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년도

2011. 7. 10 / 너의 앞에 서겠다 / 출애굽기 17:1-7

람보 2 2015. 4. 6. 17:08

너의 앞에 서겠다(2011. 7. 10)

 

본문) 출애굽기 17:1-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은 신 광야를 떠나서, 주님의 명령대로 진을 옮겨 가면서 이동하였다. 그들은 르비딤에 진을 쳤는데, 거기에는 백성이 마실 물이 없었다. 백성이 모세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대들었다. 이에 모세가 ‘당신들은 어찌하여 나에게 대드십니까? 어찌하여 주님을 시험하십니까?’ 하고 책망하였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백성은 몹시 목이 말라서, 모세를 원망하며, 모세가 왜 그들을 이집트에서 데려왔느냐고, 그들과 그들의 자식들과 그들이 먹이는 집짐승들을 목말라 죽게 할 작정이냐고 하면서 대들었다.

모세가 주님께 부르짖었다. ‘이 백성을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은 지금이라도 곧 저를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이 백성보다 앞서서 가거라. 그리고 나일 강을 친 그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거라. 이제 내가 저기 호렙 산 바위 위에서 너의 앞에 서겠으니, 너는 그 바위를 쳐라. 그러면 거기에서 이 백성이 마실 물이 터져 나올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 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에서 주님께 대들었다고 해서, 사람들은 그곳의 이름을 므리바라고도 하고, 도 거기에서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 하면서 주님을 시험하였다고 해서, 그곳의 이름을 맛사라고도 한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430년,

참으로 긴 세월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시대를 거쳐 요셉에 이르렀을 때 그만 아브라함의 후손인 히브리인들이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갔었고, 거기서 살게 된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살았던 세월이 무려 430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당연히 잠시 기근만 피하고 먹고살 만해 지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려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어찌어찌 하다 보니 그만 한 해 두 해 지나고, 십년 이십년 지나고, 그러다 결국 430년의 세월이 흘러가고 만 것이지요.

 

430년이 아니라 400년이라구요? 출애굽기 12장에 분명히 밝혀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에서 산 기간은 사백삼십 년이었다. 마침내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바로 그 날, 주님의 모든 군대가 이집트 땅에서 나왔다. 그 날 밤에 주님께서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시려고 밤을 새우면서 지켜 주셨으므로, 그 밤은 ‘주님의 밤’이 되었고,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밤새워 지켜야 하는 밤이 되었다.” (출애굽기 12:40-42)

 

그렇다면 여러분이 상식처럼 알고 있는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 400년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요? 그것은 아마도 창세기 15장에 나오는 말씀들을 기억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해가 질 무렵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가운데, 깊은 어둠과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똑똑히 알고 있거라. 너의 자손이 다른 나라에서 나그네살이를 하다가, 마침내 종이 되어서, 사백 년 동안 괴로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의 자손을 종살이하게 한 그 나라를 내가 반드시 벌할 것이며, 그 다음에 너의 자손이 재물을 많이 가지고 나올 것이다. 그러나 너는 오래오래 살다가, 고이 잠들어 묻힐 것이다. 너의 자손은 사 대째가 되어서야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아모리 사람들의 죄가 아직 벌을 받을 만큼 이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창세기 15:12-16)

 

자, 어쨌든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살았던 그 430년의 세월이 어떤 세월이었습니까? 그들의 사는 형편이 어떠했습니까? 우리 민족이 일본의 식민지 생활을 했던 것이 35년인데,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맺은 때로부터 계산하면 정확히 40년인데 그것의 열 배가 되는 400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다면 그들이 생활이 얼마나 참담했을지 우리가 짐작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어쨌든 그들이 생활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한 마디로 출애굽기 2:23-25에 나와 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이집트의 왕이 죽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고된 일 때문에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고된 일 때문에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이르렀다. 하나님이 그들의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 자손의 종살이를 보시고,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셨다.” (출애굽기 2:23-25)

 

그렇습니다.

