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 년도

1983. 7. 10 / 하나님의 크신 구원 / 창세기 45:1-15

람보 2 2015. 3. 5. 16:31

하나님의 크신 구원 (1983. 7. 10 )

하나님의 크신 구원

창 45:1-15 / 1983. 7. 10

서기 1951년 1월 4일. 몹시도 추웠던 날, 한반도의 북쪽으로부터는 두 줄기의 찬바람이 몰아쳐왔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손과 발을 얼어붙게 했던 차가운 겨울바람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마음을 얼어붙게 했던 중공군이라고 하는 회오리바람이었습니다. 서울을 다시 빼앗기고 우리 민족은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피난의 행렬로 길이 메워지고 잠깐 손을 놓치면 그것이 곧 영원한 이별이 되어버리던 때였습니다. 그 운명의 날, 1월 4일. 충청도 천안역에서 젊은 엄마가 일곱 살과 네살 난 두 아들을 데리고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곱 살 난 아들은 엄마의 손을 잡고 있었고, 네 살 난 아들은 자기 이모의 등에 업혀 있었습니다. 잠시 후 역으로 화물차가 하나 들어오자 사람들은 제각기 먼저 타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이 때 이모는 네살 난 조카를 업고 먼저 올라탔습니다. 그리고는 기차는 떠나갔습니다.

난리 통에 언니를 만날 수 없었던 그 이모는 조카를 어느 고아원에 맡기고 꼭 다시 찾으러 오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이모가 고아원을 찾았을 때 조카는 어디론지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33년, 전국 곳곳의 고아원을 뒤지고 다녔고 경찰의 컴퓨터 조회도 해 봤지만 조카가 어디서 사는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 동안 조카 김성수씨는 고아원을 나와 고생 끝에 목공 일을 배워 이제는 어엿한 기술자로서 훌륭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지난 1일 밤 TV를 보고 있던 김씨의 이모는 자신과 조카 김씨를 찾는 낯익은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김씨의 어머니이자 자기의 언니였습니다. 단숨에 달려가 부둥켜 안은 자매는 김성수씨가 이 땅 어딘가에 살아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며칠 동안 끊임없는 기도와 함께 방송국을 찾았습니다.
“1·4후퇴 때 이북에서 내려와 이모가 천안의 고아원에 맡긴 사람을 찾습니다. 이름은 김성수. 나이는 40세가량.”

3일 저녁 직장 숙직실에서 TV를 보던 김씨는 아스라이 잊혀져가던 기억 속에서 이모가 자기를 천안의 어느 고아원에 맡겼다는 사실을 생각해 내었고 그 날 밤으로 달려가 드디어 꿈속에서도 잊지 못하던 엄마를 만났습니다. 엄마를 만난 김씨가 외친 한 마디, 그것은 바로 ‘이게 꿈은 아니죠?’였습니다.

지난 며칠 동안 우리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던 이산가족찾기운동, 잃어버렸던 가족들을 만나는 장면을 보고도 울지 않으면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말까지 생겨난 이 쓰라린 비극의 현장.

그러나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사실은 처음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산가족 이야기는 나하고는 관계없는 이야기로만 생각했습니다. 괜히 흥분하고 우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화요일 제가 다른 날보다 조금 일찍 집에 들어가니까 마침 저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이모가 와 계셨습니다. 이모는 TV를 보고 계셨는데 나오는 프로는 역시 이산가족 찾는 장면이었습니다. 저는 무심코 다른 것 보자고 하면서 채널을 돌렸습니다. 이 때 어머니께서 이모가 TV를 보고 있다고 하시면서 혹시 이모부가 나올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저는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는 기분이었습니다. 바로 우리 이모가 시집간 지 얼마 안 되어 첫아기를 뱃속에 갖고 있을 때 전쟁이 나서 이모부가 군대를 가고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모는 그 때 딸 하나 낳고는 지금까지 평생 혼자 사셨습니다. 바로 그 이모부가 TV에 나올지 모른다고 제 사촌 누나는 며칠을 꼬박 TV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제 사촌누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고, 저도 역시 이모부의 얼굴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적어도 이산가족이야기가 남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나의 이야기이고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이때부터 제 마음 속에는 끊임없이 하나의 물음이 떠올랐습니다.
“오직 이 나라에 태어난 죄밖에 없는, 우리 이모와 같은 저 착한 사람들을 누가 이렇게 짓밟고, 그 마음을 할퀴었는가?”
우리 이모가 홀몸으로 먹고 살기 위해서, 딸자식 하나 잘 키우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릅니다. 비록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을지라도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 것이며, 얼마나 많은 아픔을 참아냈을 것인가요? 그리고 그것은 어느 한 개인이나 한 가족의 아픔과 슬픔이 아니고 사실은 우리 민족 전체의 아픔과 슬픔이 아니던가요? 지나간 33년 동안 헤어진 부모 형제를 그리워하면서 슬픔을 이겨낸 우리의 동족들, 그들의 눈물을 누가,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는가요?

저는 지금 이 순간에도 TV에서 본 장면을 기억합니다. 헤어졌던 부모를 극적으로 만난 한 여인, 그는 소리쳤습니다.
“왜 나를 고아원에 버렸어요?”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
우리는 지금 우리의 부모님들이 겪으셨던 그 고난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부모님들이 흘리셨던 그 눈물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동족들이 부모님을 찾고자 외치는 저 소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아직도 부모님을 찾지 못한 이웃들이 겪고 있는 피를 말리는 아픔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 성서를 보게 됩니다.
고난을 기억하면서, 눈물을 기억하면서,
울음소리를 기억하면서, 아픔을 기억하면서.

