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돌아오라
렘 3:18-25 / 1982. 6. 13
예레미야서 3:22을 다시 읽겠습니다.
"배반한 자식들아, 돌아오너라.
너희의 마음을 바로 잡아 나를 배반하지 않게 하여 주리라."
문화공보부의 공식 통계에 의하면 기독교인 수가
1970년 323만 5475명
1980년 718만 627명으로서 총인구 3744만 8836명의 19.1%이고,
천주교인을 합하면
1980년 850만 1920명으로서 총인구의 22.6%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의도에 있는 모교회 교인 숫자가 81년 7월 현재 18만 8232명이고 제직은 13,204명인 바, 1년에 4만명씩 증가하고 있으며 따라서 지금은 20만이 넘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기독교인이 이렇게 많아지면,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기독교인이 이렇게 많아지면 우리 사회가 좀 더 깨끗해져야 하고 환해져야 할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최근 잇달아 신문 지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많은 사건들을 보면서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고 과연 그 숱한 사건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일들이 나와 직접적으로는 상관없는 일이고, 내 책임도 아니고 피해되는 일도 없기에 무관심해 버릴 수 있는 일들인가요?
기독교인 수는 많아졌는데, 경제는 발전했다고 하는데 사람들의 마음 속에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그렇게도 끔찍하고, 살벌하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묻게 됩니다. 속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질문을 간직하고, 우리의 현실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면서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무어라고 말하는지 찾아보게 됩니다.
일찍이 가나안을 정복한 이스라엘 민족은 주변 민족과 대립하면서 점차 세력을 키워 드디어는 다윗과 솔로몬의 영광의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이스라엘은 기원전 922년 남쪽 유다 왕국과 북쪽 이스라엘 왕국으로 분단되는 아픔을 겪게 되었고, 남북은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평화를 유지하면서 제각기 살 길을 찾아야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던 당시 세계를 지배했던 나라는 바로 앗시리아였습니다. 세계 제국 앗시리아가 강성해지면 이스라엘과 유다는 당장 위협을 느끼고 앗시리아가 좀 약해지면 두 나라는 한숨을 돌리고 자기들 나름의 군사적 성장과 경제적 번영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기원전 722년에 북왕국이 멸망당하고, 남왕국은 앗시리아의 속국이 되고 말았으며, 그나마 586년 몇 차례의 반란 끝에 앗시리아의 뒤를 이은 신흥국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비참한 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민족은 남북 분단 이후, 수백년동안 끊임없이 전쟁과 전쟁의 소문이 꽉 찬 시대를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다른 민족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선민사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네들을 특별히 선택하셨고, 복을 주신다는 특권을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자기네들은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주의 날” 이 오면 자기네들에게 빛이 비추어져서 번영과 독립, 그리고 원수들에 대한 승리를 거둘 것이며, 원수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진노의 불길을 내리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빛대신 어둠이 닥쳐왔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을 허락하였는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살게하고, 또 다윗과 솔로몬의 영도하에 안전한 터전을 마련케 한 일들은 다만 그들이 가장 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순간에 그들을 버리려는 목적에서 였을까?
과연 하나님이 계시다면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이것이 바로 역사적 위기 속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는가?
계약은 깨어져 버린 것인가?
바로 이러한 시대에 역사를 진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바로 예언자들입니다. 예언자란 하나님의 대변자로, 즉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는 전령자로 사명을 받은 자를 말합니다.
구약에 의하면 이미 사울 시대부터 예언자가 있었으나, 진정한 의미에서 첫번째 예언자는 8세기 중엽에 나타난 아모스이며, 그 이후 호세아, 이사야, 미가. 스바냐, 예레미야, 나훔, 하박국, 에스겔 등 많은 예언자들이 활동합니다.
그런데 예언자란 점괘를 들여다 보고 점을 치는 점장이가 아니고 오직 자기들이 겪고 있는 사건들의 의미를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시대에로 들어가 보아야 합니다.
과연 어떤 시대였던가요?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이 그토록 고통을 겪어야 했던가요?
