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믿음, 죽은 믿음(2011.10.9)
본문) 야고보서 2:14-26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너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행함이 있다. 행함이 없는 너의 믿음을 나에게 보여라. 그리하면 나는 행함으로 나의 믿음을 너에게 보이겠다.’ 그대는 하나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도 그렇게 믿고 떱니다. 아,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싶습니까?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고서 행함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대가 보는 대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작용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아브라함의 의로움으로 여기셨다’고 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고, 또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사람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지,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창녀 라합도 정탐꾼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내보내서, 행함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여러분!
혹 어려서 교회 다니시면서 이런 노래를 불렀던 기억들이 있으시지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요.
그중의 하나 키가 크고요 나머지는 작대요.“
그렇다면 재미있는 퀴즈 하나, 과연 아브라함의 아들은 몇 명인가요? 일곱 명이 맞나요? 아마도 여러분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은 둘이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본부인인 사라에게서 낳은 아들이 이삭이고, 그전에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되기 전에 종이었던 하갈에서서 낳은 아들이 있었으니 이스마엘입니다. 그밖에 또 있나요? 창세기 25장에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다시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그의 이름은 그두라이다. 그와 아브라함 사이에서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가 태어났다. 욕산은 스바와 드단을 낳았다. 드단의 자손에게서 앗수르 사람과 르두시 사람과 르움미 사람이 갈라져 나왔다. 미디안의 아들은 에바와 에벨과 하녹과 아비다와 엘다아인데, 이들은 모두 그두라의 자손이다. 아브라함은 자기 재산을 모두 이삭에게 물려주고, 첩들에게서 얻은 아들들에게도 한 몫씩 나누어 주었는데, 그가 죽기 전에 첩들에게서 얻은 아들들을 동쪽 곧 동방 땅으로 보내어서, 자기 아들 이삭과 떨어져서 살게 하였다.” (창세기 25:1-6)
역대지상 1장 32절에 의하면 분명히
“아브라함의 첩 그두라가 낳은 아들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이다”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브라함의 아들은 모두 합해서 여덟 명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노래 가사를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요.....”
어쨌든 그 아브라함이 갖고 있는 영광스러운 칭호가 있으니 바로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부른 그 노래에서도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있고, 이 사실을 부인하거니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그렇고 기독교인들도 그렇고 다 그렇게 부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창세기 15장에 그 기원이 나와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난 뒤에,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 아브람이 여쭈었다.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자식이 아직 없습니다. 저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식이라고는 다마스쿠스 녀석 엘리에셀뿐입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으니, 이제, 저의 집에 있는 이 종이 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아브람이 이렇게 말씀드리니,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 아이는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주님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리고는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창세기 15:1-6)
그렇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자, 도대체 아브라함이 무엇을 믿었단 말입니까? 아브라함이 자식도 없는데, 아브라함의 자손이 저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바로 그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이지도 않는데, 도무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인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그것을 믿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다 끝난 것입니까? 아브라함이 주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면 이제 다 된 것입니까? 도대체 그 믿음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단 말입니까? 물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니까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믿음이 얼마나 있는지, 그것이 완전한지 아닌지 아실 수 있겠지요. 그러나 사람인 우리들이 보아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좋은지 나쁜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믿는다”는 것이 마음속에 있는 것일진대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낼 방법이 있는 것입니까? 나타나는 것이 없는데 무조건 누군가의 믿음이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바로 여기에서 야고보 장로는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말한다고 해도 그 믿음을 행함으로 나타내지 않으면 그 믿음은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라고 야고보 장로는 주장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장로는 모든 사람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인정하는 아브라함마저도 그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났기에 완전하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고서 행함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대가 보는 대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작용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아브라함의 의로움으로 여기셨다’고 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고, 또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렀습니다.” (야고보서 2:21-23)
그러니까 야고보 장로의 주장은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자기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행함으로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믿음이 있었지만 그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났기에 완전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창세기 22장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나이 백 살에 낳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에게 장작을 지우고, 모리아 땅에 있는 산 위에 올라갔습니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묶고 칼로 내리치려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때에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예, 여기 있습니다.’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 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 아브라함이 고개를 들고 살펴보니, 수풀 속에 숫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다. 가서 그 숫양을 잡아다가, 아들 대신에 그것으로 번제를 드렸다. 이런 일이 있었으므로, 아브라함이 그곳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주님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는 말을 한다.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불러서,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친히 맹세한다. 네가 이렇게 너의 아들까지,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내가 반드시 너에게 큰 복을 주며, 너의 자손이 크게 불어나서,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하겠다. 너의 자손은 원수의 성을 차지할 것이다. 네가 나에게 복종하였으니,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자손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 돌아왔다. 그들은 브엘세바 쪽으로 길을 떠났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살았다.“
(창세기 22:11-19)
그렇습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야 하며, 행함으로 완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도 행함으로 완전해졌고, 그 결과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렀고,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을 친구라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주님께서는 전에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을 주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길이 주신 분이 아니십니까?”
