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 년도

1982. 10. 10 / 그 다음은? / 창세기 28:10-22, 요한복음 15:13-14

람보 2 2015. 3. 4. 16:32

그 다음은? (1982. 10. 10 )

그 다음은?

창 28:10-22, 요 15:13-14 / 1982. 10. 10

저는 오늘 두가지의 이야기를 먼저 여러분에게 해드리고자 합니다. 그 중 하나는 제가 얼마전에 본 연극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최근 우리 모두가 듣고 본 사건의 이야기입니다. 우선 연극 이야기를 조금 길게 해 드리겠습니다.

때는 1940년에서 42년, 독일과 러시아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끼여 끊임없이 침략만 당하던 약소국가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가 그 무대입니다. 여기에 두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유대인이면서 고아원 원장인 코르쟈크, 야누스 코르쟈크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게슈타포, 독일군 비밀 경찰의 장교입니다.

야누스 코르쟈크, 그는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유태인이라는 그 한가지 이유로 나치 정권에 의해 탄압받던 그의 집안은 그의 열한살 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급속히, 더욱 심한 어려움과 가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가족은 가진 것을 하나씩 팔아 끼니를 이어갔습니다. 그런 코르쟈크의 가족들에게 아주 소중한 물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남기신 금딱지 회중시계였습니다. 식구들은 저녁마다 촛불을 켜놓고 모여 앉아 시계의 태각태각 소리를 들으면서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먹을 것이 없게 되자 어머니는 그 시계를 전당포에 잡히고는 빵을 사 오셨습니다. 그 시계를 전당포 주인은 쇼윈도우에 전시했고 그때부터 그의 형제들은 그곳에 가서 그 시계를 들여다 보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그의 형제들은 끼니를 굶으면서 열심히 돈을 모았습니다. 마침내 돈을 다 만들어 전당포로 시계를 찾으러 갔습니다. 그러나 시계는 없었습니다. 그날 아침에 팔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코르쟈크는 바로 이때 인생을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합니다.

또 한사람, 게슈타포의 장교. 그의 어린시절도 역시 불행하였습니다. 그도 어려서부터 굶주림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는 이것을 요란하게 소리지르는 배고픔이 아니라 조용히 죄어 기어들어오는 배고픔이라고 후에 고백합니다. 그는 부끄럼 많은 소년이었고 연약하게 자란 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친구 중에 나치당원이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친구가 입은 나치당의 날씬한 제복에 홀려 그도 나치당에 가입하게 되었고, 이때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을 느끼게 됩니다.

위의 두 사람, 코르쟈크와 게슈타포의 장교, 그들의 어린 시절은 똑같이 불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유태인 코르쟈크는 유태인 고아들을 기르는 고아원 원장이 되었고, 또 한사람은 게슈타포, 독일 비밀 경찰이 되었습니다.

1942년 독일 육군이 소련 깊숙이까지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국내에서는 나치가 유태인 학살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때, 코르쟈크는 66명이나 되는 고아들에게 먹일 것을 구하러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썩은 무우밖에 구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에 게슈타포는 자기 아들에게 캔디, 초콜렛, 쵸코렛크림을 갖다 줄 수 있었고 자기 집 개한테 쏘세지를 갖다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임무는 바로 유태인들을 잡아다 집단 수용소(까스실이 있는)에 보내는 일이었습니다.

드디어 코르쟈크의 고아원에까지 나치의 손길이 닿았습니다. 게슈타포의 장교는 코르쟈크에게 모든 아이들을 까스실이 있는 집단 수용소로 보낼 것을 명령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마지막으로 우유와 빵이 지급되었고 야누스 코르쟈크는 심한 번민에 빠졌습니다. 몇 시간을 통곡하여 기도하던 그는 드디어 아이들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하고 아이들에게 그의 일생에 있어서 마지막이자 유일한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이제 홍해를 건너 좋은 세계로 간다고 말입니다. 아이들은 기쁘게 코르쟈크를 따랐습니다. 그들은 모두, 코르쟈크와 예순 여섯의 소년 소녀들은 모두 벌거벗었습니다. 그들은 곧 목욕탕으로, 가스가 가득 찬 목욕탕으로 노래를 부르며 걸어들어 갔습니다. 그들은 모두 유태인이었습니다.

