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기도의 생활
빌 4:4-7 / 1983. 6. 5 ( 신창 속 주관예배 )
우선 오늘의 본문을 공동번역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과연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는가 하고 상당히 망설였습니다. 저같이 서투른 전도사가 어떤 말씀으로 성도님들의 마음을 채울 수 있을 까 하고 고민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이번에는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바로 “기도”의 문제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오늘의 본문을 택하고 제목을 “참 기도의 생활”로 정했습니다.
우선 제목을 설명하겠습니다. 제목을 보시면 금방 아실 수 있듯이 기도와 생활은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과 기도에는 참된 기도와 거짓된 기도가 있다는 생각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이렇게 하고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부흥회를 은혜 가운데 무사히 마쳤습니다. 강사님께서 우리에게 적절한 말씀을 해 주셨고 저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부흥회를 지내면서 저는 처음부터 걱정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교회의 대학부에 속해 있는 친구들이 몇 명이나 나올까 하는 것이었고, 그들이 부흥회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시 대학생들은 많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성가대하는 대학생들은 그래도 나왔지만 그 밖의 대학생들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마음속에 별로 부흥회에 대한 기대가 없었다는 말로 설명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녁 집회 때 꼬박꼬박 나온 대학부의 한 친구가 부흥회에서 통성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는 끝나고 난 후 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습니다. “통성 기도하는 것을 보니까 겁난다.”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겁난다”라는 표현, 거기에는 바로 그 친구가 지금까지 생각해 오던 기도에 대한 생각과 그 때 본 기도하는 모습에 대한 생각이 너무 다른 데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저는 그 친구의 모습 속에서 “과연 기도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은연중에 던져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과연 기도란 무엇인가?”
저는 이 시간에 기도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강해를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저는 그 대신에 기도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을 살펴보고 오늘의 본문을 통해 “참 기도의 생활”이 무엇일까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기도에 대해 가르쳐 주신 이야기는 마태 6:5-13에 잘 나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선 기도를 위선자처럼 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한 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지만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말은 결국 남이 모르게 혼자서 간절히 기도하라는 것이며 결국 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1대 1의 대화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특히 대표기도를 할 때 남들이 듣기에 그럴 듯하게 하기 위해서 많은 신경을 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바람에 기도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옆 사람 들으라고 하는 것이 되어버리지는 않는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두 번째로 주님께서는 기도 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이 말을 빈 말을 되풀이 하지 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말을 많이 하고 또 크게 해야만 하나님께서 들으실 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벌써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물론 우는 자식에게 부모님들이 떡 하나 더 주시지만 부모님께서 자식이 필요한 것을 다 아실테니까 차분하게 앉아서 공부하는 자식이 떡을 하나 덜 먹더라도 더 대견한 자식이 아닐까요?
이러한 두 가지 말씀을 가르치시고 나서 주님께서는 9절로 13절에서 그 유명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7가지 간구와 하나의 후렴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을 간구하는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러한 기도의 본질, 즉 내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의 극치는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까지 기도하신 주님의 모습에서 나타납니다.
그런데 성서를 주의 깊게 보면 기도에 대한 주님의 가르치심이 끝나고 난 후 조금은 엉뚱한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도대체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시다가 왜 갑자기 남을 용서하라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물론 주기도문 가운데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구절이 있으니까 완전히 엉뚱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서 기도는 바로 하나님과 나와의 대화를 통한 화해이고, 동시에 하나님과 나와의 화해는 구체적으로 이웃과의 대화를 통한 화해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기도는 결코 생활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아무리 입으로는 기도를 그럴 듯하게 잘 한다 하더라도 이웃과의 화해를 추구해 나가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기도는 바로 하나님, 그리고 이웃과의 화해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좀 더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는 말씀을 저는 바로 오늘의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매 여러분의 소원을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줄 압니다. 저는 지금 맨 마지막 부분에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 그것은 바로 평화입니다. 평화는 나 혼자 있을 때 사용하는 말이 아닙니다. 나와 너, 즉 관계 속에서 쓰이는 말입니다. 그리고 평화는 바로 화해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기도는 바로 나와 하나님, 나와 이웃, 나와 너의 사이에 평화를 추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나 혼자 잘 되게 해 달라고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 즉 평화를 이루기 위해 화해의 삶을 살게 해 달라고 하는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제목을 “참 기도의 생활”이라고 잡았습니다. 잘못하면 참 기도의 생활이라고 하니까 하루 스물 네 시간, 만사를 제쳐놓고 무릎 꿇고 기도만 드리라는 말로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 본 하나의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옛날 어느 곳에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어질고 지혜로운 임금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늙어가는 그 임금님의 가장 큰 근심은 당신에게 아들도 없고 딸도 없어서 앞으로 어떻게, 누구에게 임금의 자리를 계승시키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임금님께서는 신하들에게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내가 늙었으니 어서 내 뒤를 이을 임금을 택하시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대신들은
“황공하옵니다. 임금님께서는 만세나 사셔서 영원토록 우리를 다스리옵소서.”라고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몇 년이 지나갔습니다. 임금님은 더 기다릴 수 없어서 당신께서 직접 자기의 후계자를 택하기로 하였습니다.
