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리를 불어도
마태 11:16-19 / 1995. 10. 1 (음악부 주관 저녁예배)
예수께서 태어나셨을 때 팔레스틴 지방은 당연히 로마의 식민지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일찍이 지중해를 중심으로 해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일대를 통일한 로마는 로마의 평화, 소위 Pax Romana를 구가하며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당연히 로마의 평화는 로마 제국에 정복당한 주변 모든 민족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평화였습니다. 로마 제국은 세계 각 지역에 황제의 대리인인 총독 또는 분봉왕들을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고 그들을 통해 각종 세금을 거둬들여 나라를 유지해 나갔습니다.
예수 탄생 당시 팔레스틴의 통치자는 이두메 사람, 곧 에서의 후예로 알려진 에돔 사람 헤롯대왕이었습니다. 로마는 기원전 37년 헤롯을 유다의 왕으로 임명하고 헤롯 가문의 괴뢰 정권을 통해서 유다를 통치하는 길을 택했는데 로마 황제는 헤롯에게 자치권을 주고 그 댓가로 헤롯은 로마에 세금을 거두어 바치는 국경을 지켜주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니까 헤롯대왕은 로마를 거역하지 않고 세금을 잘 바치고 국경만 잘 지키면 나머지는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통치자였습니다. 결국 헤롯은 권력을 행사하고 로마는 골치 아픈 유대 민족을 직접 다루지 않아도 되었으니 어찌 보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관계이고 로마로 말하면 손 안대고 코푼 격이었습니다.
헤롯 대왕은 아주 간교하고 권력의 맛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얼마나 종교적이었는지를 알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유대인들의 반발을 사지 않을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한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을 대규모로 개축하는 일이었고 또 성전의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 때 개축된 성전을 우리는 헤롯 성전이라 부르고 헤롯의 후원을 받아 성전 제사장 계급인 사두개인들이 헤롯을 지지했고 또 헤롯당이라 불리우는 부류가 생겨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유대의 지도자들을 이간하여 분열되게 만들고 그것을 이용하는데 아주 능했습니다. 또한 그는 예루살렘을 세계적인 도시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내걸고 곳곳에 길을 닦고 건물을 세우고 수로를 파고 극장을 건설하였습니다. 또 땅 없는 사람들의 정착지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미개지를 개간하여 드넓은 땅을 제 소유로 만들었고 심지어 남의 나라 도시 십여 곳에도 웅대한 건물을 건설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 성전을 크게 개축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유대인들이 헤롯정부의 합법성을 어느 정도 인정했었지만 그러나 끊임없이 계속되는 대규모 건설 사업은 무수한 백성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고 그 모든 일을 위한 세금은 백성들의 허리를 휘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또 헤롯 대왕 자신은 수많은 후궁을 두고 많은 군대와 첩보원을 두어 백성들을 감시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아내와 자식들, 심지어 장모까지 살해하는 등, 자신에게 저항하는 자는 누구라도 공공연히 투옥하고 고문하고 처형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유아 학살 사건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통치 30여 년간의 허영과 야욕은 이스라엘의 경제 질서를 완전히 병들게 했습니다. 게다가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에 끊임없는 천재지변이 있었는데 큰 것들만 살펴보아도 주전 65년 가뭄, 주전 64년 태풍, 주전 31년 지진, 주전 29년 전염병, 주전 25년 기근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어려움들이 팔레스틴을 휩쓸었습니다.
