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년도

2010. 11. 7 /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 누가복음 13;22-30

람보 2 2015. 4. 5. 20:51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2010년 11월 7일)

 

본문) 누가복음 13:22-30

“예수께서 여러 성읍과 마을에 들르셔서, 가르치시면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께 물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집주인이 일어나서,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면서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졸라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때에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주인님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인님은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할 터이나, 주인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모두 내게서 물러가거라‘ 할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는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는 바깥으로 쫓겨난 것을 너희가 보게 될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면서 이를 갈 것이다. 사람들이 동과 서에서, 또 남과 북에서 와서, 하나님 나라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보아라, 꼴찌가 첫째가 될 사람이 있고, 첫째가 꼴찌가 될 사람이 있다.’ ” (표준새번역 개정판)

 

 

스물네 장으로 되어 있는 누가복음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두 번째 부분의 시작을 오늘의 본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13장 21절까지는 갈릴리를 중심으로 활동하시던 예수의 모습이 나타나고 이제 오늘의 본문부터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앞부분은 탄생과 갈릴리에서의 활동, 뒷부분은 유대에서의 활동과 죽음으로 나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2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여러 성읍과 마을에 들르셔서, 가르치시면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셨다.”

 

그러니까 오늘의 본문은 예수 공생애의 후반부를 시작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기자는 어떤 사람을 등장시켜 예수께 질문을 하게 하는 것으로 후반부를 시작합니다. 그는 예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간단히 말하면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가 얼마나 되느냐 하는 물음입니다. 그 숫자가 많으냐, 적으냐 하는 물음이지요. 그런데 그 질문을 던진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는 전혀 모르지만 그 사람 스스로 생각해도 구원받는 일이 쉬운 것 같지 않으니까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그 숫자가 많은지 적은지 대답하시면 됩니다. 아마도 구원받을 사람이 많을 수 있겠느냐고 대답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좀 엉뚱한 대답을 하셨는데 그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우선 예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당연한 대답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이 결코 넓은 문일 수 없으니 좁은 문으로 표현하신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누구나 거기에 들어가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좁은 문이니까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진짜 들어가려고 애쓰는 사람들만이 들어갈 것입니다.

 

그런데 25절에서 조금 엉뚱한 말이 나옵니다.

“집주인이 일어나서, 문을 닫아 버리면,”

그러니까 문이 좁아서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집주인이 문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문이 닫히면 당연히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들어갈 수 없지요. 그들은 깜짝 놀라서 소리칩니다. 그들은 밖에 서서 열심히 문을 두드리며 소리칩니다.

“주인님, 문을 열어주십시오.”

“주인님, 문을 열어주십시오.”

그러나 주인은 한 마디로 딱 자르셨습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모른다.”

 

바깥에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기가 막혔습니다. 자기들을 모른다니요? 자기들은 분명히 주님의 제자들인데 자기들을 모른다니요? 그들은 기가 막혀서 소리질렀습니다.

“우리는 주인님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인님은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분명히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입니다. 주인님과 함께 한 식탁에서 음식을 먹고 마셨으며, 주인님은 그들을 데리고 다니며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니 주인님이 그들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다시 한 번 냉정하게 그들을 물리치셨습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모두 내게서 물러가거라.”

 

자, 여기서 주님이 그들을 모른다고 하신 이유가 밝혀집니다. 그들은 바로 “불의를 일삼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의를 일삼는 자들”이란 어떤 자들을 말하는가? 그들이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그렇게 심하게 꾸짖으시고, 내치신 것인가? 오늘의 본문 그 어디에도 답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답을 하지 않으시고 곧바로 이어서 그들을 심판하시는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는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는 바깥으로 쫓겨난 것을 너희가 보게 될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면서 이를 갈 것이다. 사람들이 동과 서에서, 또 남과 북에서 와서, 하나님 나라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보아라, 꼴찌가 첫째가 될 사람이 있고, 첫째가 꼴찌가 될 사람이 있다.”

 

여러분!

여기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사람들과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구분됩니다. 즉 구원받을 사람들과 구원받지 못해서 지옥으로 떨어질 사람들이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들은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는 즉 주인님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인님으로부터 길거리에서 배웠다고 하는 제자들은 바깥으로 쫓겨나서,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사람들이 동과 서에서, 또 남과 북에서 와서, 하나님 나라 잔치 자리에 앉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께서는 참으로 엉뚱한, 그야말로 뜬금없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보아라, 꼴찌가 첫째가 될 사람이 있고, 첫째가 꼴찌가 될 사람이 있다.”

 

여러분!

무슨 내용인지 아시겠습니까? 도대체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누가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예언자들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되어 있고, 예수의 제자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도대체 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채 바깥으로 쫓겨나서, 거기서 슬피 울면서 이를 갈게 되는 것입니까? 또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리고 특히 그들을 향해 “불의를 일삼는 자들”이라고 꾸짖으셨는데 여기서 말한바 불의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사실 오늘의 본문만 놓고 보면 이러한 물음의 대답을 전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냥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정의를 행해야 한다고 말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설교를 끝내면 됩니다. 그렇습니까? 도대체 불의가 무엇인지 또 반대로 정의가 무엇인지 밝혀주지 않은 채 무조건 정의를 행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면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여러분!