드디어 어느 날 신하를 불러 분부를 내렸습니다. “누구든지 임금이 되고 싶은 생각이 있는 사람은 다 대궐에 들게 하라. 내가 문제를 내어 합격한 자에게 이 자리를 물려주겠노라”
이 분부가 있자 궁궐은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임금님은 한 사람 한 사람 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험을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다 떨어지고 세 사람만 남았습니다. 그 세 사람은 매우 지혜로와 보이고 체격도 크며 훌륭하게 보였습니다. 그 세 사람의 이름은 길다스, 씨릭, 오스프리스였습니다.
세 사람을 앞에 세우고 임금님은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지혜의 책”을 펴들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책으로 나의 왕국을 다스리었소. 이 책에는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을 위하여 좋은 법이 기록되어 있소. 이제 내가 좋아 하는 법을 읽어줄 터이니 앞으로 한 주간 동안 이 법에 순종하시오. 이 법을 가장 지혜롭게 지킨 자를 나의 후계자로 삼겠소.”
세 사람은 모두 미소를 짓고 정숙하게 귀를 기울렸습니다. 그들은 모두 대단한 이야기가 많이 나올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것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사람은 항상 기도하여야 하느니라.”
임금님은 지혜의 책을 내려 놓았습니다. 어마어마한 법을 기다리던 길다스는 “그것 뿐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임금님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한편 씨릭은 “항상이란 시간을 가리키는 말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도 임금님은 미소를 뛰우시고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다음 오스프리스는 “언제부터 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여기에 임금님은 “이시간부터요”하고, 다시 한번 “사람은 항상 기도하여야 하느니라”라고 읽어 주셨습니다. 세 사람은 아무 말없이 조용히 그 자리를 물러났습니다.
길다스는 즉시 신부들이 모여 기도와 거룩한 명상으로 생활하는 수도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한 주간을 열심히 계속하여 기도하려면 수도원으로 가야만 모든 근심과 걱정을 잊고 기도를 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수도원의 주임 신부는 길다스를 환영하여 방을 하나 주고 항상 기도할 수 있게 협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도사 한 사람으로 하여금 길다스의 수종을 들게 하여 길다스가 쉬지 않고 항상 기도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한편 씨릭은 성당을 찾아갔습니다. 그 성당 안에 있는 성화 앞에 촛불을 켜고 자기가 배워서 아는 기도를 거듭하여 드렸습니다. 그 양초들은 굵고 커서 넓은 대궐이라도 능히 한 주간을 환하게 켤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씨릭은 자기가 무엇이라고 기도하였는지 기억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스프리스는 대궐을 나온 이후 임금님의 분부와 왕위를 위한 경쟁을 잊은 듯 예전대로 부지런히 일만 하였습니다. 그의 생활은 조금도 이전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다만 그는 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친절했고, 조심스럽게 착실히 그리고 부지런히 일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 오스프리스의 친구는 답답하여 그에게 재촉하였습니다.