자, 그러니 이러한 시대, 이러한 땅에 살던 백성들이 바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일찍이 선지자들이 꿈꾸었던 하나님의 나라, 메시야의 도래였습니다. 다윗의 후손인 메시야가 와서 로마와 그의 앞잡이 헤롯가문을 몰아내고 정의로운 질서의 새 세계를 그들은 꿈꾸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끊임없이 나타났던 것, 그것이 바로 자칭 메시야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5:36-37에도 기록된 대로 드다라든가 갈릴리 유다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 백성을 선동하고 자칭 메시야라고 백성들을 유혹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다 실패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세례 요한이 등장했습니다. 그는 제사장들의 아들로 알려져 있는데 아버지의 대를 이어 제사장이 되지는 않고 오히려 광야에 들어가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나이 서른 쯤 되었을 때에 돌연 요단강 옆 유대 광야에 나타나서는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회개 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런데 세례 요한은 약대(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주 유행에 민감한 멋쟁이지요. 낙타 털옷을 입었으니 밍크를 입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거기에 가죽으로 된 혁대는 기가 막힌 앙상블을 이루고 메뚜기와 석청은 또 얼마나 고급요리입니까? 그렇습니까? 아니지요. 그야말로 풍찬노숙하면서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찾아와서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누가복음3장에 의하면 심지어 세리들, 군인들까지 와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마태복음 2:7에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아니, 독사의 자식들이라니,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사탄의 후예들이라는 말이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왜 그렇게 욕을 먹어야 하는가요?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세례 요한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회계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그렇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자기들의 혈통을, 핏줄을 자랑했습니다. 자기들이 선민인 것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참된 회개는 하지 않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심한 욕을 들어야했습니다.
여러분!
그런 욕을 먹고도 가만히 있을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가만 있겠습니까? 그들 역시 세례 요한을 욕했겠지요. 그것이 바로 세례 요한을 “미쳤다”다고 한 말이었습니다.
세례 요한, 그는 소위 에쎄네파에 속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 살면서 성서를 묵상하고 경건하게 살려 애쓰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례 요한 역시 광야에서 살았으니 옷은 낡았을 것이고 얼굴에 수염이 가득찼을 것이고 바짝 말랐을 것이고 눈에서만 무언가 억누르기 힘든 광채가 나왔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회개하라고, 하나님의 진노가 가까웠다고 소리쳤으니 그런 세례 요한을 미쳤다고 비웃는 것이었습니다. 음식도 별로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는 세례요한을 보고 잔치에 찾아가 상석에 앉아 거드름 피우기를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이 도저히 비위에 맞지 않아 하면서 손가락질 하는 바로 그런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사렛의 예수가 등장합니다. 세례 요한과 똑 같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한 예수는 뜻밖에도 세례 요한과는 달랐습니다. 세례 요한이 금식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았는데 비해서 그의 후계자처럼 보였던 예수는 잔칫집에도 잘 가셨고 음식도 잘 잡수셨습니다. 세리 마태를 제자로 삼으셨을 때 마태는 스승을 다른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였습니다. 아마 한 상 가득 차리고 최고급 포도주를 내놓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참으로 맛있게, 기분 좋게 잡수셨을 것입니다. 웃기도 하시고 농담도 하시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마태 9장에 의하면 요한의 제자들이 찾아와서 이렇게 묻기까지 합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
이 때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시지요.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 슬퍼할 수 있느냐?”
당신을 신랑에 비유하면서 당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 즐거워하라는 말씀입니다. 자 이제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비난합니다.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여러분 이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아십니까?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라는 이 말은 그냥 쉽게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신명기 21장에 이 말의 기원이 있는데 그곳에 의하면 어느 부모가 자기의 말을 안 듣는 자식을 성읍 장로들에게 데려가서 “우리의 이 자식이 부모 말을 안 듣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라고 말하면 성읍의 모든 사람이 그 자식을 돌로 쳐죽이게 되어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비난하는 이 말은 곧 돌로 쳐 죽일 죄인이라는 무서운 뜻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께서는 오늘의 비유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아이들이 시장 바닥에서 놀고 있습니다. 특별한 놀이터나 장난감이 있을 리 없으니까 아이들이 자기들이 본 것을 흉내 내며 놉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결혼식 풍경도 보았고, 장례식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흉내를 내면서 놀려고 합니다. 아이들은 편을 갈라서 놀았습니다. 한 쪽 편 아이들이 다른 쪽 편 아이들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테니까 너희는 거기에 맞춰서 춤을 추어라. 우리가 애곡할 테니까 너희는 거기에 맞춰서 가슴을 쳐라. 그런데 다른 쪽 편 아이들이 춤을 추지도 않고 가슴을 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한 쪽 편 아이들이 그들을 야단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바로 그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통해 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대파국에 직면한 마지막 세대에, 마지막 사자인 세례자 요한을 보내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검소하게 살고, 금식과 절제 생활을 하면서 회개에로 초대하였지만 사람들은 거절하였을뿐 아니라 그를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거부하고 장례식의 슬픈 놀이로 간주하여 배척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먹고 마시며 친교(식탁에 함께함은 화해와 용서의 성서적 표현)를 맺고 기쁜 소식을 전했지만 오히려 유다인은 증오심에 차서 예수를 식충이와 주정뱅이로 매도하여 “방탕한 데다가 술만 마시는 완악하고 반항적인 자식”(신명 21, 20-21 참조)으로 간주하여 예수님을 돌로 쳐 죽어야 할 자로 몰아세웠던 것입니다.
