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년도

2006. 3. 5 / 주님이 주는 평화 / 요한복음 14:25-31

람보 2 2015. 3. 31. 18:30

주님이 주는 평화


요한복음 14:25-31/2006년 3월 5일



  여러분!

  ‘신돈’이라는 제목의 연속극을 보고 계십니까? 혹 보고 계신다면 그 연속극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지 궁금하시겠지요?

  지난주까지 전개된 연속극 스토리를 보면 공민왕의 1차 개혁이 실패로 돌아간 후 신돈은 절에 들어가서 3년 수행을 하고 있지요. 그 와중에 홍건적이 쳐들어와서 고려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왕은 복주,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으로 피난을 가 있는 상황입니다. 정세운이라는 장군이 중심이 되어 개경을 점령하고 있던 홍건적을 몰아내지만 김 용과 같은 간신배들의 모함에 의해 암살당하는 것으로 지난 시간이 끝이 났습니다.

  어제 밤에 식구들과 함께 그 연속극을 보고 있는데 예슬이가 눈물을 흘리더군요.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하는 말, “왜 정세운같은 충신은 억울하게 죽고, 김용같은 나쁜 놈들은 잘 되느냐? 만나면 아주 혼을 내주고 싶다.”

  이제 개경으로 돌아간 왕은 신돈을 다시 불러들여 제 2차 개혁을 단행합니다. 전민변정도감을 다시 설치하여 노예를 풀어주고, 권문세가들이 강제로 빼앗은 농토를 돌려주지요. 그러나 결국 신돈의 실정을 핑계로 귀양을 보낸 후 사약을 내려 죽임으로써 공민왕의 개혁은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공민왕은 신돈을 죽인 다음 해에 우여곡절 끝에 환관인 최만생 등에게 암살당하고 마는데 이때가 1,372년입니다. 이후 고려는 세 사람의 왕이 더 등장하기는 하지만 급격히 그 힘을 잃고 맙니다. 그리고 공민왕의 개혁정치로 인해 새롭게 등장하던 신진사대부들이 이성계를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나라를 세웠으니 그것이 바로 조선입니다. 이때가 1,392년이니 공민왕이 세상을 떠난 후 불과 20년 만에 나라가 망한 셈입니다.


  여러분!

  고려 말 개혁을 단행했던 공민왕과 비슷한 역할을 감당했던 왕이 바로 유대의 요시야 왕입니다. 기원전 641년에 즉위해서 609년에 사망한 요시야 왕이 바로 유대 왕국의 마지막 개혁을 시도했던 왕이라는 말입니다. 요시야 왕은 성전 수리 중에 발견한 성서를 통해 우상을 몰아내고 성전을 깨끗케 하며, 하나님 신앙을 회복했습니다. 그래서 열왕기하 23:25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을 다 기울이고 생명을 다하고 힘을 다 기울여 모세의 율법을 지키며 주님께로 돌이킨 왕은, 이전에도 없었고 그 뒤로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요시야 왕이 그만 이집트와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난 후, 이스라엘 왕국은 급속히 무너졌습니다.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었으나 이집트에 의해 끌려가고 여호야김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3년 간 왕위에 있었으나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피살당하고 맙니다. 그 뒤를 이어 이번에는 여호야긴이 왕이 되었으나 느부갓네살 왕은 여호야긴이 왕이 된 지 석 달 만에 그를 바빌론으로 끌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때가 바로 기원전 597년입니다. 그러니까 요시야 왕이 죽고 나서 불과 12년 만에 세 명의 왕이 교체된 셈이지요. 그리고 그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갔는지가 열왕기하 2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그는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과, 관리와 용사 만 명뿐만 아니라. 모든 기술자와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갔다. 그래서 그 땅에는 아주 가난한 사람들 말고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24:14)


  여러분!

  바로 이때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중에 제사장이 한 사람 있었으니 그가 바로 에스겔입니다. 그는 제사장 출신이었던 만큼 성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었고, 또 제사장의 입장에서 유대 왕국의 멸망 이유와 포로생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깊이있게 물었습니다.