“여보게, 자네는 길다스처럼 수도원에 기도하러 가지도 않고 또 씨릭처럼 촛불을 켜 놓고 성당에서 기도도 안하니 임금님께서 분부하신 기도는 언제 하려고 하는가? 아마도 자네는 귀한 왕위를 길다스나 씨릭에게 빼앗길 것 같으니 어서 일 그만 두고 이제부터 기도를 시작하게.”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오스프리스는 미소만 가볍게 짓고 여전히 자기 일을 부지런히 계속했습니다.
어느덧 임금님과 약속한 보고의 날이 돌아왔습니다. 길다스, 씨릭, 그리고 오스프리스는 임금님 앞에 가서 보고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먼저 길다스가 말했습니다.
“저는 그동안 수도원에 가서 열심히 쉬지 않고 기도드렸습니다.” 하며 수도원장의 증명서를 임금님께 바쳤습니다.
그 증명서에는 “우리는 길다스가 기도하는 시간을 방해하거나 중단시키지 않기 위하여 길다스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또 그는 잠이 들 때라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손을 합장하고 기도하는 자세를 가지기를 잊지 않았습니다.”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길다스의 보고를 다 들으신 임금님은 “그런가? 그래 자네가 드린 기도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더 행복할 수 있었는가? 또 우리나라가 얼마나 더 잘 되었는가?”하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에 길다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다음 씨릭이 자신의 보고를 증명해 줄 여러 증인들을 데리고 임금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 중에서 씨릭에게 초를 판 초장사가 입을 열어 “씨릭은 많은 돈을 들여 교회 안에 불을 켤 초를 사서 촛불을 켜고 기도를 드렸습니다.”하고 증명하였습니다. 또 길을 청소하는 청소부는 “이 분은 길을 걸을 때라도 손을 모으고 기도하였습니다.”라고 증명하였습니다.
씨릭의 보고를 다 들으신 임금님께서는 “수고했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기도한 결과 이 나라가 좀 나아졌는가? 우리 백성들 가운데 자네의 기도로 말미암아 좀 더 용감해지고 지혜로와진 사람이 생겼는가?”하고 물었습니다. 씨릭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다음 오스프리스는 혼자서 겸손히 임금님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조용하게 그러나 똑똑한 음성으로 “저는 지나간 한 주간도 보통 때나 마찬가지로 분주하게 보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부탁한 일이 있었고 또 저는 그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하므로 시간을 내서 수도원에 갈 수 없었고 또 성당에 찾아가서 촛불을 켜 놓고 기도드릴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언제나 일을 시작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매일 지냈습니다. 이같이 기도하는 마음과 태도는 제가 이전부터 지켜왔고 또 앞으로도 계속하려는 것입니다.”라고 공손히 말하였습니다. 이 때 임금님은 “자네가 일을 하러 갈 때마다 하나님과 기도로 의논하고 일했다니 좀 더 자세히 말해주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스프리스는 더 겸손하게 “별로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다만 저는 제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항상 계실 수 있는 마음자리를 준비하려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무슨 일을 당할 때 제가 혼자서 하려고 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하시도록 하면 저는 언제나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일도 잘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들으신 임금님은 머리를 끄덕이시며 기뻐하셨습니다.
이 때 밖에서 많은 군중들이 웅성거리며 몰려 왔습니다. 문지기들은 그들을 막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임금님이 다들 들어오게 하라고 명령하시자 많은 군중들은 임금님 앞에 나아와 한결같이 그 동안 오스프리스가 저들에게 얼마나 친절했고 많은 도움을 주었는가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오스프리스야말로 저들의 임금님이 되어야 한다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 때 임금님께서도 “그렇소. 내가 사랑하고 귀하게 읽어오던 지혜의 책도 바로 오스프리스가 지켜온 그 행위의 뜻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오. 사람이 언제나 항상 기도한다는 것은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오.” 하시고 천천히 보좌에서 일어나 오스프리스의 손을 잡고 그를 용상에 앉게 하시고 왕관을 씌어 주시며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참 기도의 생활이 됨으로 말마암아 하나님의 사랑과 화해와 평화의 복음을 이웃들에게 증거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바로 그럴 때 우리는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를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빌 4:4-7 / 1983. 6. 5 ( 신창 속 주관예배 )
우선 오늘의 본문을 공동번역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과연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는가 하고 상당히 망설였습니다. 저같이 서투른 전도사가 어떤 말씀으로 성도님들의 마음을 채울 수 있을 까 하고 고민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이번에는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바로 “기도”의 문제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오늘의 본문을 택하고 제목을 “참 기도의 생활”로 정했습니다.