두번째 이야기는 그로부터 정확히 40년이 지난 1982년 9월 17일 금요일 밤 이스라엘군이 점령하고 있던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의 서쪽에 있는 팔레스타인 남민촌 샤브라와 샤틸라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때 레바논은 이스라엘군의 압력으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철수하고 차츰 평온을 되찾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9월 17일 바로 이날은 유태인에게 있어서는 “로시 하사나” 즉 신년 초하루가 시작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총성이 멎고 모든 사람이 평온에 잠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이스라엘군의 엄호를 받은 팔랑헤 즉 레바논의 우익 기독교 민병대원들이 완전 무장을 한 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단원들을 수색한다는 명목으로 샤브라와 샤틸라의 난민촌으로 진입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무기도 갖고 있지 않던 연약한 부녀자, 어린이 그리고 노약자 등 비무장 민간인들의 최소한 1,800명을 무참히 학살했습니다. 민간인들은 자기들에게 무기가 없다는 표시로 집집마다 흰색 천을 내걸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UPI통신의 한 기자는 20분을 걸어다니는 동안 약 1천구의 시체를 목격했다고 말하면서 전체적으로 사실은 몇 명이 죽었는지 모른다고 보도했습니다.

그의 보도에 따르면 길거리에 시체가 널려 있고, 끌려다니다 죽은 시체, 부모와 자식이 한 침상에서 죽고 마굿간, 부서진 집의 기왓장 틈에서 시체가 발견되었고, 남녀 구분도 안 될 정도로 처참하게 죽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 이스라엘 군인들은 탱크와 각종 대포,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채 난민촌 주변에 언덕을 쌓고, 내려다 보고 있었으며, 날이 밝자 이스라엘군인들이 운전하는 불도저는 시체를 파묻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간신히 살아남은 한 소년의 증언에 따르면 “기독교 민병대들이 발길로 문을 걷어차고 집으로 들어와 엄마, 아빠, 누이들을 제 눈앞에서 죽였어요”라는 것입니다.

독일의 나치들은 왜 유태인들을 그토록 죽어야했을까? 이스라엘과 기독교 민병대원들은 왜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그토록 무참하게 죽여야 했을까? 저는 그 대답을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언제까지 이런 비극이 되풀이 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하면서, 그 궁극적인 원인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면서 성서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대로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입니다. 그들은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싸웠습니다. 서로 먼저 나가려고 하다가 에서가 먼저 나오고 야곱은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한 순간의 차이로 에서는 장자가 되었고 따라서 그에게는 장자의 상속권이 주어졌습니다. 동생 야곱은 그것을 빼앗기 위해 별별 수단을 다 쓰다가 드디어는 아버지 이삭의 눈이 어두운 것을 이용하여 아버지를 속이고는 장자의 상속권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창세기 27:41절에 보면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돌아가실 날이 가까왔은 즉, 내가 내 동생 야곱을 죽이리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내가 내 동생 야곱을 죽이리라.”

지금까지의 이야기들, 거기에서 저는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유태인들을 죽인 독일의 나치,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죽인 이스라엘과 기독교민병대, 상속권을 빼앗기 위해 형과 아버지를 속인 야곱, 그것 때문에 동생 야곱을 죽이기로 마음먹은 에서, 그들 모두에게는 한마디로 “나”, 지극히 좁은 의미의 “우리” 밖에는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는 모두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이 말은 결국 그들은 모두 하나님없이, 아니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았다는 말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인간이 겪는 모든 비극의 근원에는 바로 “하나님없이”라는 사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죽게 된 야곱, 그것도 자기 친형의 손에 죽게 된 야곱, 그는 어떻게 되었는가요?
그는 살기 위해 도망쳐 가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리해서 그는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를 떠나 멀리 외로운 길을, 험한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혼자였습니다. 아무도 곁에 없었습니다. 낮에는 뜨거운 햇볕이 내려 쪼이고, 밤에는 추위에 떨었습니다. 편안히 재워 주는 곳은 물론 없었습니다. 그곳은 바로 광야였습니다.
광야란 어떤 곳인가요? 인간간의 모든 관계가 끊어진 곳, 하나님없이 살아가는 곳, 그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아니 현대인들은 모두 그 무엇인가에 쫓겨 도망치듯 살고 있지 않은가요? 우리들의 세계가 바로 광야가 아닌가요? 야곱은 밤에 홀로 쓸쓸히 누워 돌을 베게로 삼고 잠을 잘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대인들이 소유했다고 자랑하는 돈, 지위, 권력, 지식 그 모든 것은 결국 돌과 같이 딱딱하고 인간을 메마르게 하는 것이 아닌가요?