“저들이 나를 버렸도다.” 이 말은 바로 예레미야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선포한 말입니다. 이 말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관계가 나타나 있으며, 아울러 그 계약이 깨졌음을 보여 줍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가요?
예언자들은 무엇을 보고 이 말을 할 수 있었던가요?
첫째, 예언자들은 당시 사회에 횡횡했던 불의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아모스서에 의하면 그 때 부자는 가난한 자들을 “신 한 켤레”값으로 사고 팔았으며, 부유한 지주들은 소작인들의 곡식을 강제로 빼앗아가고, 의지할 곳 없는 고아와 과부들의 권리를 유린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특히 기원전 8세기에 극심하였는데 그 때 북왕국에서는 아모스와 호세아가, 남왕국에서는 미가와 이사야가 각각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 북쪽은 여로보암2세가 남쪽은 웃시야가 다스리면서 40여년간 번영을 누리던 시대였습니다
앗시리아가 잠잠하고 애굽이 쇠퇴한 덕으로 남북왕국의 백성들은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고 훌륭한 사회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빈부의 차가 심하고 권력과 착취가 횡행한 시대였습니다. 경제적 부를 이루는 것이 인생의 최대목표였으며, 돈이 곧 가치의 척도였습니다.
예언자들은 여기에서 인간이 교만과 자부심을 가지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는 잘 살게 되었는지 모르나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을 때, 즉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깨졌을 때, 인간은 인간 상호간의 관계도 끊어지고, 이웃과의 관계도 끊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했던 것입니다.
호세아 4:1-3에 보면 “이 땅에는 사랑하는 자도, 신실한 자도 없고, 이 하나님을 알아주는 자 또한 없어 맹세하고도 지키지 않고, 살인과 강도질은 꼬리를 몰고 가는데마다 간음과 강간이요, 유혈 참극이 그치지 않는다.”고 냉엄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둘째, 예언자들이 지적한 죄악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타락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농경생활을 하고 있던 가나안 원주민들의 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바알신 숭배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바알 신은 자연의 소생력을 신격화한 가나안 사람들의 자연 종교의 하나였으니 이 마술 종교의 기본적 가설은 인간이 적절한 종교의식을 행함으로써 그의 가정과 가축과 땅을 보다 더 윤택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는 엄밀한 의미에서 불안하고 확실치 못한 삶의 환경에서 안전과 번영과 복리를 얻으려는 인간의 노력을 나타내는 것이지 올바른 신앙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시내산의 신앙을 가나안의 토착 종교와 혼동하게 되면서 마침내 야훼와 바알이라는 말을 동의어로 쓰게까지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외관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은 매우 종교적입니다. 정해진 희생제물을 드리는 일이나, 큰 절기들을 지키는 일, 또 옛 성지들을 순례하는 일에 있어서 그들은 열심을 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제사를, 희생제물을 역겨워하신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예언자 아모스는 5:21-23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의 순례절이 싫어 나는 얼굴을 돌린다.
축제때마다 바치는 분향제 냄새가 역겹구나.
너희가 바치는 번제물과 곡식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친교제물로 바치는 살찐 제물은 보기도 싫다.
거들떠보기도 싫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그들의 예배가 근본적으로 우상 숭배의 성질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들에게 복주는 기계로, 자기들의 재산과 지위를 정당화시켜 주는 수단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며, 따라서 그 당시 예배 의식은 인간의 자기 만족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참된 예배는 진정한 회개와 전심전력의, 즉 몸과 마음을 다바쳐 하나님을 향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호세아가 준엄하게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희생의 제물보다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욱 기뻐하고 사랑을 더욱 반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어떤가요?
셋째, 예언자들이 지적한 죄악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들의 힘을 믿거나 또는 주변 강대국에 의존하여 안전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애굽의 억압에서 해방시켜 주셨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주셨고, 이민족으로부터 보호하여 주셨음을 너무나 쉽게 잊어 먹었습니다.
나라가 안정되고 발전하면 자기들이 잘나서 그렇게 된 줄로 생각했고, 어려움에 빠지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주변의 강대국들의 군사력을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 모든 국가, 세계의 주인이심을 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언자 이사야는 30장 15절에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주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마음을 돌려 진정하는 것이 구원받는 길이다.