우선 제목을 설명하겠습니다. 제목을 보시면 금방 아실 수 있듯이 기도와 생활은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과 기도에는 참된 기도와 거짓된 기도가 있다는 생각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이렇게 하고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부흥회를 은혜 가운데 무사히 마쳤습니다. 강사님께서 우리에게 적절한 말씀을 해 주셨고 저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부흥회를 지내면서 저는 처음부터 걱정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교회의 대학부에 속해 있는 친구들이 몇 명이나 나올까 하는 것이었고, 그들이 부흥회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시 대학생들은 많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성가대하는 대학생들은 그래도 나왔지만 그 밖의 대학생들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마음속에 별로 부흥회에 대한 기대가 없었다는 말로 설명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녁 집회 때 꼬박꼬박 나온 대학부의 한 친구가 부흥회에서 통성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는 끝나고 난 후 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습니다. “통성 기도하는 것을 보니까 겁난다.”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겁난다”라는 표현, 거기에는 바로 그 친구가 지금까지 생각해 오던 기도에 대한 생각과 그 때 본 기도하는 모습에 대한 생각이 너무 다른 데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저는 그 친구의 모습 속에서 “과연 기도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은연중에 던져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과연 기도란 무엇인가?”
저는 이 시간에 기도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강해를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저는 그 대신에 기도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을 살펴보고 오늘의 본문을 통해 “참 기도의 생활”이 무엇일까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기도에 대해 가르쳐 주신 이야기는 마태 6:5-13에 잘 나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선 기도를 위선자처럼 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한 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지만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말은 결국 남이 모르게 혼자서 간절히 기도하라는 것이며 결국 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1대 1의 대화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특히 대표기도를 할 때 남들이 듣기에 그럴 듯하게 하기 위해서 많은 신경을 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바람에 기도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옆 사람 들으라고 하는 것이 되어버리지는 않는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두 번째로 주님께서는 기도 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이 말을 빈 말을 되풀이 하지 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말을 많이 하고 또 크게 해야만 하나님께서 들으실 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벌써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물론 우는 자식에게 부모님들이 떡 하나 더 주시지만 부모님께서 자식이 필요한 것을 다 아실테니까 차분하게 앉아서 공부하는 자식이 떡을 하나 덜 먹더라도 더 대견한 자식이 아닐까요?
이러한 두 가지 말씀을 가르치시고 나서 주님께서는 9절로 13절에서 그 유명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7가지 간구와 하나의 후렴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을 간구하는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러한 기도의 본질, 즉 내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의 극치는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까지 기도하신 주님의 모습에서 나타납니다.
그런데 성서를 주의 깊게 보면 기도에 대한 주님의 가르치심이 끝나고 난 후 조금은 엉뚱한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도대체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시다가 왜 갑자기 남을 용서하라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물론 주기도문 가운데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구절이 있으니까 완전히 엉뚱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서 기도는 바로 하나님과 나와의 대화를 통한 화해이고, 동시에 하나님과 나와의 화해는 구체적으로 이웃과의 대화를 통한 화해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기도는 결코 생활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아무리 입으로는 기도를 그럴 듯하게 잘 한다 하더라도 이웃과의 화해를 추구해 나가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기도는 바로 하나님, 그리고 이웃과의 화해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좀 더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는 말씀을 저는 바로 오늘의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매 여러분의 소원을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줄 압니다. 저는 지금 맨 마지막 부분에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 그것은 바로 평화입니다. 평화는 나 혼자 있을 때 사용하는 말이 아닙니다. 나와 너, 즉 관계 속에서 쓰이는 말입니다. 그리고 평화는 바로 화해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기도는 바로 나와 하나님, 나와 이웃, 나와 너의 사이에 평화를 추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나 혼자 잘 되게 해 달라고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 즉 평화를 이루기 위해 화해의 삶을 살게 해 달라고 하는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제목을 “참 기도의 생활”이라고 잡았습니다. 잘못하면 참 기도의 생활이라고 하니까 하루 스물 네 시간, 만사를 제쳐놓고 무릎 꿇고 기도만 드리라는 말로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 본 하나의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옛날 어느 곳에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어질고 지혜로운 임금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늙어가는 그 임금님의 가장 큰 근심은 당신에게 아들도 없고 딸도 없어서 앞으로 어떻게, 누구에게 임금의 자리를 계승시키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임금님께서는 신하들에게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내가 늙었으니 어서 내 뒤를 이을 임금을 택하시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대신들은
“황공하옵니다. 임금님께서는 만세나 사셔서 영원토록 우리를 다스리옵소서.”라고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몇 년이 지나갔습니다. 임금님은 더 기다릴 수 없어서 당신께서 직접 자기의 후계자를 택하기로 하였습니다.
