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경건의 삶(2011. 9. 18)
본문) 야고보서 1:26-27
“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혀를 다스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신앙은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제가 여러분에게 야고보서를 갖고 강해설교를 한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두 번을 했는데 솔직히 말씀드려서 준비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제가 네 복음서를 갖고 10년 넘게 걸려 강해설교를 했고, 그 원고를 전부 다 홈페이지와 블로그 등에 올려 놓았습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갖고 강해설교를 할 때는 그 흐름을 읽어나갈 수 있었고, 또 다른 복음서들과 비교하면서 그 뜫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서를 갖고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되지를 않았습니다. 야고보서가 어떤 일정한 흐름을 갖고 쓰여진 것 같지 않고, 또 비슷한 책들이 있어서 비교할 것도 없고 그래서 제 실력으로는 강해설교를 다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할 수 있는 부분만 하기로 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참된 경건의 삶이 무엇인가를 묻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뭔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사는 것이고, 그것을 나타내는 가장 좋은 표현, 알맞은 표현이 ‘경건하게 사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터인데 그렇다면 경건의 삶이란 도대체 어떤 삶인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야고보서 저자는 먼저 말합니다.
“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혀를 다스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신앙은 헛된 것입니다.”
‘경건’이라는 단어는 기독교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어일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거룩하게 사는 것”이라는 뜻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런 당연히 교회에 열심히 나가고, 예배시간에도 전혀 빠지지 않고, 헌금도 많이 내고, 남들 보기에도 거룩하게 살아가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자기 스스로를 경건하다고 판단하면서도 혀를 다스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신앙은 헛된 것이라고 야고보서 저자는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스스로 자기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경건을 드러내는 사람이 사실은 겉과 속이 너무나 다르고, 또 다른 사람을 향해 함부로 너는 경건하지 못하다고 말하며 잘난 척, 신앙 좋은 척 하는 사람들의 신앙은 헛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척, 경건한 척 온갖 멋진 폼은 다 잡지만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는 함부로 말하면서 사실은 그 마음속에 진정 있어야 할 것을 지니지 못했다면 그의 신앙은 헛된 것이요, 거짓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 즉 참된 경건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지녀할 경건의 삶이란 어떤 것입니까? 야고보서 저자는 아주 분명히 말합니다. 오늘의 본문 27절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거룩한 척, 깨끗한 척 폼을 잡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인들이 흔히 생각하는바 경건의 의미와 아고보서 저자가 말하는 경건의 의미는 너무나 다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것은 공연히 야고보서 저자 혼자만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러한 경건을 얼마나 원하시는지는 성경에 너무나 많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앞에 나아와 제사 지내고, 금식하면서 스스로 경건한 척 위선을 떠는 사람들을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참으로 많은 곳에서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참된 경건의 삶을 얼마나 원하시는지도 여러 곳에서 밝히셨습니다. 오늘도 구약에서 몇 군데 찾아 읽어보겠습니다.
먼저 이사야서 1장의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아라.
다 쓸모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아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나는 정말로 너희의 초하루 행사와 정한 절기들이 싫다.
그것들은 오히려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너희는 씻어라.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 “ (이사야서 1:11-17)
자, 보십시오. 경건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많은 제물을 바치고, 절기란 절기는 다 지킵니다. 안식일도 거룩하게 지키고, 기도도 아주 많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싫다는 것입니다. 너희들 손에 피가 가득한데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있느냐는 것입니다. 악한 일을 그치고 정의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억압받는 사람들, 대표적으로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야고보 장로가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사야서 58장에서는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 ‘목소리를 크게 내어 힘껏 외쳐라.
주저하지 말아라.
너의 목소리를 나팔 소리처럼 높여서
나의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알리고,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려라.
그들이 마치 공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않는 민족이나 되듯이,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을 알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무엇이 공의로운 판단인가를 나에게 묻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기를 즐거워한다고 한다.‘
주님께서 보시지도 않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금식을 합니까?
주님께서 알아주시지도 않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고행을 하겠습니까?
너희들이 금식하는 날,
너희 자신의 향락만을 찾고,
일꾼들에게는 무리하게 일을 시킨다.
너희가 다투고 싸우면서,
금식을 하는구나.
이렇게 못된 주먹질이나 하려고 금식을 하느냐?
너희의 목소리를
저 높은 곳에 들리게 할 생각이 있다면,
오늘과 같은 이런 금식을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겠느냐?
이것이 어찌 사람이 통회하며 괴로워하는 날이 되겠느냐?‘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는다고 해서
어찌 이것을 금식이라고 하겠으며,
주님께서 너희를 기쁘게 반기실 날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햇살처럼 비칠 것이며,
네 상처가 빨리 나을 것이다.“ (이사야서 58:1-8)
그 옛날 유대인들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살면서 행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금식이지요. 그런데 그들이 금식한다고 하면서 금식기간에 싸우기도 하고, 주먹질도 하고, 자기 자신의 향락만을 찾고, 일꾼들을 무리하게 일을 시키면서 나는 금식한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큰소리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찌 그런 금식을 좋아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이것입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사야뿐만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도 이렇게 선포합니다. 7장을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주님의 성전 문에 서서, 주님께 예배하려고 문으로 들어오는 모든 유다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을 큰소리로 일러주라고 하셨다.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너희의 모든 생활과 행실을 고쳐라. 그러면 내가 이곳에서 너희와 함께 머물러 살겠다. ‘이것이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 하고 속이는 말을, 너희는 의지하지 말아라. 너희가, 모든 생활과 행실을 참으로 바르게 고치고, 참으로 이웃끼리 서로 정직하게 살면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지 않고, 이곳에서 죄 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겨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으면, 내가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 하도록 준 이 땅, 바로 이곳에서 너희가 머물러 살도록 하겠다.