고요히 믿고 의지하는 것이 힘을 얻는 길이다.”
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그것을 거절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말을 타고 도망가겠습니다. 날랜 말을 타고 도망가겠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가요?
예언자들은 이와 같이 이스라엘이 지은 죄를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겉으로 나타나는 증상만을 지적하는데 그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난 죄악의 근원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이 있었음을 간파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민족은 특별히 선택받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없이 또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이제 앞에서 했던 질문을 다시 한번 해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셨는가?
계약은 깨어져 버린 것인가?
하나님은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계약을 깨뜨린 것은 바로 우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배반한 자식들아, 돌아오너라.
너희의 마음을 바로잡아 나를 배반하지 않게 하여 주리라.“
그렇기에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역사적 위기는 바로 회개할 수 있는 은총의 때인 것입니다.
예언자들이 활동하던 때로부터 몇백년 후 어두움과 질병이 가득찬 유대땅에 예수가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한평생 사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를 잡아다가 때리고 가시관을 씌우고는 십자가를 지워 사형장으로 끌고 갔습니다. 눅 23:27-28에 보면 이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뒤따랐고 그 중에는 예수를 보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자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예수께서는 그 여자들을 돌아보시며 “예루살렘의 여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를 위하여 울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를 향하여 회개하라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호소하시는 말씀이 아닐까요? 죄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없이,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우리 민족을 위해 울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비참하게, 이유없이 죽어간 우리 동족들에게서 오늘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죽어가신 예수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역사적 위기 속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없이,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온 죄를 고백하면서, 앞으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살겠다고 다짐하는 회개의 때, 아니 그렇기에 바로 은총의 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품에 품어주고, 구원하기 위하여 두 팔을 벌리신 채 지금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와 너, 우리, 우리 민족, 온 인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배반한 한국민들아, 돌아오라.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한국민들아, 나에게 돌아오라.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있는 나에게 돌아오라."
렘 3:18-25 / 1982. 6. 13
예레미야서 3:22을 다시 읽겠습니다.
"배반한 자식들아, 돌아오너라.
너희의 마음을 바로 잡아 나를 배반하지 않게 하여 주리라."
문화공보부의 공식 통계에 의하면 기독교인 수가
1970년 323만 5475명
1980년 718만 627명으로서 총인구 3744만 8836명의 19.1%이고,
천주교인을 합하면
1980년 850만 1920명으로서 총인구의 22.6%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의도에 있는 모교회 교인 숫자가 81년 7월 현재 18만 8232명이고 제직은 13,204명인 바, 1년에 4만명씩 증가하고 있으며 따라서 지금은 20만이 넘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기독교인이 이렇게 많아지면,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기독교인이 이렇게 많아지면 우리 사회가 좀 더 깨끗해져야 하고 환해져야 할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최근 잇달아 신문 지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많은 사건들을 보면서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고 과연 그 숱한 사건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일들이 나와 직접적으로는 상관없는 일이고, 내 책임도 아니고 피해되는 일도 없기에 무관심해 버릴 수 있는 일들인가요?
기독교인 수는 많아졌는데, 경제는 발전했다고 하는데 사람들의 마음 속에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그렇게도 끔찍하고, 살벌하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묻게 됩니다. 속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질문을 간직하고, 우리의 현실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면서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무어라고 말하는지 찾아보게 됩니다.