그들은 사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습니다.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탄식하며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미디안으로 도망가 있던 모세를 부르셔서 그를 어르고 달래신 끝에 마침내 그를 그의 형 아론과 함께 이집트 땅으로 데려오셨습니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을 히브리인들 즉 이스라엘 백성의 장로들을 만나게 하셨는데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믿었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모세와 아론은 이집트로 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불러 모았다. 아론이 주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그들에게 일러주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백성이 그들을 믿었다. 그들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굽어 살피시고 그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셨다는 말을 듣고, 엎드려 주님께 경배하였다.” (출애굽기 4:29-31)

 

자,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이 났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구원하시려고 모세를 보내셔서 기적을 행하셨다고 큰소리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기다린 보람이 있다고, 이제 이집트 놈들 가만 두지 않겠다고 으쓱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전제군주인 바로가 어떤 사람입니까? 바로가 그렇게 쉽게 굴복하겠습니까? 당시 천하를 지배하던 사람이 바로입니다. 엄청난 권력을 누리고 상상할 수 없는 부를 누리던 바로, 당시 세계를 지배할 만큼 막강한 군사력을 거느린 존재가 바로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바로가 그렇게 쉽게 말을 듣겠습니까?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나가게 해달라고,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겠다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콧방귀도 뀌지 않고 오히려 더 심하게 일을 시켰습니다.

 

“바로는 그 날로, 이스라엘 백성을 부리는 강제노동 감독관들과 작업반장들에게 명령하였다. ‘너희는 벽돌을 만드는 데 쓰는 짚을 더 이상 이전처럼 저 백성에게 대주지 말아라. 그들이 직접 가서 짚을 모아 오게 하여라. 그러나 벽돌 생산량은 이전과 같게 하여라. 만들어 내는 벽돌의 수가 줄어들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게을러서, 그들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가게 해 달라고 하면서 떠든다. 그들에게는 더 힘겨운 일을 시키고, 그 일만 하게 하여서 허튼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게 하여라.’ ” (출애굽기 5:6-9)

 

무슨 말인지 짐작하시겠지요? 한 마디로 일을 힘들게 시키지 않으니까 딴 생각을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딴 생각하지 못하게 더 힘든 일을 시키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14절에는 이렇게까지 나와 있습니다.

“바로의 강제노동 감독관들은 자기들이 뽑아서 세운 이스라엘 자손의 작업반장들을 때리면서 ‘너희는 어찌하여, 어제도 오늘도, 벽돌 만드는 작업에서 너희가 맡은 일을 전처럼 다 하

지 못하느냐?’ 하고 다그쳤다.” (출애굽기 5:14)

 

여러분, 여기는 그저 ‘때리면서’라고 나와 있지만 그것이 어찌 몇 대 쥐어박는 것 정도이겠습니까? 그야말로 쇳덩어리가 박힌 채찍으로 때리고 온몸에서 피가 나고 다치게 만드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오히려 매만 맞고 일만 힘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작업반장들이 모세와 아론을 만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바로 앞에서 나오다가, 자기들을 만나려고 서 있는 모세와 아론과 마주쳤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내려다보시고 벌을 내리시면 좋겠소. 당신들 때문에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우리를 미워하고 있소. 당신들은 그들의 손에 우리를 죽일 수 있는 칼을 쥐어 준 셈이오.’ ” (출애굽기 5:20-21)

 

너무나 답답해진 모세는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눈물 흘리며 기도합니다.

“주님,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이 백성에게 이렇게 괴로움을 겪게 하십니까? 정말, 왜 저를 이곳에 보내셨습니까? 제가 바로에게 가서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뒤로는, 그가 이 백성을 더욱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주님의 백성을 구하실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계십니다.” (출애굽기 5:22-23)

 

여러분!

출애굽기 6장 1-8절까지는 이렇게 눈물 흘려 기도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는 구구절절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당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또 그들을 어떻게 구해 내실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답답하게도 6장 9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와 같이 전하였으나, 그들은 무거운 노동에 지치고 기가 죽어서, 모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무슨 말입니까?

그들은 사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구원해 주신다고 말해도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더 이상 돌보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는 즉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란 누구나 이 상태에 이르면 그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습니다. 마음이 닫히면 귀가 닫히기에 누가 아무리 이치에 합당하고 올바르고 도움이 되는 소리를 해도 듣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때부터 그저 저하고 싶은 대로 하고 맙니다. 자포자기하고 되는 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설득하는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6장 14절부터 모세와 아론의 족보를 기록하며 마음을 추스린 성서저자는 7장에 넘어가서 곧바로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행하시는 것을 기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말이 필요없습니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모세와 아론을 불러 할 일을 시키셨습니다. 그것이 열 가지 재앙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은 열 가지 재앙을 행했고, 그 결정판이 유월절 장자의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자, 이제 마침내 지긋지긋한 노예생활에서 벗어났습니다. 마침내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그것도 빈손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금붙이며 은붙이 같이 돈 되는 것, 의복이나 가축 같은 필수품들도 분에 넘치게 갖고 나왔습니다. 이제 다 잘 되었고, 신이 났습니다. 역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광야에 접어들자마자 이상한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바로의 군대가 뒤쫓아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보니 멀리 지평선 서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는 이집트 군대가 쫓아오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부르짖었습니다.