이 비유는 회개와 용서에로 초대하는 하나님의 자비의 때를 철저히 거부하는 유다 종교 지도자들에게, 오히려 주객이 전도되어 심판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 자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이 아니라 유다인들(종교 지도자들)임을 깨닫도록 촉구합니다. 결단의 시간의 표징으로서의, 하나님의 마지막 사자의 회개와 용서의 부르심에 대한 일깨움을 깨닫지 못한 눈먼 백성의 대각성을 촉구한다는 말입니다.
‘장터에서 노는 아이’의 비유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과소비를 미덕으로 생각하여 흥청대고, 먹고 마시고 입고 하는 것은 아직도 절대 빈곤에 허덕이는 지구 가족이 많은 실정에 비추어 볼 때, “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자들이 아닌가요? 가난하고 버림받은 가족들과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사귐과 나눔을 갖지 않는 우리는, 그들과 함께 어울려 먹고 마심으로 화해와 용서, 사랑을 실천하셨던 예수님을 따라 ‘피리는 불어도 춤추지 않는’자들은 아닌지요? 하늘 나라는 이미 이 세상에 왔고, 구원의 기쁜 혼인잔치(혼인잔치는 구원의 때를 상징)는 벌어졌건만 여러 가지 세상일을 핑계로 거부하는 자들이 우리 신앙인들이 아닌가요?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의 놀이를 세심하게 관찰해 두셨다가 당신의 메시지의 내용을 잘 전달하시기 위해 비유로 쓰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설교와 가르침이 현실과 동떨어져 뜬구름을 잡는 것처럼 거창한 논리나 큰 목소리의 웅변술이라기보다,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삶의 현실을 말씀하심으로써 공감과 이해를 촉발하는 이유가 됩니다.
오늘날 교리 교육이나 설교 내용이 지나치게 사변적이며 개념적으로 흘러, 구체적 ‘삶의 자리’와 괴리되는 현상은 없는 것인지, 예수님의 비유들을 본보기로 한 번쯤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신앙 교육이 복음 선포와 복음화가 아니어서, 세례 받은 후에도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부한 생명력으로 여러분 안에 살아 있어야” (골로3,16)하는데도, 주일 예배에서 선포된 ‘말씀’들이 예배가 끝나면 삶의 현장에서는 잊혀져 버립니다. 주일 예배에서 선포된 ‘말씀’을 일주일 동안 삶으로 체현시켜서, 그 말씀이 자신에게 육화되어 이 세상을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으로 변화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처럼 유다인들은 율법의 형식만을 지킴으로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하여 율법의 내용인 세례자 요한의 회개와,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를 거부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은 바로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교인들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한 것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여러분!
이제 한국 교회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애곡하는 소리가 들리면 가슴을 치며 회개할 수 있어야 하고 피리소리가 들리면 함께 기뻐하며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례요한이 선포한 “회개하는” 소리가 선포되어야 하고 세리와 죄인들을 찾아가서 함께 피리를 불며 기뻐하신 주님을 증거하고 함께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는 최대한 절제하고 검소한 삶을 살아야하고 불행한 이웃들에게는 끊임없이 나누어 주는 가운데 기쁨을 함께 누려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 이 땅의 백성들과 함께하는 교회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이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바로 우리들로부터 시작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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