그런데도 너희는 지금 전혀 무익한 거짓말을 의지하고 있다. 너희는 모두 도둑질을 하고, 사람을 죽이고, 음행을 하고, 거짓으로 맹세를 하고, 바알에게 분향을 하고,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섬긴다. 너희는 이처럼 내가 미워하는 일만 저지르고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으로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우리는 안전하다’ 하고 말한다. 너희는 그런 역겨운 모든 일들을 또 되풀이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다. 그래,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이, 너희의 눈에는 도둑들이 숨는 곳으로 보이느냐? 여기에서 벌어진 온갖 악을 나도 똑똑히 다 보았다. 나 주의 말이다.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두었던 실로에 있는 내 처소로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에 내가 그곳을 어떻게 하였는지 보아라.
너희가 온갖 죄를 지었으므로, 내가 너희에게 서둘러서 경고하였으나, 너희는 듣지 않았다. 내가 불렀으나, 너희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 주의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서 한 것과 똑같이, 내 이름으로 불리며 너희가 의지하는 이 성전, 곧 내가 너희와 너희 조상에게 준 이 장소에서, 내가 똑같이 하겠다. 내가 너희의 모든 친척 곧 에브라임 자손 모두를 내 앞에서 쫓아 버렸던 것과 똑같이, 너희도 내 앞에서 멀리 쫓아 버리겠다.“ 』
(예레미야서 7:1-15)
무슨 말입니까? 예레미야를 보내서 예배드리러 오는 사람들에게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여기가 성전이라고? 안전하다고?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의 말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삶을 고치지 않으면 멸망당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생활과 행실을 참으로 바르게 고치고, 참으로 이웃끼리 서로 정직하게 살면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죄 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말고, 다른 신들을 섬겨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아야 살아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온갖 못된 짓을 하면서 안전하다고? 너희는 다 도둑놈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북왕국 실로에 있던 성전을 하나님께서 무너뜨린 것처럼 예루살렘의 성전도 무너뜨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헛된 경건의 삶을 버리고 참된 경건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22장만 더 보겠습니다. 에스겔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유다 땅에 이렇게 말하여라. ‘유다 땅아, 너는 진노의 날에 더러움을 벗지 못한 땅이요, 비를 얻지 못한 땅이다. 그 가운데 있는 예언자들은 음모를 꾸미며, 마치 먹이를 뜯는 사자처럼 으르렁댄다. 그들이 생명을 죽이며, 그 안에 과부들이 많아지게 하였다. 이 땅의 제사장들은 나의 율법을 위반하고, 나의 거룩한 물건들을 더럽혔다. 그들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않으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구별하도록 깨우쳐 주지도 않으며, 나의 안식일에 대하여서는 아주 눈을 감아 버렸으므로, 나는 그들 가운데서 모욕을 당하였다. 그 가운데 있는 지도자들도 먹이를 뜯는 이리 떼와 같아서, 불의한 이득을 얻으려고 사람을 죽이고, 생명을 파멸시켰다. 그런데도 그 땅의 예언자들은 그들의 죄악을 회칠하여 덮어 주며, 속임수로 환상을 보았다고 하며, 그들에게 거짓으로 점을 쳐 주며, 내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나 주 하나님이 한 말이라고 하면서 전한다. 이 땅의 백성은, 폭력을 휘두르고 강탈을 일삼는다. 그들은 가난하고 못 사는 사람들을 압제하며 나그네를 부당하게 학대하였다. 나는 그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이 당을 지키려고 성벽을 쌓고, 무너진 성벽의 틈에 서서, 내가 이 땅을 멸망시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이 있는가 찾아보았으나, 나는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내 분노를 쏟아 부었고, 내 격노의 불길로 그들을 멸절시켰다. 나는 그들의 행실을 따라 그들의 머리 위에 갚아 주었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 』 (에스겔서 22:23-31)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다음에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해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것은 그곳의 정치지도자, 제사장과 예언자들, 그리고 백성들까지 모두 다 죄악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혹시나 한 사람이라도 용서받을 사람이 있나 찾았으나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격노의 불길로 심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도 참된 경건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자, 이제 다시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야고보서 저자는 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이란 세상 사람들과 같이 탐욕에 사로잡혀서 자기 잇속이나 차릴 줄 아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풀고 나누어주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참된 경건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루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께서 이렇게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누가복음 4:18-19)
여러분,
오늘날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수백 억, 수천 억 들여서 교회건물 짓는 것입니까? 목사님들 은퇴하면서 엄청난 돈을 받고 아파트 받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교회는 좀 더 가난해지면서 작은 교회,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국교회와 교인들이 살아야 할 참된 경건의 삶인 것입니다. 이것이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2011 년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1. 10. 9 / 산 믿음, 죽은 믿음 / 야고보서 2:14-26 (0) | 2015.04.06 |
---|---|
2011. 10. 2 /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 / 야고보서 2:1-13 (0) | 2015.04.06 |
2011. 9. 11 / 무엇을 자랑할까? / 야고보서 1:9-11, 예레미야서 9:23-24 (0) | 2015.04.06 |
2011. 9. 4 / 지혜를 구하라 / 야고보서 1:5-8, 잠언 2:1-9 (0) | 2015.04.06 |
2011. 8. 28 / 꿈이 이루어지다 / 사도행전 2:43-47 (0) | 2015.04.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