 따라올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는 당연히 주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주님, 왜 지금은 내가 따라갈 수가 없습니까? 나는 주님을 위하여서는 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물론 베드로는 진심으로 말했을 것입니다. 3년 동안이나 따라다닌 주님을 위해서라면, 자기들을 그렇게도 사랑해 주신 주님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느냐 하는 생각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 목숨이라도 바치겠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께서 참으로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참으로 충격적인 말씀을 던지셨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이라도 바치겠다고? 아니다. 너는 닭이 울기 전에, 즉 이 밤이 지나고 새벽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 씩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즉 나를 세 번씩이나 배반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같은 내용을 소개한 마가복음에는 이런 말이 덧붙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오늘 밤에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힘주어서 말하였다.

  ‘내가 선생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절대로 선생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나머지 모두도 그렇게 말하였다.“   (마가복음 14:30-31)


  자, 여러분! 이렇게 세 편의 예고편이 연속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의 배신 예고

     예수님의 이별 예고

     베드로의 부인 예고


  그렇습니다.

  회계를 맡을 만큼 예수의 신임을 얻었던 유다가 스승을 배신한다고 하고,

  모두 다 수제자라고 인정하던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하고,

  거기다가 스승이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곁을 떠나 이제 이별을 하신다고 하고,

  그야말로 이제 남아있는 제자들은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마가복음에는 베드로가 절대로 선생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절대로 모른다고 하지 않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하고, 나머지 제자들도 그렇게 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제자들의 마음이 지금 얼마나 연약해져 있고, 근심으로 가득 차 있고, 얼마나 큰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을지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공동체가 깨질지 모른다고 하는 총체적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칫 잘못하다가는 제자들이 믿음까지 저버릴 위험에 처해있음도 예수께서는 아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오늘의 본문은 등장합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제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너희에게 말했겠느냐?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예비하러 간다.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그렇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아버지의 집”이라니요? 어딘가에 너희가 있을 곳을 예비하러 간다니요? 내가 가서 있을 곳을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 간다니요? 도대체 그 아버지의 집이 어디 있습니까? 그야말로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우주 저 끝 어딘가에 분당이나 판교 같은 초대형 아파트 단지를 만들러 갔다가 공사가 끝나면 데리러 온다는 말인가요? 그런데 다시 오시마고 약속하신 예수께서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오시지 않았으니 아직도 공사가 끝나지 않아서 못 오고 계신건가요?

  천국을 보고 왔다는 사람들은 말하지요. 천국에 가면 다이아몬드로 지은 집도 있고, 금으로 만든 집도 있고, 은을 만든 집도 있고, 나무로 만든 집도 있고, 짚으로 지은 집도 있다고요. 그래서 신앙생활을 잘 한 등급에 따라서 그곳에서 사는 집이 다르다고요. 성경에서 말하는 집이 바로 그런 집을 말합니까? 그렇다면 그 집은 우주 어느 곳에 있는 건가요?


  여러분!

  “내 아버지의 집”이란 바로 공간의 제한을 받는 어떤 장소, 어떤 특정한 장소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곳”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지으셨고, 그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따라서 어떤 장소에 제한되어 있는 분이 아님을 우리가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계신 곳은 어디나 “내 아버지의 집‘인 것입니다. 즉 ”내 아버지의 집“은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차원의 문제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집”, “내 아버지의 집”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택하신 백성들과 긴밀하고 변치 않는 일치 안에서 사시는 복된 장소 혹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것을 나타내기에 가장 적당한 장소가 바로 성전이었고,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유대 사람의 유월절이 가까워져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그는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상을 둘러 엎으셨다.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을 걷어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 하고 기록한 성경 말씀을 기억하였다. ”     (요한복음 2:13-17)

 

  그렇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 현존의 장소였기에 아버지 집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집의 주인은 바로 아들되시는 예수입니다.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일이 없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사람은 다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물러 있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다.’ “  (요한복음 8:31-36)


  그렇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은 단순한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있는 곳, 하나님을 진정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그 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갈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를 모시고 있는 곳은 그 어디나 하나님의 나라인 것을 믿습니다.

  1.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후렴)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2. 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나라

    내 맘 속에 이뤄지니    날로 날로 가깝도다.

  3.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송가 495장)

  여러분!

  너무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죽어서 가는 천당만을 생각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그것을 말해주는 본문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러나 찬송가 495장을 부를 때마다 고백하는 대로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간다면 바로 여기가 하나님의 나라요, 내 아버지의 집인 것입니다.

  바로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그야말로 여기서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면서 내가 교회에 나가니까 죽어서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이 갈 하나님의 나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는 삶이 지옥같다면 결국 가는 곳은 지옥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지옥은 하나님과 관계없이 사는 사람들의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이 믿음 가지고 언제 어디서나 내 아버지의 집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