(역대지하 20:7)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선택한 야곱아,
나의 친구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데리고 왔으며,
세상의 가장 먼 곳으로부터 너를 불러냈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말하였다.
너는 나의 종이니,
내가 너를 선택하였고,
버리지 않았다고 하였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니,
떨지 말아라.“ (이사야서 41:8-10)
그렇습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나타내는 행함은 어떤 것입니까? 믿음을 나타내는 행함이란 어떤 행함을 말하는 것입니까? 단순히 예배 열심히 참석하고, 기도 많이 하면 되는 것입니까? 물론 그것도 믿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마는 야고보 장로는 오늘의 본문에서 분명히 밝혀줍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보십시오. 내 주위에 그 날 먹을 것조차 없고, 입을 옷이 없어서 추위에 떠는 사람이 있는데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말로만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 돈 한 푼 주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찌 믿음의 행위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믿음을 행함으로 나타내야 산 믿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나타내는 행함이란 바로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향한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가 따르는 것입니다. 먹을 것 주고, 입을 것 주는 구체적인 행위 말입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를 잠언 기자는 곳곳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너의 손에 선을 행할 힘이 있거든,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
주저하지 말고 선을 행하여라.
네가 가진 것이 있으면서도,
너의 이웃에게
‘갔다가 다시 오시오. 내일 주겠소’ 말하지 말아라.“ (잠언 3:27-28)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지만,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공경하는 것이다.“ (잠언 14:31)
“가난한 사람을 조롱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다.“ (잠언 17:5)
누군가가 가난하다고 해서 그를 조롱하고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조롱하고 억압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런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19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주님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주님께서 그 선행을 넉넉하게 갚아주신다.“ (잠언 19:17)
그렇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고 조롱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요,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을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으로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넉넉하게 갚아 주시마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 너무나 잘 아시는 최후의 심판의 비유를 굳이 읽을 필요가 없겠지요.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사람들을 양과 염소로 나누고 한쪽 편에 있는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고, 다른 쪽에 있는 사람들은 지옥에 들어가게 하시지요. 그런데 그때 그 기준이 된 것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주님께서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고, 아플 때 치료해 주고, 감옥에 들어갔을 때 돌보아 주지요. 우리가 언제 그랬느냐고 물었을 때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지옥에 간 사람들은 바로 그것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으로 갔으니 그것이 바로 심판의 기준이었던 것입니다.
끝으로 카라비아스라는 사람이 쓴 “구원은 사랑”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글을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성서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단죄한다.
누구나 손수 노동해서 먹고 살 의무가 있다.
그 누구도 재물을 축적할 권리가 없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할 권리가 없다.
축적과 독점, 억압과 착취는 모든 사람과 모든 나라가 한 혈육, 한 형제자매로 살아야 한다는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타인을 불행하게 함으로써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아직도 세상에는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부유하게 살면서 타인과 타국을 착취하는 것을 자기의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과 나라들이 있다.
하나님은 지구를 모든 사람과 모든 나라를 위해 만드셨다.
하늘과 땅,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가진 능력과 생명의 주인도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 관리자일 따름이다.
우리는 자연자원과 과학기술을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 사용할 의무가 있다.
극소수 사람들과 나라들이 사치를 구가하고 있는 동안 절대다수 사람들과 나라들이 굶주리고 영양실조로 병들어 죽어가는 상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상태다.
재산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과 나라들의 정의는 가난한 사람들과 나라들을 죽이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소위 신성불가침의 ‘제한 없는 사유재산권’이 날마다 그리고 해마다 무수한 사람들을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죽어가게 하고 있으며 침략과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
그들은 더 이상 우리를 속일 수 없다.
하나님의 정의와 부자들 및 부유한 나라들의 정의는 전혀 딴판이다.
사회에서 존경할 만한 사람들로 불리는 사람들과 나라들이 하나님의 눈에는 도둑으로 보인다.“(설교자 노트에서 재인용함)
여러분, 산 믿음 죽은 믿음 그것은 아주 분명합니다. 배고프고 헐벗은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도와주면 산 믿음을 가진 것이요, 입으로만 도와주면 죽은 믿음입니다. 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고, 죽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지옥에 들어갈 것입니다. 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천국이요, 죽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 사는 세상은 아무리 큰 교회요, 큰 집이라도 거기는 지옥입니다. 우리 모두 산 믿음, 죽은 믿음 잘 구분해서 산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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