 

“바로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고개를 들고 보니,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추격하여 오고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크게 두려워하며, 주님께 부르짖었다.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며 말하였다. ‘이집트에는 묘 자리가 없어서, 우리를 이 광야에다 끌어내어 죽이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내어, 여기서 이런 일을 당하게 하다니,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드십니까? 이집트에 있을 때에, 우리가 이미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광야에 나가서 죽는 것보다 이집트 사람을 섬기는 것이 더 나으니, 우리가 이집트 사람을 섬기게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모세가 백성에게 대답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가만히 서서, 주님께서 오늘 당신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지켜보기만 하십시오. 당신들이 오늘 보는 이 이집트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구하여 주시려고 싸우실 것이니, 당신들은 진정하십시오.’ ” (출애굽기 14:10-14)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노예생활에서 구해달라고 아우성이어서 구해줬더니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하는 말, 우리를 왜 데리고 왔느냐? 노예로 살도록 내버려두지. 물론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두 다 아실 것입니다. 무사히 홍해를 건너왔고, 이집트 군대는 바다에서 몰살했습니다. 이제는 진짜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5장에는 모세의 노래와 미리암의 노래가 실려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신나는 찬양 부르며 아무런 근심걱정 없이 약속의 땅으로 가는 일만 남은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원래 불평불만을 하려면 한도 끝도 없는 법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넌 후 맨 처음 들어간 곳이 수르 광야인데 그만 그곳에 먹을 물이 없었습니다. 사흘 동안 물을 찾지 못하다가 마라에 이르렀는데 마침내 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곧 “우리가 무엇을 마신단 말입니까?” 하고 불평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보여주셨고, 모세가 그 나뭇가지를 꺾어 물에 던지자 쓴물이 단물로 변했습니다. 이어서 16장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시는 장면이 나오고 이어서 마침내 오늘의 본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 광야를 떠나서 르비딤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도 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물이 없는 곳에 진을 쳤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물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련히 주시지 않겠느냐고 모세가 말했겠지요. 그런데도 물 달라고 난리를 치니까 모세가 하는 말, “당신들은 어찌하여 나에게 대드십니까? 어찌하여 주님을 시험하십니까?”

 

그러나 그들은 모세에게 덤벼들었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왜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왔느냐? 우리와 우리의 자식들과 우리가 먹이는 집짐승들을 목말라 죽게 할 작정이냐?”

모세는 다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이 백성을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은 지금이라도 곧 저를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합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이 백성보다 앞서서 가거라. 그리고 나일 강을 친 그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거라. 이제 내가 저기 호렙 산 바위 위에서 너의 앞에 서겠으니, 너는 그 바위를 쳐라. 그러면 거기에서 이 백성이 마실 물이 터져 나올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모세가 실행하였고, 그래서 물을 먹을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사건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결국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는가 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살려 주셨는데 조금만 지나고 나면,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모세만이 저 앞에 서 계신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다른 사람들도 다 볼 수 있었지만 그들은 보지 못했고, 모세만 앞에 서 계신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신앙이란 “너의 앞에 서겠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눈을 들어 앞을 보는 것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일이 너무나 힘들고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지만 그러나 바로 그때 내 앞에 서 계신, 그래서 생명의 물을 주기 위해 예비하고 계신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손으로 우리 앞에 놓인 어려움의 바위를 내리치면 바위가 변하여 샘물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너의 앞에 서겠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을 보는 것이고, 우리 앞에 놓여있는 어려움의 바위를 내려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앞에 바위 같은 어려움이 놓여있고,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을 정도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놓여있습니까? 눈을 들어 앞에 서 계신, 바위 위에 서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너의 앞에 서겠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용기를 내어 바위를 내리쳤던 모세처럼, 우리 앞에 놓인 바위를 내리칩시다. 그 옛날 모세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너의 앞에 서겠다” 라고 주님께서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