드디어 어느 날 신하를 불러 분부를 내렸습니다. “누구든지 임금이 되고 싶은 생각이 있는 사람은 다 대궐에 들게 하라. 내가 문제를 내어 합격한 자에게 이 자리를 물려주겠노라”
이 분부가 있자 궁궐은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임금님은 한 사람 한 사람 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험을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다 떨어지고 세 사람만 남았습니다. 그 세 사람은 매우 지혜로와 보이고 체격도 크며 훌륭하게 보였습니다. 그 세 사람의 이름은 길다스, 씨릭, 오스프리스였습니다.
세 사람을 앞에 세우고 임금님은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지혜의 책”을 펴들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책으로 나의 왕국을 다스리었소. 이 책에는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을 위하여 좋은 법이 기록되어 있소. 이제 내가 좋아 하는 법을 읽어줄 터이니 앞으로 한 주간 동안 이 법에 순종하시오. 이 법을 가장 지혜롭게 지킨 자를 나의 후계자로 삼겠소.”
세 사람은 모두 미소를 짓고 정숙하게 귀를 기울렸습니다. 그들은 모두 대단한 이야기가 많이 나올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것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사람은 항상 기도하여야 하느니라.”
임금님은 지혜의 책을 내려 놓았습니다. 어마어마한 법을 기다리던 길다스는 “그것 뿐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임금님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한편 씨릭은 “항상이란 시간을 가리키는 말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도 임금님은 미소를 뛰우시고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다음 오스프리스는 “언제부터 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여기에 임금님은 “이시간부터요”하고, 다시 한번 “사람은 항상 기도하여야 하느니라”라고 읽어 주셨습니다. 세 사람은 아무 말없이 조용히 그 자리를 물러났습니다.
길다스는 즉시 신부들이 모여 기도와 거룩한 명상으로 생활하는 수도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한 주간을 열심히 계속하여 기도하려면 수도원으로 가야만 모든 근심과 걱정을 잊고 기도를 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수도원의 주임 신부는 길다스를 환영하여 방을 하나 주고 항상 기도할 수 있게 협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도사 한 사람으로 하여금 길다스의 수종을 들게 하여 길다스가 쉬지 않고 항상 기도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한편 씨릭은 성당을 찾아갔습니다. 그 성당 안에 있는 성화 앞에 촛불을 켜고 자기가 배워서 아는 기도를 거듭하여 드렸습니다. 그 양초들은 굵고 커서 넓은 대궐이라도 능히 한 주간을 환하게 켤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씨릭은 자기가 무엇이라고 기도하였는지 기억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스프리스는 대궐을 나온 이후 임금님의 분부와 왕위를 위한 경쟁을 잊은 듯 예전대로 부지런히 일만 하였습니다. 그의 생활은 조금도 이전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다만 그는 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친절했고, 조심스럽게 착실히 그리고 부지런히 일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 오스프리스의 친구는 답답하여 그에게 재촉하였습니다.
“여보게, 자네는 길다스처럼 수도원에 기도하러 가지도 않고 또 씨릭처럼 촛불을 켜 놓고 성당에서 기도도 안하니 임금님께서 분부하신 기도는 언제 하려고 하는가? 아마도 자네는 귀한 왕위를 길다스나 씨릭에게 빼앗길 것 같으니 어서 일 그만 두고 이제부터 기도를 시작하게.”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오스프리스는 미소만 가볍게 짓고 여전히 자기 일을 부지런히 계속했습니다.