누가복음을 읽다 보면 마태복음에 병행구가 나오는 본문들이 제법 많습니다. 누가복음의 내용이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었을 때 그것이 그대로 같은 하나의 덩어리로 마태복음에 나오는 경우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의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13장 18-23절의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마태복음 13장 31-33절에 그대로 나오는데 우리는 이것을 병행구라고 부릅니다. 또 본문 바로 뒤에 나오는 13장 31-35절의 말씀은 조금 생략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마태복음 23장 37-39절에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은 이상하게도 마태복음에 하나의 덩어리로 병행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려 네 군데로 쪼개져 나옵니다. 22-23절은 도입부니까 제쳐놓고 나머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24절 --------> 마태복음 7:13-14

25-27절 -----> 마태복음 7:21-23

28-29절 -----> 마태복음 8:11-12

30절 --------> 마태복음 19:30

 

그러니까 오늘의 본문은 마태복음에 하나의 병행구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흩어져 나옵니다. 자, 여기서 이것을 일일이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자세하게 알고 싶으신 분들은 저한테 연락하셔서 성경공부를 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기서 두 가지만 살펴보면서 오늘의 본문이 말하는바 불의를 일삼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보겠습니다.

 

우선 오늘의 본문 24-27절 말씀이 마태복음 7장 13-23절에 나오는데 그 부분을 찾아서 읽어보면 바로 우리가 두 주 전에 보았던 본문입니다. 13-14절에 좁은 문, 넓은 문 이야기가 나오고, 21-23절에 쫓겨나는 제자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두 부분 가운데인 15-20절에 거짓 예언자 즉 양의 털을 쓴 이리를 주의하라는 경고가 나옵니다. 그들은 나쁜 열매를 맺는 것들이니, 열매를 보고 그들을 판단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본문을 갖고 설교하면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거짓 예언자란 결국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기적을 행하기는 하지만 이리와 같이 탐욕스럽고 제 욕심만 차리는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에 의하면 불의를 행하는 자들은 탐욕스럽고 나누어줄 줄 모르는 자들인 것입니다. 제 배만 부르면 된다고 생각하고 남들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제 주머니를 채우려는 놈들이라는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는 여기서 한 가지 더 결정적인 가르침을 발견합니다. 오늘의 본문 중 30절 “꼴찌가 첫째가 될 사람이 있고, 첫째가 꼴찌가 될 사람이 있다”는 구절이 나오는 마태복음의 본문을 통해서입니다. 그 구절과 똑같은 내용이 엉뚱하게도 마태복음 19장 30절에 나오는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첫째가 된 사람들이 꼴찌가 되고, 꼴찌가 된 사람들이 첫째가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본문은 마태복음에 의하면 어떤 내용과 함께 나오는가? 그 유명한 부자 젊은이입니다. 19장 16절부터를 보면 한 젊은이가 예수를 찾아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 말씀하셨지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마태복음 기자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근심을 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여러분!

바로 이 이야기 끝에 예수께서 덧붙이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첫째가 된 사람들이 꼴찌가 되고, 꼴찌가 된 사람들이 첫째가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 의하면 그 부자청년이 바로 첫째가 된 사람이었지만 꼴찌가 된 사람입니다. 구원을 받으러 왔지만 멸망의 길로 가고 만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청년이 불의를 행했습니까? 불의란 율법을 어긴 것입니까? 그 청년은 율법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그렇다면 그 청년이 행한 불의란 무엇입니까? 자기 재산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돕지 않은 것입니다.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라는 말씀이 마음에 걸려서 주님을 따르지 못하고 돌아가 버린 것이 그 청년이 행한 유일한 불의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저는 결정적으로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불의를 일삼는 자”가 누구인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 부자들입니다. 제 배 부르고 등 따스면 됐지 남들 어려움은 생각지도 않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비록 주님 앞에서 먹고 마시고, 말씀을 아무리 많이 배워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기에 불의를 일삼는 자들이라고 욕먹고 심판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들이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것은 그들이 복의 근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복의 근원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나 혼자 누리겠다고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베푸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 백성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의를 일삼는 자들, 즉 제 욕심만 차리고 나누어줄 줄 모르는 자들은 그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유대인이고, 회당에 열심히 나가고 율법을 지켰다 해도 바깥으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면서 이를 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불의란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축복을 나만 누리고 남들에게는 나누어줄 줄 몰랐던 것,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지옥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인터넷에 참으로 딱한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기독교인이지만 그야말로 불의를 일삼는 자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두 가지 사건을 소개하겠습니다. 첫 번째 기사는 “교회에선 도대체 뭘 가르치는지”라는 제목인데 그 부제로 “한 장애인 노점상이 바라본 한국 기독교인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어느 목사님이 쓰신 글입니다.

