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좋은 길
누가복음 7:36-50, 고린도전서 12:4-11 / 1982. 8. 29
우리 삼성 속은 비록 숫자는 적지만 오늘 은혜와 은사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크신 뜻을 깨닫고자 합니다.
막달라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마리아라는 여자가 한사람 있었습니다. 그녀는 창녀였습니다. 그녀는 늘 이웃으로부터 비웃음과 멸시를 받았고, 그것이 그녀에게는 고통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녀를 비방하고, 욕을 퍼붓고, 동네가 지저분해진다고, 교육상 어린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아무도 그녀를 사람으로 취급해 주질 않았습니다. 그녀에게는 친구가 없었습니다. 이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부자였습니다. 그녀는 돈만이 전부였습니다. 악착같이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한 젊은이가 나타나서는 위대한 능력을 행하면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선포하며 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버림받은 자와 죄인의 친구이며 세리들, 창녀들 같이 사람 취급받지 못 하는 사람들의 친구이며, 세리를 제자로 삼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세리의 집에 초대받아 가서 함께 식사하며 여러 가지 좋은 가르침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언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깨우침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산다는 것이 빵을 위한 투쟁 이상의 것인가?”
“인생이란 고통으로 시작하여 고통으로 끝나는 불행한 존재 아닌가?”
그는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비난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슨 죄든지 용서를 해준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그 사람이 누군가 궁금해졌습니다. 갑자기 많은 물음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과연 나같은 사람도 친구로 삼아줄까?
과연 나같은 사람도 용서해 줄까?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녀는 자기 자신의 지난 삶이 순식간에 떠올라 왔습니다. 새삼스럽게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왜 살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그러다 그녀는 드디어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번 가보자.”
이 때 그 분은 바리새파 사람 시몬의 집에 초대되어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 둘레에 사람들이 많아 마리아는 집안으로 들어가기가 몹시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그녀는 몰래 집안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다 그만 그녀를 알아본 사람들이 그녀를 막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결사적으로 뚫고 들어갔습니다. 드디어 그녀는 시몬의 방으로 뛰어 들어와서는 예수의 발 앞에 울며 엎드렸습니다.
모든 사람은 처음에는 놀랐고 나중에는 화를 내며 마리아를 욕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의 발 앞에 엎드린 채 계속 울었습니다. 이윽고 그녀는 자신의 눈물로 적셔진 예수의 발을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었습니다. 그리고는 옥합을 꺼내어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이후의 과정을 여러분 모두 잘 아시지요? 예수님을 초대했던 그 바리새파 사람 시몬은 예수를 비웃었습니다. 만일 예수가 진짜 예언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저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알았을 터인데. 얼마나 더러운 여자인지 알았을 터인데. 그러면 자기를 만지지 못하게 했을 터인데.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을 보니 진짜 예언자가 아닌 것이 틀림없어.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미 시몬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시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시몬이 예수께 말씀하시라고 하자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 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물론 시몬은 쉽게 대답했습니다.
“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예수께서도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생각이 옳도다.”
그리고는 이어서 47절에서 “잘 들어 두어라. 이 여자는 이토록 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네 죄는 용서받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때 마리아는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 이상의 기쁨이 어디 있습니까? 그녀의 삶은 예수를 만난 순간 완전히 변했을 것으로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 누가 막달라의 마리아보다 훌륭합니까?
우리 가운데 누가 막달라의 마리아보다 더 착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 가운데 누가 ‘나는 마리아 같지 않으니까 뭐 그렇게 용서받을 게 없어’ 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 가운데 똑똑해서, 잘나서 예수 믿고, 이곳에 앉아 있을 수 있습니까?
여기 앉아 있을 수 있는 것,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순간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은 바로 회개의 고백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자기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드러날 때, 아담과 하와가 부끄러워 숨었듯이, 우리는 숨을 수밖에 없고 부끄러워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아담이고 하와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회개의 고백, 회개의 눈물이 없이 무조건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올바른 성령의 체험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한 은혜는 곧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 곧 은혜입니다. 따라서 은혜 받게 해달라는 말은 곧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달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쓰여야 합니다. 그리고 은혜는 하나님만이 주시는 것이지 결코 어떤 인간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은혜를 체험하고 은혜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각각 알맞은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한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함께 오늘의 본문인 고전 12장에 바로 성령의 은사와 능력 아홉 가지가 나와 있습니다.
