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년도

2010. 11. 14 / 전태일의 길, 예수의 길 / 마태복음 20:24-28

람보 2 2015. 4. 5. 20:53

전태일의 길, 예수의 길(2010.11.14)

 

본문) 마태복음 20:24-28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에게 분개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곁에 불러놓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 ”

(표준새번역 개정판)

 

 

드디어 끝났습니다. 지난 몇 달 동안 넓지 않은 이 땅을 온통 사로잡았던, 백성들을 들볶았던 행사가 마침내 끝났습니다. 그 행사는 이름하여 G20입니다. 정부는 G20만 성공적으로 끝나면 우리가 금방 선진국이 되고, 어떤 연구소는 G20의 경제적 효과가 420조 원이나 될 거라고 큰소리쳤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뻥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우리나라에 오는 각국 정상들에게 좋은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정부가 한 일들이 있습니다.

G20 기간에는 음식물 쓰레기를 내놓지 말자.

G20 기간에는 차량 2부제를 실시하고 대중교통 이용하자.

단, 대중교통을 이용하되 삼성역에는 전철이 서지 않는다.

G20 기간에는 노점상들은 들어가 있어라 등등.

 

어떤 젊은 친구가 강남에 나갔다가 불심검문을 당했답니다.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하기에 왜 그러냐 했더니 티셔츠에 영문글자가 써있고, 그것이 선전 문구 같으니까 수상한 사람이라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그의 티셔츠에는 이런 글자가 새겨져 있었답니다. ‘Unicef'(유니세프)

전국 방방곡곡에 행사 포스터가 붙었는데 어떤 대학강사가 행사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렸다가 붙잡혀 갔다지요. 어쨌든 세계적인 행사는 끝났고,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G20에도 불구하고 저의 관심은 지금 40년 전 어제 세상을 떠난 한 사람에게 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1960년 11월 13일에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 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의 이름은 전태일입니다.

 

전태일은 1948년 음력 8월 26일 대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전상수는 봉제 노동자였습니다. 혼자서 조그만 공장도 해 보았지만 거듭 실패했습니다. 어머니 이소선의 친아버지, 그러니까 전태일의 외할아버지는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동네 뒷산에서 일제 경찰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1954년 식구 모두 먹고 살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물론 갈 데가 없었고, 가족은 서울역 근처 염천교 밑에서 노숙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만리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동냥을 해서 가족들 입에 풀칠을 하게 했습니다. 제 어렸을 때 기억에도 깡통을 들고 집집마다 밥을 얻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었습니다. 너무나 가난해서 전태일은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한 채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동대문 시장에서 행상을 했고, 신문배달, 구두닦이 등을 전전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17살 때인 1965년, 평화시장 삼일사에 시다로 취직했습니다.

 

일본말인 시다, 그러니까 기술자들 심부름해 주는 보조일꾼으로 취직한 전태일은 하루 14~16시간을 일하고 1,500원을 월급으로 받았습니다. 일당으로 치면 하루 50원인데 이는 당시 커피 한 잔 값이었습니다. 전태일이 취직했을 당시 평화시장에는 10대 초반의 시다들도 아주 많았습니다.

 

당시 ‘시다’들은 창문도 없고 환풍기도 없고 허리도 펼 수 없는 곳에 쭈그리고 앉아서 먼지밥을 먹으며 밤늦도록 일했습니다. ‘타이밍’이라는 잠 안 오는 약까지 강제로 먹으며 일해야 했습니다. 쉬는 날은 한 달에 달랑 이틀뿐, 그들은 작가 오도엽이 쓴 “전태일 - 불꽃이 된 노동자”에 의하면 “팔다리가 펴지지 않고, 살을 꼬집어도 감각이 없고, 눈만 멀뚱멀뚱하게 뜬 산송장”이 되어 갔습니다.

 

일 잘 하던 전태일은 이내 재봉사를 거쳐 재단사 자리까지 단숨에 올라갔습니다. 이쯤 되면 자신은 먹고 사는 걱정 없이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태일은 자기 혼자 먹고 살 만 해진 것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다로 일하는 수많은 어린 여공들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그는 자기가 재단사가 된 것도 어린 ‘시다’들의 처우개선을 하기 위해서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는 사장에게 끝없이 ‘직원복지’를 역설했고, ‘인간적인 처우’를 요구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직접 ‘모범공장’을 차리기 위해 한쪽 눈을 팔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근로기준법이라는 법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법전을 사서 혼자 공부를 하면서 노동자의 권리에 눈을 떴습니다. 하루 8시간을 넘겨 일을 할 수 없고, 청소년은 7시간 이상 일해선 안 되며, 일주일에 하루 이상 쉬어야 한다는 것 등이 그 법에 들어있었습니다. 그 법을 보면서 그는 자기들이 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갔습니다.