어느덧 임금님과 약속한 보고의 날이 돌아왔습니다. 길다스, 씨릭, 그리고 오스프리스는 임금님 앞에 가서 보고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먼저 길다스가 말했습니다.
“저는 그동안 수도원에 가서 열심히 쉬지 않고 기도드렸습니다.” 하며 수도원장의 증명서를 임금님께 바쳤습니다.
그 증명서에는 “우리는 길다스가 기도하는 시간을 방해하거나 중단시키지 않기 위하여 길다스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또 그는 잠이 들 때라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손을 합장하고 기도하는 자세를 가지기를 잊지 않았습니다.”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길다스의 보고를 다 들으신 임금님은 “그런가? 그래 자네가 드린 기도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더 행복할 수 있었는가? 또 우리나라가 얼마나 더 잘 되었는가?”하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에 길다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다음 씨릭이 자신의 보고를 증명해 줄 여러 증인들을 데리고 임금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 중에서 씨릭에게 초를 판 초장사가 입을 열어 “씨릭은 많은 돈을 들여 교회 안에 불을 켤 초를 사서 촛불을 켜고 기도를 드렸습니다.”하고 증명하였습니다. 또 길을 청소하는 청소부는 “이 분은 길을 걸을 때라도 손을 모으고 기도하였습니다.”라고 증명하였습니다.
씨릭의 보고를 다 들으신 임금님께서는 “수고했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기도한 결과 이 나라가 좀 나아졌는가? 우리 백성들 가운데 자네의 기도로 말미암아 좀 더 용감해지고 지혜로와진 사람이 생겼는가?”하고 물었습니다. 씨릭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다음 오스프리스는 혼자서 겸손히 임금님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조용하게 그러나 똑똑한 음성으로 “저는 지나간 한 주간도 보통 때나 마찬가지로 분주하게 보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부탁한 일이 있었고 또 저는 그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하므로 시간을 내서 수도원에 갈 수 없었고 또 성당에 찾아가서 촛불을 켜 놓고 기도드릴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언제나 일을 시작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매일 지냈습니다. 이같이 기도하는 마음과 태도는 제가 이전부터 지켜왔고 또 앞으로도 계속하려는 것입니다.”라고 공손히 말하였습니다. 이 때 임금님은 “자네가 일을 하러 갈 때마다 하나님과 기도로 의논하고 일했다니 좀 더 자세히 말해주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스프리스는 더 겸손하게 “별로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다만 저는 제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항상 계실 수 있는 마음자리를 준비하려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무슨 일을 당할 때 제가 혼자서 하려고 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하시도록 하면 저는 언제나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일도 잘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들으신 임금님은 머리를 끄덕이시며 기뻐하셨습니다.
이 때 밖에서 많은 군중들이 웅성거리며 몰려 왔습니다. 문지기들은 그들을 막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임금님이 다들 들어오게 하라고 명령하시자 많은 군중들은 임금님 앞에 나아와 한결같이 그 동안 오스프리스가 저들에게 얼마나 친절했고 많은 도움을 주었는가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오스프리스야말로 저들의 임금님이 되어야 한다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 때 임금님께서도 “그렇소. 내가 사랑하고 귀하게 읽어오던 지혜의 책도 바로 오스프리스가 지켜온 그 행위의 뜻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오. 사람이 언제나 항상 기도한다는 것은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오.” 하시고 천천히 보좌에서 일어나 오스프리스의 손을 잡고 그를 용상에 앉게 하시고 왕관을 씌어 주시며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참 기도의 생활이 됨으로 말마암아 하나님의 사랑과 화해와 평화의 복음을 이웃들에게 증거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바로 그럴 때 우리는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를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1983 년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83. 6. 18 /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 고린도전서 13:1-3 (0) | 2015.03.05 |
---|---|
1983. 6. 12 / 평화의 왕 / 이사야서 9:1-7 (1) | 2015.03.05 |
1983. 5. / 카인의 후예 / 창세기 4:1-16 (0) | 2015.03.05 |
1983. 4. 24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 시편 23편 (0) | 2015.03.05 |
1983. 4. 18 / 탕자 돌아오다 / 누가복음 15:11-32 (0) | 2015.03.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