일찍이 가나안을 정복한 이스라엘 민족은 주변 민족과 대립하면서 점차 세력을 키워 드디어는 다윗과 솔로몬의 영광의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이스라엘은 기원전 922년 남쪽 유다 왕국과 북쪽 이스라엘 왕국으로 분단되는 아픔을 겪게 되었고, 남북은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평화를 유지하면서 제각기 살 길을 찾아야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던 당시 세계를 지배했던 나라는 바로 앗시리아였습니다. 세계 제국 앗시리아가 강성해지면 이스라엘과 유다는 당장 위협을 느끼고 앗시리아가 좀 약해지면 두 나라는 한숨을 돌리고 자기들 나름의 군사적 성장과 경제적 번영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기원전 722년에 북왕국이 멸망당하고, 남왕국은 앗시리아의 속국이 되고 말았으며, 그나마 586년 몇 차례의 반란 끝에 앗시리아의 뒤를 이은 신흥국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비참한 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민족은 남북 분단 이후, 수백년동안 끊임없이 전쟁과 전쟁의 소문이 꽉 찬 시대를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다른 민족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선민사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네들을 특별히 선택하셨고, 복을 주신다는 특권을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자기네들은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주의 날” 이 오면 자기네들에게 빛이 비추어져서 번영과 독립, 그리고 원수들에 대한 승리를 거둘 것이며, 원수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진노의 불길을 내리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빛대신 어둠이 닥쳐왔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을 허락하였는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살게하고, 또 다윗과 솔로몬의 영도하에 안전한 터전을 마련케 한 일들은 다만 그들이 가장 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순간에 그들을 버리려는 목적에서 였을까?
과연 하나님이 계시다면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이것이 바로 역사적 위기 속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는가?
계약은 깨어져 버린 것인가?
바로 이러한 시대에 역사를 진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바로 예언자들입니다. 예언자란 하나님의 대변자로, 즉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는 전령자로 사명을 받은 자를 말합니다.
구약에 의하면 이미 사울 시대부터 예언자가 있었으나, 진정한 의미에서 첫번째 예언자는 8세기 중엽에 나타난 아모스이며, 그 이후 호세아, 이사야, 미가. 스바냐, 예레미야, 나훔, 하박국, 에스겔 등 많은 예언자들이 활동합니다.
그런데 예언자란 점괘를 들여다 보고 점을 치는 점장이가 아니고 오직 자기들이 겪고 있는 사건들의 의미를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시대에로 들어가 보아야 합니다.
과연 어떤 시대였던가요?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이 그토록 고통을 겪어야 했던가요?
“저들이 나를 버렸도다.” 이 말은 바로 예레미야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선포한 말입니다. 이 말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관계가 나타나 있으며, 아울러 그 계약이 깨졌음을 보여 줍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가요?
예언자들은 무엇을 보고 이 말을 할 수 있었던가요?
첫째, 예언자들은 당시 사회에 횡횡했던 불의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아모스서에 의하면 그 때 부자는 가난한 자들을 “신 한 켤레”값으로 사고 팔았으며, 부유한 지주들은 소작인들의 곡식을 강제로 빼앗아가고, 의지할 곳 없는 고아와 과부들의 권리를 유린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특히 기원전 8세기에 극심하였는데 그 때 북왕국에서는 아모스와 호세아가, 남왕국에서는 미가와 이사야가 각각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 북쪽은 여로보암2세가 남쪽은 웃시야가 다스리면서 40여년간 번영을 누리던 시대였습니다
앗시리아가 잠잠하고 애굽이 쇠퇴한 덕으로 남북왕국의 백성들은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고 훌륭한 사회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빈부의 차가 심하고 권력과 착취가 횡행한 시대였습니다. 경제적 부를 이루는 것이 인생의 최대목표였으며, 돈이 곧 가치의 척도였습니다.
예언자들은 여기에서 인간이 교만과 자부심을 가지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는 잘 살게 되었는지 모르나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을 때, 즉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깨졌을 때, 인간은 인간 상호간의 관계도 끊어지고, 이웃과의 관계도 끊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했던 것입니다.