 

그는 주변 동료들을 모아 1969년 ‘바보회’를 만들었습니다. 함께 공부하고 근로기준법을 배우면서 권리를 찾고자 했습니다. 1970년 평화시장 일대의 노동실태를 조사해 노동청에 근로조건 개선 진정서를 냈지만 사장부터 노동청까지 그 누구도 전태일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시위를 열어 세상의 관심을 촉구하려 했지만 경찰과 사업주의 방해로 시위도 열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법전을 불태우는 집회를 준비했습니다.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30분 ‘근로기준법 화형식’이 청계시장에서 열렸고, 바로 그 자리에서 전태일은 자기 몸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의 나이 스물 셋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기 직전에 세 마디의 공개 유언을 남기고 산화했습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재봉틀이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1969년 12월 31일, 1960년대의 마지막 밤, 전태일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인 과제이다. ........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마침내 1970년 8월 9일, 전태일은 그의 죽음을 준비하는 듯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여러분!

전태일이 목숨을 바친 지 40년이 지났는데 세상은 얼마나 바뀌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엄청난 경제성장이 이루어졌고, 우리나라가 세계 10위권의 대국이 되었다고 하고, 그 결과 우리나라에서 G20도 열렸습니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집계에 따르면, 2000년 이후에만 적어도 20명의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바로 그래서 전태일이 죽고 40년이 지났지만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전태일을 잊지 못하고 그를 기억하며 그의 뜻을 기리고자 애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전태일, 그의 삶을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앞에서 잠깐 소개했던 작가 오도엽의 딸은 아빠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전태일이란 사람은 지지리도 가난해서 거지처럼 살았는데 뭐가 아름답다는 거야?”

이에 오도엽은 어린 딸에게 이렇게 대답함으로써 전태일의 삶을 정리해 줍니다.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인간이 지녀야 할 도리를 지켜낸 것이 아름답다.“

 

그렇습니다.

전태일은 자기가 남들보다 그래도 조금은 잘 살 수 있는 위치에 올랐지만, 눈만 질끈 감으면 그렇게 살 수 있지만 그렇게 살지 않고 어려움 당하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인간이 가져야 할 도리 즉 혼자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내겠다고 애쓴 것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은 바로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이 아니었던가요?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보여주었던 삶이 아니었던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꿈꾸셨던 하나님의 나라, 예수께서 당신의 삶으로 보여주시려고 했던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자기 혼자만 잘 사는 세상이 아니라 더불어 잘 살기 위해 인간의 도리를 다하려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바로 그 가르침을 주는 말씀이 오늘의 본문이라고 믿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앞에 나오는 부분들을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17절부터 19절까지에서 예수는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십자가에 달려죽으리라는 세 번째 예고를 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은 그 말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그게 무슨 의미인지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20절부터 보면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예수께 와서 절하며 청합니다.

“나의 이 두 나라를 선생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그 말을 들은 열 제자가 분개했다고 오늘의 본문에 나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그 자리는 내 자리라고 서로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그 싸움을 보던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놓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렇습니다. 통치자들과 고관들은 백성을 내리누르고, 세도를 부립니다. 로마제국은 물론이요, 헤롯 왕도 백성을 내리누르고, 엄청난 세금을 메기고, 공사에 동원하고, 감시하고 탄압했습니다. 심지어는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도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협박하고, 착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렇습니다.

진정 위대한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고, 종이 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진정으로 보여주신 분은 바로 예수이십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낮아지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낮아지셨는가?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주기까지 낮아지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도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태일은 자기 목숨을 어린 시다들을 위해, 노동자들을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해 몸값으로 바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자기 목숨을 가난하고, 병들고, 귀신들리고, 언제나 손가락질 당하던 백성들을 위해 몸값으로 바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전태일의 길은 바로 예수의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길, 전태일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바보라고 손가락질 당하면서도,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느냐고 비웃음을 사면서도 그것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길이기에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전태일과 예수, 그들은 죽었지만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참다운 의미를 찾는 사람들에 의해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들을 마음속에 기억하고 그들이 뒤를 따라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희망으로, 용기로, 불꽃으로 다시 피어나서 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변화시키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한국기독교입니다. 이제 그야말로 대형화되고, 기득권층이 되어버린 한국기독교입니다. 아무런 역사의식 없이, 현실에 안주해 있는 한국기독교의 나아갈 길이 어떠할지 참으로 걱정스럽습니다.

 

참으로 혼란스럽고 살기 힘든 세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새삼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런 질문을 던지고 계십니까?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고 있습니까? 예수는 과연 우리들에게 어떤 길을 걸어가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는가?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다시 한 번 예수의 길이 무엇인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때가 되기를 진실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