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 년도

1995. 9. 10 / 제일 좋은 길 / 고린도전서 12:27-13:8

람보 2 2015. 3. 20. 16:06

제일 좋은 길(1995. 9. 10 ) 1-1

 

제일 좋은 길

고린도전서 12:27-13:8 / 1995. 9. 10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기준으로 살아가게 되어있습니다. 누군가를 판단할 때도 자기가 기준이 되고 무엇을 선택할 때도 자기의 것이 기준이 됩니다. 나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한 것, 배운 것을 기준으로 하여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서 살아갑니다. 그것보다 지나치게 높거나 크면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고 자기의 경험과 지식, 그리고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이 전부인양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기의 경험에 비추어 맞는 것, 자기의 지식의 범주 안에 들어가는 것,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것만 받아들이며 살아갑니다. 설혹 자기의 한계를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음을 안다하더라도 대개는 모르는 척하거나 또는 억지를 부려 자기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살아가기 십상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로 보여집니다. 많은 수의 기독교인들은 자기가 안고 있는 성경지식, 자기가 겪은 신앙체험이 마치 신앙의 전부인 양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성경지식으로 하나님을 다 아는 것인 양 착각하기도 하고, 자기가 겪은 신앙의 체험으로 혼자만이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확신하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신앙의 절대적인 표준으로 삼고 또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기까지 합니다.


  우리 교회에 청년1부와 청년 2부가 있는데 청년 1부는 홍 전도사님이 담당하셔서 금요일에는 성경공부, 주일 오후에는 성경통독을 하십니다. 그리고 청년 2부는 제가 직접 담당을 하는데 금요일에 모여 성경공부를 합니다.

  1994년 1월부터 마가복음 공부를 시작해서 올 4월까지 모두 16개월에 걸쳐 한 권의 공부를 마쳤습니다. 마가복음은 16장의 비교적 짧은 책인데 거의 빼먹지 않고 매주일 했는데도, 그것도 한 번 모이면 보통 1시간 15분에서 20분 정도 씩 하는데 그렇게 걸렸습니다. 그러니까 꽤 깊이있게 공부를 한 것 같습니다.  5월부터 창세기 공부를 시작했는데 지난 시간에 4장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하다가 끝났습니다.


 그 성경공부를 하면서 나름대로의 원칙을 갖고 있는데,

 1) 목사 혼자 이야기 하지 않는다.

 2) 참석한 사람이 자유스럽게 느낀 점을 이야기한다.

 3) 질문은 많을수록 좋다.

 4) 단정을 내리는 대답은 가능한 한 하지 않는다 등등입니다. 


 그 성경공부 시간에는 성경을 읽다가 내가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경우도 많은데 때로는 그들이 내가 지금까지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들을 깨우쳐 줄 때가 있어서 놀라기도 하며 또 그들이 전혀 엉뚱한 질문을 해서 다 아는 것으로 생각했던 본문을 깊이 생각해 보게 되는 경우도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젊으니까 인생의 미래가 넓게 열려 있고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앞으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느끼고 배우고 행동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경도 폭넓게 읽어야 하고 동시에 깊이있게 읽어야 합니다. 미리 스스로의 생각의 폭을 제한시키지 말고, 또 성경을 통해 제한시켜 버리지 말고 성경을 통해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결국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 내가 가지고 있는 그 무엇으로 내 삶을 스스로 얽어매고 제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경험, 지식, 또는 소유한 그 어떤 것 모두를 넘어서는, 다시 말해서 내 한계를 넘어서는 분이 계시고 내가 알지 못하는 삶의 목적도 아시고 또 삶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 계심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분이 나를 세상에 살게 하셨고 지금까지 인도 하셨고 앞으로도 인도하실 것을 믿고 사는 것이며 세상에는 내 경험이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참으로 많이 있으며 우리는 그 분 앞에서 겸손히 무릎 꿇을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앙생활을 오래하면 오래할수록, 또 신앙의 체험을 하면 할수록 나 자신의 부족함과 초라함을 깨닫게 되고 그래서 결국은 더욱 더 낮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 참 신앙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은 이것을 한낱 이상일 뿐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우리의 현실은 그것과는 정반대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 교회는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자기 고백을 다시 기억하게 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5)


 그런데 여러분!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고백했다고 해서 우리가 그를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할 수 있습니까? 아주 못된 죄인이라고 매도할 수 있습니까? 사실은 사도 바울이야말로 자기 자신의 구원 문제를 놓고 얼마나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사람이며 또 그 사람만큼 하나님 앞에서 낮아진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바로 그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참으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당신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증거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하나님의 사람인지 아닌지 하나님의 영에 속한 자인지 악령에 속한 자인지를 사도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속한 사람들에게 당신을 나타내는 방법이 있으셨는데 그것을 바울은 “은사”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말하는 “은사”를 집대성해 놓은 책이 바로 고린도전서 12장, 13장, 14장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가운데 은사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싶으면 고린도 전서 12-14장까지를 잘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12:1-4절을 먼저 읽어드려야 되겠습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너희도 알거니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여러분!