  그는 포로생활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첫 번째 예언자였는데 처음에는 바빌론의 침략과 유대 백성의 고난이 유대 민족의 죄에 대한 책망과 임박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다 그는 기원전 587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고, 유다 왕국이 결국 철저하게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새로운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에스겔서 34장부터 나오는 희망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죄에 대한 징벌과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던 에스겔은 이제 유대 백성이 완전히 멸망당하고 나자 희망과 구원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재건될 새 성전, 새 예루살렘 그리고 새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청사진을 보여줌으로써 포로민으로 고난받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는 예언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희망의 메시지의 절정이 바로 에스겔서 37장에 나오는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환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마른 뼈 환상을 보여주시고 나서 그 끝에 에스겔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종 다윗이 그들을 다스리는 왕이 되어, 그들 모두를 거느리는 한 목자가 될 것이다. 그들은 내 규례를 지키며 살고, 내 율례를 지켜 실천할 것이다. 그때에는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들의 조상이 살던 땅에서 그들이 살게 될 것이다. 그 땅에서 그들과, 그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에서 살 것이며,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영원한 왕이 될 것이다. 내가 그들과 평화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다. 내가 그들을 튼튼히 세우며,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들 한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어지게 하겠다. 내가 살 집이 그들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에스겔서 37:24-27)


  그렇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메시아 예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택한 백성들에게 메시아를 보내셔서 그들의 영원한 왕이 되게 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평화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렇습니다.

  히브리어로 그 유명한 Shalom 곧 평화는 개인적인 평안함도 있지만 그 핵심은 바로 공동체에 주는 평화입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바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이 깔려 있습니다. 즉 선택된 백성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하나님은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 주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들에게 주신 축복 그것이 바로 샬롬, 평화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주신 평화의 언약이 이제 이루어졌으니 그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나는 이 말을 너희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25-27절)


  그렇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가십니다. 그러니 육신의 몸으로는 더 이상 제자들 곁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입니다. 바로 그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예수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자, 보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마 약속하신 것이 바로 평화입니다. 희랍어로 에이레네(είρηνη)라 말하는 평화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주시마 약속하신 선물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셨을 때 들판에서 양 떼를 지키고 있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많은 하늘 군대가 나타나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외쳤습니다.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누가복음 2:14)


  또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셔서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느 마을, 어느 집으로 가던지 먼저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하게 하셨습니다.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누가복음 10:5-6)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외쳤습니다.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  (누가복음 19:38)

              

  또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어라.” (누가복음 24:36)


  자, 그렇다면 이제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어떤 것입니까?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결코 세상적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거나, 고난을 당하지 않기 때문에 누리는 평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어진 현실은 세상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오늘의 본문 30절에 나오는 대로 이 세상의 통치자들은 가까이 다가오고 있고, 그래서 신앙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만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내게 분부하신 그대로 내가 행한다는 것” 때문에 누리는 평화가 바로 주님이 약속하신 평화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사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가르치심대로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

  그렇기에 하나님 아버지와 주님께서 그리고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평화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평화는 개인적인 마음의 평안함만이 아니라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누리는 사랑의 관계로 나타나는 평화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오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고 자랑을 합니다.” (로마서 5:1-2)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예수 안에서 누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결합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누리는 기쁨입니다. 예수 안에서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알고 희망을 가지는 것이 바로 평화라는 말입니다.

  비록 제자들이 온갖 고난을 다 겪고 갖가지 어려움을 겪었지만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었기에 끝내 승리했던 것처럼 우리도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렵지만, 지금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줄 믿기에 누리는 기쁨과 희망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평화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앞에서 예슬이가 던졌던 질문은 사실은 대단히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던질 수 밖에 없는 질문인 것이지요. 왜 악인이 잘 되고, 의인은 어려움을 당하는가? 왜 세상에서는 악과 선이 뒤집힌 것으로 보이는가? 이는 신학적으로는 곧 신정론의 문제인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신앙생활하는 우리들이 끊임없이 던질 수밖에 없는 질문이지요. 왜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형통하는가? 그래서 세상에서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평화를 누리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적인 평화, 세상이 주는 평화를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조건에서 오는 평화를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께서 주시마고 약속하신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지만 그래도 성령 곧 보혜사를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가 그분과 하나되는 삶을 살 수 있으니, 그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평화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 공동체가 주님 안에서 누리는 영원힌 생명과 희망, 그것이 바로 평화입니다.

  이 평화를 누리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해 헌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