고전 12장 7-11에 보면 아홉 가지 은사가 나옵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함, 영을 분별함, 각종 방언 말함, 방언들 통역함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다 성령이 행하시는 것이며, 따라서 어느 것은 필요하고 어느 것은 필요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서 행할 수 있는 것이 다 다르다고 하면서 12장 28-30절에서 교회에서 행하는 직분들을 몇 가지로 정리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은사 중에서 방언의 원칙을 한번 살펴보십시다. 사도 바울은 고전 14장에서 방언의 은사에 대해 자세히 정리해 놓았습니다.
26절 모든 것을 교회의 덕이 되도록 하라.
27절 방언을 말할 때는 둘이나 셋이 차례로 말하고 한사람은 통역을 할 것.
28절 통역이 없을 경우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자기 자신과 하나님에게만 말할 것.
29절 방언하는 것도 금하지 말 것.
40절 모든 일을 적절하게 또 질서있게 진행시킬 것, 왜냐하면
33절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19절 “교회에서 내가 방언으로 일만 마디의 말을 하는 것보다도 내 이성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여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은사들이 다 중요하지만 그러나 사도 바울은 결정적으로 우리에게 더 큰 은총의 선물, 즉 은사를 사모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서 바로 고전 13장, 그 유명한 사랑장으로 넘어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습니까?
마가복음 10장 17-22절에 나오는 부자 청년 이야기를 다 아시지 않습니까?
여러분, 어떻게 재산을 다 팔아 줄 수 있습니까?
도대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요구하신 주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의 중심이 돈이고, 가장 귀한 것이 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 사는 것, 가치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제 이야기를 마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은사받고 뜨거워졌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뜨거워진 것을 보존하는 일은 더욱 중요합니다.
결혼하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신앙은 부부관계와 같은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뜨겁지만 평생 뜨거울 수는 없습니다.
은은한 정이 한 평생 두 사람을 하나로 묶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도 역시 나를 불러 주시고 달게 하시는 은혜를 평생을 두고 갚는다고 생각하면서 신앙생활 한다면 물론 평생해도 못 갚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기뻐 받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누가복음 7:36-50, 고린도전서 12:4-11 / 1982. 8. 29
우리 삼성 속은 비록 숫자는 적지만 오늘 은혜와 은사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크신 뜻을 깨닫고자 합니다.
막달라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마리아라는 여자가 한사람 있었습니다. 그녀는 창녀였습니다. 그녀는 늘 이웃으로부터 비웃음과 멸시를 받았고, 그것이 그녀에게는 고통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녀를 비방하고, 욕을 퍼붓고, 동네가 지저분해진다고, 교육상 어린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아무도 그녀를 사람으로 취급해 주질 않았습니다. 그녀에게는 친구가 없었습니다. 이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부자였습니다. 그녀는 돈만이 전부였습니다. 악착같이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한 젊은이가 나타나서는 위대한 능력을 행하면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선포하며 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버림받은 자와 죄인의 친구이며 세리들, 창녀들 같이 사람 취급받지 못 하는 사람들의 친구이며, 세리를 제자로 삼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세리의 집에 초대받아 가서 함께 식사하며 여러 가지 좋은 가르침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언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깨우침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산다는 것이 빵을 위한 투쟁 이상의 것인가?”
“인생이란 고통으로 시작하여 고통으로 끝나는 불행한 존재 아닌가?”
그는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비난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슨 죄든지 용서를 해준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그 사람이 누군가 궁금해졌습니다. 갑자기 많은 물음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과연 나같은 사람도 친구로 삼아줄까?
과연 나같은 사람도 용서해 줄까?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녀는 자기 자신의 지난 삶이 순식간에 떠올라 왔습니다. 새삼스럽게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왜 살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그러다 그녀는 드디어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번 가보자.”
이 때 그 분은 바리새파 사람 시몬의 집에 초대되어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 둘레에 사람들이 많아 마리아는 집안으로 들어가기가 몹시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그녀는 몰래 집안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다 그만 그녀를 알아본 사람들이 그녀를 막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결사적으로 뚫고 들어갔습니다. 드디어 그녀는 시몬의 방으로 뛰어 들어와서는 예수의 발 앞에 울며 엎드렸습니다.