호세아 4:1-3에 보면 “이 땅에는 사랑하는 자도, 신실한 자도 없고, 이 하나님을 알아주는 자 또한 없어 맹세하고도 지키지 않고, 살인과 강도질은 꼬리를 몰고 가는데마다 간음과 강간이요, 유혈 참극이 그치지 않는다.”고 냉엄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둘째, 예언자들이 지적한 죄악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타락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농경생활을 하고 있던 가나안 원주민들의 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바알신 숭배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바알 신은 자연의 소생력을 신격화한 가나안 사람들의 자연 종교의 하나였으니 이 마술 종교의 기본적 가설은 인간이 적절한 종교의식을 행함으로써 그의 가정과 가축과 땅을 보다 더 윤택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는 엄밀한 의미에서 불안하고 확실치 못한 삶의 환경에서 안전과 번영과 복리를 얻으려는 인간의 노력을 나타내는 것이지 올바른 신앙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시내산의 신앙을 가나안의 토착 종교와 혼동하게 되면서 마침내 야훼와 바알이라는 말을 동의어로 쓰게까지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외관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은 매우 종교적입니다. 정해진 희생제물을 드리는 일이나, 큰 절기들을 지키는 일, 또 옛 성지들을 순례하는 일에 있어서 그들은 열심을 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제사를, 희생제물을 역겨워하신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예언자 아모스는 5:21-23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의 순례절이 싫어 나는 얼굴을 돌린다.
축제때마다 바치는 분향제 냄새가 역겹구나.
너희가 바치는 번제물과 곡식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친교제물로 바치는 살찐 제물은 보기도 싫다.
거들떠보기도 싫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그들의 예배가 근본적으로 우상 숭배의 성질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들에게 복주는 기계로, 자기들의 재산과 지위를 정당화시켜 주는 수단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며, 따라서 그 당시 예배 의식은 인간의 자기 만족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참된 예배는 진정한 회개와 전심전력의, 즉 몸과 마음을 다바쳐 하나님을 향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호세아가 준엄하게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희생의 제물보다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욱 기뻐하고 사랑을 더욱 반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어떤가요?
셋째, 예언자들이 지적한 죄악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들의 힘을 믿거나 또는 주변 강대국에 의존하여 안전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애굽의 억압에서 해방시켜 주셨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주셨고, 이민족으로부터 보호하여 주셨음을 너무나 쉽게 잊어 먹었습니다.
나라가 안정되고 발전하면 자기들이 잘나서 그렇게 된 줄로 생각했고, 어려움에 빠지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주변의 강대국들의 군사력을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 모든 국가, 세계의 주인이심을 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언자 이사야는 30장 15절에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주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마음을 돌려 진정하는 것이 구원받는 길이다.
고요히 믿고 의지하는 것이 힘을 얻는 길이다.”
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그것을 거절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말을 타고 도망가겠습니다. 날랜 말을 타고 도망가겠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가요?
예언자들은 이와 같이 이스라엘이 지은 죄를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겉으로 나타나는 증상만을 지적하는데 그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난 죄악의 근원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이 있었음을 간파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민족은 특별히 선택받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없이 또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이제 앞에서 했던 질문을 다시 한번 해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셨는가?
계약은 깨어져 버린 것인가?
하나님은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계약을 깨뜨린 것은 바로 우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배반한 자식들아, 돌아오너라.
너희의 마음을 바로잡아 나를 배반하지 않게 하여 주리라.“
그렇기에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역사적 위기는 바로 회개할 수 있는 은총의 때인 것입니다.
예언자들이 활동하던 때로부터 몇백년 후 어두움과 질병이 가득찬 유대땅에 예수가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한평생 사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를 잡아다가 때리고 가시관을 씌우고는 십자가를 지워 사형장으로 끌고 갔습니다. 눅 23:27-28에 보면 이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뒤따랐고 그 중에는 예수를 보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자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예수께서는 그 여자들을 돌아보시며 “예루살렘의 여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를 위하여 울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를 향하여 회개하라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호소하시는 말씀이 아닐까요? 죄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없이,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우리 민족을 위해 울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비참하게, 이유없이 죽어간 우리 동족들에게서 오늘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죽어가신 예수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역사적 위기 속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없이,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온 죄를 고백하면서, 앞으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살겠다고 다짐하는 회개의 때, 아니 그렇기에 바로 은총의 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품에 품어주고, 구원하기 위하여 두 팔을 벌리신 채 지금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와 너, 우리, 우리 민족, 온 인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배반한 한국민들아, 돌아오라.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한국민들아, 나에게 돌아오라.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있는 나에게 돌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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