인간이 이런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어라고 말씀해주시는가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오늘의 본문은 우리들에게 우리보다 먼저, 벌써 수천 년 전에 한 가족이 헤어짐으로 말미암아 슬픔에 젖어 있는 사건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주인공, 요셉. 그의 이야기는 사실 너무나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열한번째 아들 요셉. 꿈장이라는 별명을 갖고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유달리 장신구가 달린 옷을 입던 아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고 공연히 꿈이야기를 해서는 형들로부터 질투를 삽니다.

요셉이 열일곱 살 나던 해, 아버지 심부름을 갔던 그는 그만 형들의 손에 의해 죽을 뻔 하다가 간신히 살아나서는 노예로 불리우게 됩니다. 형들은 요셉을 팔아먹고는 요셉의 옷에다 짐승의 피를 묻혀서 아버지 야곱에게 갖다 줍니다. 이 때 야곱은 요셉을 생각하면서 옷을 찢고, 베옷을 몸에 걸친 채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잃어버리고 우는 야곱의 모습,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자식을 찾지 못해 울고 있는 우리부모들의 모습이 아닌가요?

아버지를 떠나 멀리 애굽으로 팔려온 요셉. 그가 보낸 나날들이 어떠했을까요? 열일곱 살의 어린 나이로 노예로 팔려간 요셉, 그것도 바로 친형들의 미움을 받아 팔려 간 요셉, 비록 성서에는 단 한 구절도 나와 있지 않지만 요셉의 눈에서는 얼마나 많은 눈물이 흘렀을까요?
형들의 손에 붙잡혀 결박당한 채 죽을 뻔 했을 때,
형들은 자기가 갖다 준 음식을 나누어 먹고, 자기는 깊은 웅덩이에 던져져 있을 때,
형들이 자기를 팔아넘기기 위해 장사꾼들과 흥정하고 있을 때,
은 이십 냥에 팔려 머나먼 사막길을 걸어 애굽으로 끌려갔을 때,
파라오의 경호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그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
아무 죄 없이 2년간이나 감옥에 갇혀 고생할 때,
비록 성서에는 단 한마디도 나와 있지 않지만 요셉이 어찌 떠나온 고향을 잊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도 자기를 귀여워해 주시던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자기를 무자비하게 팔아버린 형들을 원망하기도 했을 거고, 자기와 동생 베냐민만을 낳고는 그만 자기가 어려서 죽은 어머니 라헬을 생각하면서 눈물 흘렸을 거고, 하나밖에 없는 동생 베냐민이 어떻게 지낼까 생각하면서 한숨짓는 날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와 생이별하고, 형들로부터 버림받고, 동생생각에 젖어있는 요셉, 그는 바로 부모형제를 찾기 위해 커다란 광고판을 들고 목이 쉬어라 찾아다니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요? 요셉을 팔아버린 형들은 과연 어떨까요? 동생을 돈 받고 팔아먹고, 동생은 죽었다고 아버지를 속인 형들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부모형제를 찾아 헤매고 있는데 바로 그들을 속여서 돈 벌고자 애쓰는 가련한 인간들이 우리 가운데는 없는가요? 아니 사실은, 이산가족의 슬픔은 나와 아무 관계없다고, 나만 잘 먹고 잘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는 없는가요?

그러나 성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성서는 언제든지 절망으로 끝날 것 같은 그 순간에 한 가지 결정적인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이 형들의 손에 의해 팔렸을 때, 보디발의 집에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을 때, 2년간이나 답답하고 지루한 감옥살이를 할 때, 그 때마다 요셉이 기억했던 것, 한 가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여기에 비결이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신앙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그렇게도 고생을 하고 마침내 출세를 했는데, 그리고 바로 그 때 자기를 팔아먹은 형들을 만났는데, 말 한 마디 하면 형들을 한꺼번에 죽일 수도 있는데, 속 시원하게 앙갚음을 할 수도 있는데, 바로 이 때 요셉이 기억했던 것 한 가지, 그것도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요셉은 자기들의 잘못을 생각하면서 두려워 떨고 있는 형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를 이곳으로 보낸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말 할 수 있는가요? 요셉은 어떻게 그렇게 말 할 수 있는가요? 거기에는 오직 하나, 하나님의 계획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아닌가요?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2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5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의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 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이 보고 있는 것, 그것은 바로 한 민족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그리고 바로 그 민족을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아닌가요?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 민족과 온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신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요? 가족과의 이별이라고 하는 요셉의 슬픔, 한 개인과 가족의 슬픔, 그리고 민족분단이라고 하는 더 큰 슬픔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는 길입니다.

왜 나를 고아원에 버려두었느냐고 하는 물음, 오직 이 나라에 태어난 죄밖에 없는 저 착한 사람들을 누가 짓밟고, 할퀴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요셉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요셉의 아픔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이라고 하는 큰 역사를 이루셨듯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동족들의 아픔을 통해 온 인류의 구원이라는 큰 역사를 이룩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지금 울고 있는 우리의 형제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에서 요셉을 봅니다. 그리고 동시에 요셉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바로 지금 울고 있는 우리의 형제 한 사람 한 사람과 함께 하심을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아픔은 단순한 아픔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이루고자 하시는, 슬픔당하는 이 민족을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뜻이 담겨 있는 아픔이라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요?
단지 슬퍼서 울부짖고 있는 형제들인가요?
아니면 그 울음을 넘어서서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이신가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사랑은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