모든 사람은 처음에는 놀랐고 나중에는 화를 내며 마리아를 욕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의 발 앞에 엎드린 채 계속 울었습니다. 이윽고 그녀는 자신의 눈물로 적셔진 예수의 발을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었습니다. 그리고는 옥합을 꺼내어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이후의 과정을 여러분 모두 잘 아시지요? 예수님을 초대했던 그 바리새파 사람 시몬은 예수를 비웃었습니다. 만일 예수가 진짜 예언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저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알았을 터인데. 얼마나 더러운 여자인지 알았을 터인데. 그러면 자기를 만지지 못하게 했을 터인데.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을 보니 진짜 예언자가 아닌 것이 틀림없어.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미 시몬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시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시몬이 예수께 말씀하시라고 하자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 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물론 시몬은 쉽게 대답했습니다.
“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예수께서도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생각이 옳도다.”
그리고는 이어서 47절에서 “잘 들어 두어라. 이 여자는 이토록 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네 죄는 용서받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때 마리아는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 이상의 기쁨이 어디 있습니까? 그녀의 삶은 예수를 만난 순간 완전히 변했을 것으로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 누가 막달라의 마리아보다 훌륭합니까?
우리 가운데 누가 막달라의 마리아보다 더 착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 가운데 누가 ‘나는 마리아 같지 않으니까 뭐 그렇게 용서받을 게 없어’ 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 가운데 똑똑해서, 잘나서 예수 믿고, 이곳에 앉아 있을 수 있습니까?
여기 앉아 있을 수 있는 것,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순간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은 바로 회개의 고백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자기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드러날 때, 아담과 하와가 부끄러워 숨었듯이, 우리는 숨을 수밖에 없고 부끄러워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아담이고 하와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회개의 고백, 회개의 눈물이 없이 무조건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올바른 성령의 체험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한 은혜는 곧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 곧 은혜입니다. 따라서 은혜 받게 해달라는 말은 곧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달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쓰여야 합니다. 그리고 은혜는 하나님만이 주시는 것이지 결코 어떤 인간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은혜를 체험하고 은혜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각각 알맞은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한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함께 오늘의 본문인 고전 12장에 바로 성령의 은사와 능력 아홉 가지가 나와 있습니다.
고전 12장 7-11에 보면 아홉 가지 은사가 나옵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함, 영을 분별함, 각종 방언 말함, 방언들 통역함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다 성령이 행하시는 것이며, 따라서 어느 것은 필요하고 어느 것은 필요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서 행할 수 있는 것이 다 다르다고 하면서 12장 28-30절에서 교회에서 행하는 직분들을 몇 가지로 정리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은사 중에서 방언의 원칙을 한번 살펴보십시다. 사도 바울은 고전 14장에서 방언의 은사에 대해 자세히 정리해 놓았습니다.
26절 모든 것을 교회의 덕이 되도록 하라.
27절 방언을 말할 때는 둘이나 셋이 차례로 말하고 한사람은 통역을 할 것.
28절 통역이 없을 경우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자기 자신과 하나님에게만 말할 것.
29절 방언하는 것도 금하지 말 것.
40절 모든 일을 적절하게 또 질서있게 진행시킬 것, 왜냐하면
33절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19절 “교회에서 내가 방언으로 일만 마디의 말을 하는 것보다도 내 이성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여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은사들이 다 중요하지만 그러나 사도 바울은 결정적으로 우리에게 더 큰 은총의 선물, 즉 은사를 사모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서 바로 고전 13장, 그 유명한 사랑장으로 넘어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습니까?
마가복음 10장 17-22절에 나오는 부자 청년 이야기를 다 아시지 않습니까?
여러분, 어떻게 재산을 다 팔아 줄 수 있습니까?
도대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요구하신 주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의 중심이 돈이고, 가장 귀한 것이 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 사는 것, 가치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제 이야기를 마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은사받고 뜨거워졌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뜨거워진 것을 보존하는 일은 더욱 중요합니다.
결혼하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신앙은 부부관계와 같은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뜨겁지만 평생 뜨거울 수는 없습니다.
은은한 정이 한 평생 두 사람을 하나로 묶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도 역시 나를 불러 주시고 달게 하시는 은혜를 평생을 두고 갚는다고 생각하면서 신앙생활 한다면 물론 평생해도 못 갚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기뻐 받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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