광야에 홀로 누운 야곱, 그의 마음은 얼마나 불안하고 답답했겠습니까? 아무도 없는 곳, 자기 혼자 버려진 채 쓸쓸히 잠들어야 하는 곳, 사실은 그곳은 바로 인생의 끝이었습니다. 야곱은, 아니 인간은 마땅히 그곳에서 죽어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이 세계를 광야로 만든 것은 순전히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생각했기에 수많은 유태인들을 아무 양심의 가책도 없이 죽일 수 있었던 나치들.

스스로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에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하나님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 한, 아니 알려고 하지 않은, 그래서 그곳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학살을 자행한 이스라엘과 기독교 민병대원들.

상속권과 거기에 따르는 축복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속이고, 싸우고, 죽일려고 하고, 도망치는, 그렇기에 할아버지 아브라함, 아버지 이삭과 함께 하시던 하나님이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분이라고 생각했던 야곱과 에서.

바로 이 모든 사람에 의해 이 세상은 광야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인가요?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그냥 그런 남의 이야기인가요? 사실은 바로 우리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아닌가요? 겉으로는 예수 잘 믿는 것처럼, 하나님 잘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 다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닌가요? 바로 여기에서 저는 하나의 물음에 사로잡힙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얼마 전 서울대학교에서 전국의 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수학 경시대회가 있었습니다. 전국의 각 대학에서 내노라하는 수재들이 모여서 실력을 겨루었는데, 이 때 1등한 학생은 서울대생이었습니다. 어느 기자가 그를 만나서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는데 그 학생은 몹시 어렵고, 집에서는 도저히 공부할 분위기가 되지 않아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학교 도서실에서 아주 열심히 공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 으레 나오는 질문이지만 기자는 그 학생에게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그 학생은 외국에 유학 갔다 와서 대학 교수가 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아주 좋은 희망이고 또 그렇게 노력하면 꼭 이루어 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 한 구석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솟아나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교수가 된다는 것,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 다음은?”

오늘날 우리 마음 속에 깊이 박혀 있는 병,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그 다음은 ?”이라는 질문을 할 줄 모르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대학교수가 된다는 것, 그것은 좋은 꿈이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닙니다. “무엇이 된다는 것"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나 의미는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다 ”무엇이 되겠다.“라는 것에만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삭막해지고 광야같은 세상이 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입학 시험을 눈앞에 둔 고3, 중3 여러분. 그들의 뒤를 따라갈 중고등부 학생 여러분, 그리고 그들을 올바르게 가르치기 위해 애쓰시는 선생님 여러분. 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요? 우리도 “내가 무엇이 되겠다.”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한다.”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 다음은?”이라는 질문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은가요?
오늘 우리의 부모님들은 “ 내 자식이 무엇이 되어야 한다” 라는 생각에 사로 잡혀서 “그 다음은?” 이라는 질문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은가요?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마무리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성서는 광야로 변해버린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 버렸나요? 다행히도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던 야곱, 그래서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았던 야곱, 그러나 성서는 바로 그 광야에서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계심을 증거합니다. 창세기 28장 15절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다가 기어이 이리로 다시 데려 오리라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어 줄 때까지 나는 네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 나는 네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지금 우리를 향하여 “나는 네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무엇이 되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이 되기 위하여”만 살기 때문에 광야로 변해버린 바로 우리의 삶을 향하여 “나는 네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말씀을 들을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다음은?” 이라는 물음에 대답해 주시는 분을 만나게 됩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곧 나의 친구라.”
오늘의 본문입니다. 예수는 바로 우리 모두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처참하게 죽으신 분입니다. 그의 삶은 한 마디로 사랑과 희생입니다. 바로 여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그 다음은?” 이라는 우리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 그것은 바로 예수가 보여준 사랑과 희생입니다.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 그리고 선생님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는 것, 그것은 바로 “내가 무엇이 되겠다.”라는 단계를 넘어 서서 예수의 크신 사랑을 본받아 우리의 모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겠다고 다짐하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그것은 바로 “내가 무엇이 되겠다”라는 단계를 넘어 서서 예수의 위대한 희생을 본받아 우리의 삶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이웃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하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광야같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 그것은 오직 사랑과 희생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 그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과 희생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우리들을 향해서 예수께서는 지금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곧 나의 친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