 우리 가운데 이방인 아닌 자가 아무도 없지요? 우리 가운데 우상을 따르지 않던 자가 아무도 없지요? 사도 바울은 이방인이요 우상을 따르던 우리들이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된 것이 오직 성령의 역사임을 제일 먼저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가장 중요한 은사입니다. 성령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그 누구도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은사만 받으면 사실은 충분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란 존재는 이상해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보여지는 은사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남들이 다 받은 은사를 내가 받았다고 해서 만족하지는 못합니다. 무언가 나만의 것, 다른 사람은 받지 못한 것을 받아서 그것을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은사를 주실 능력이 있고 또 주시기도 하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주의해야할 것이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은 참으로 다양한 은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8절부터에서 자세하게 나와 있는데 지혜의 말씀(주로 윤리적인 교훈과 권면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그리스도적 진리에 대한 해설)으로 나누는데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믿음- 하나님께 특별한 능력을 보여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특별한 믿음

 병고치는 은사

 기적들을 행하는 능력- 광범위한 비정상적 활동

 예언하는 능력- 흥분되고 황홀한 말이기는 하나 일상적인 말

 영 분별하는 능력- 성령인지 악령인지 분별

 방언하는 능력- 알아들을 수 없는 말

 그 방언을 통역하는 능력


 특별히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방언하는 능력을 가장 높게 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이제 여기에서 문제가 생겨납니다. 이 여러 가지 종류의 영적 현상들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성령의 활동인지 아닌지 구분할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증거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령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자기들이 받은 은사로 말미암아 오히려 시험에 빠졌습니다.


 어떤 은사들이 더 중요한가요?

 이런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까?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모든 은사를 다 받을 수 있다고 기대할 수는 있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이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에게 반드시 한 가지 은사는 꼭 주시며 그것은 오직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제외되지 않으며 또 동시에 어느 교인도 사적인 용도를 위해서 자신의 은사를 갖고 있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은사를 사모해야 하지만 어떤 은사를 줄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일이므로 아무나 자랑하거나 열등감을 가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것으로 교회에 덕을 쌓는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은사를 받았다고 자랑하는 것처럼 큰 죄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 몸에서 약하다고 보이는 지체가 오히려 더 요긴한 것처럼 또 몸 가운데서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부분들을 더 귀한 것으로 입히고 보기 흉한 지체들을 더욱 더 아름답게 꾸며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보다 약하고 비천한 성원들이 멸시당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각별히 귀한 대우를 받아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무가치한 전 인류를 다루어 오신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자,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해 봅시다.

 주께서 어떤 개인에게 무엇을 주시기로 작정하시든 간에 그것은 교회의 선익을  위한 것이다.

 선물은 다양하지만 모두가 지역 교회와 전체 교회에 중요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특별한 지혜와 통찰력을 부여받고 (8절), 어떤 사람은 뛰어난 믿음이나 병자를 치유하는 능력까지도 부여받는다.(9절)

 또 어떤 사람은 예언의 선물,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특별한 메시지를 회중에게 전하는 능력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특수한 형태의 기도 언어인 이상한 언어(방언)를 말하는 능력을 갖고 있을 수도 있고, 또 이 언어를 알아듣고 해석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 이 모든 영적 선물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택에 따라 내려주신다. 이 선물들은 받은 사람의 능력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성덕(신앙의 연수, 직분) 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자신의 영적 선물을 자랑할 수 없으며 그것을 다른 사람들의 선익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모든 은사를 열거한 후에 분명히 말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은사 가운데 가장 큰 은사,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 중에 가장 좋은 길 그것을 너희에게 보이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기에 나오는 천사의 말은 보통 인간이 이해 할 수 없는 말이요,  징과 꽹과리는 종교적인 관행에 널리 쓰이던 도구들이며, 소리는 신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나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 또는 예배자들을 흥분시키는 효과로 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방언을 하고 천사의 말을 한다 하더라도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무의미한 것이고 이교적인 관례에 지나지 않으며 그렇게 드리는 예배는 이방신전에서 징과 꽹과리로 소리치며 예배드리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또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서 모든 신비로운 것,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케 하는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심지어는 자기 목숨을 바칠 정도까지 찬란한 영웅적 행위를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떤 것인가요?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

 말씀을 받아 전하는 특권도 사라지고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도 끊어지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각자에게 특별히 부족한 것이 있지요?

 무엇인가 한두 개 걸리는 것이 있지요?

 그것을 회복시키고 채워야 합니다. 참으로 선한 마음으로 사랑을 나타내며 살아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모두 참으로 충만한 은사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길을 걸어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