 

“지난 10월 29일, 안성시장 재래시장을 들렀다. 내가 지원하는 장애인 아주머니가 붕어빵 장사를 잘하고 계시는지 보기 위해서였다. 20일 전, 아주머니가 노점상 자리를 계약할 때도 글을 잘 모르는 아주머니 대신 계약서를 내가 작성했고, 일련의 상황들을 함께 했다. 사실은 아주머니가 며칠 전부터 한 번 들러달라는 부탁이 있었다.

‘목사님, 이 일을 어쩌면 좋아요?’

나를 보자마자 아주머니는 울먹거리신다. 얼마나 쌓인 게 많았으면 그랬을까, 아주머니가 풀어놓은 이야기는 이랬다.

 

아주머니가 자리 잡은 안성시장 통 붕어빵 장사 자리 앞에는 계란빵 장수, 뒤에는 떡볶이 장수다. 무척 추었던 지난 며칠, 양쪽의 가판대 노점상에게 ‘제발 전기 좀 같이 나눠 씁시다. 아니면 어떻게 전기를 뜰어 쓸 수 있는지 알려주세요. 제 발이 의족이라 너무 춥고 힘들어요’ 라고 말했다. 돌아온 대답은 ‘전기를 줄 수도 없고, 끌어 들이는 방법도 가르쳐 줄 수 없다’였단다. 더군다나 앞쪽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집은 시장 통 입구라 장사도 잘 되는데 얼마 있지 않아서 붕어빵도 구워 팔겠단다. 양쪽이 담합해서 아주머니를 밀어낼 작정인가 보다.

‘목사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농협에 대출 받아서 이 자리를 마련했잖어유. 이제 여기서 나자빠지면 우리 가족 갈 데도 없는데. 주위 노점상들이 나와 내 가족을 죽일라 하니 워쩌면 좋대유. 누구에게 가서 말도 못하고. 생각다 못해 목사님을 불렀시유.’

 

줄줄이 붙어 있는 노점상 가판대. 장애인 아주머니 자리 바로 옆 노점상 자리엔 전기 코드가 하나 남아 있었다. 더 기가 찬 건 앞 쪽과 뒤 쪽에 노점상들이 안성의 같은 한 교회에 다닌단다. 아주머니는 속상해서 ‘도대체 교회에선 뭘 가르치는지’를 연발하신다.

 

양쪽의 노점상 하시는 분들에게도 가족은 딸려 있고, 생계도 유지해야 하니 조그마한 욕심을 부리는 것을 뭐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도 살고 너도 사는 방법’이 있는데도 굳이 한 사람, 그것도 약자를 밀어내려는 마음이 안타깝다. 흡사 요즘 시대의 만연된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이 언제부터 우리네 삶의 진리처럼 여겨지는 지 씁쓸하다. 더군다나 같은 교회에 다닌다는 그들은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할 걸 생각하니 웬지 씁쓸했다. 명색이 나도 목사이니, 부끄럽기도 하다. 장애인 아주머니가 말했던 ‘도대체 교회에선 뭘 가르치는지’란 말이 귀에 자꾸만 맴돈다.“

 

이 글을 읽은 독자 한 사람이 댓글을 달았는데 그 내용도 같은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제 아내도 노점에서 호떡과 먹거리를 팔고 있답니다. 장소는 대전 서구 가장동 한민시장 입구 초입의 길갓자리입니다. 옆에 있는 나르메 아파트 부녀회장이 목숨걸고 주차단속을 신고하고 지난 지방선거에는 기초단체 구의원인 후보에게 노점상 단속을 구실로 지원을 약속했다고 전하더군요. 부녀회장이 너무 잔인하게 설쳐대니 행정당국에서는 어쩔 수 없이 단속을 나오면서 상황설명을 하며 단속반이 이해를 구하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노점상들의 어려움을 알게 된 단골손님 중의 한 분이 나르메 아파트 부녀회장이 출석하는 천주교 성당 신부를 찾아가 호소를 했다고 합니다. 노점상을 그만 괴롭히라고 말려달라 는 취지의 고자질이었던 겁니다.

결국 그 부녀회장은 해당성당 신부에게 불려가 잔소리를 듣고 지금은 일체의 단속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주변의 노점상들이 두려움없이 장사를 한답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놈들이 더하다는 말을 듣는 경우들이 왕왕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 혼자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함께 잘 살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옆에 있는 불쌍한 사람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교회에 가서 찬양을 부른다면 그 찬양을 하나님이 받으시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가운데 불의를 일삼는 자들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베풀고 나누며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뭔가 다르다고, 베풀 줄 알고, 나눌 줄 알고, 도울 줄 안다고 칭찬받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추워지는 계절, 모두가 따뜻한 삶을 살게 되면 좋겟습니다. 그렇게 따뜻한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세상이 되기를 간절히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