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06.9.17-10.4.18)/2008 년도

2008. 12. 28 / 고난받는 엘리야 / 마태복음 17:10-13

람보 2 2015. 4. 3. 18:04

고난받는 엘리야/2008.12.28

본문) 마태복음 17:10-13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확실히,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회복시킬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하고, 그를 함부로 대하였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제서야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오늘의 본문은 조금 엉뚱하게 나타난 것으로 보여집니다. 사실 오늘의 본문을 빼고 읽어도 9절에서 14절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은 이것과 연결지을 만한 구절들이 앞뒤에 나오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이 여기에 왜 나왔는지 궁금해지고, 또 무언가 배경이 될 만한 이야기를 알아야만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대체 예수님 당시 어떤 일들이 있었기에, 특히 세례 요한과 관계되는 이야기들 중에 어떤 것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본문이 기록되었던 것인가?
 
기원전 587년,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바빌론 군대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고, 왕을 비롯한 수많은 귀족과 지배계급들이 포로로 잡혀감으로써 유다 왕국이 멸망당했습니다. 수천 리, 수만리 이역으로 끌려가면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버리셨다는 생각에 좌절했고,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절망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당시 세계를 지배했던 바빌론은 너무나 강대했고, 그 힘은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바빌론이 멸망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채 50년이 지나지 않아서 기원전 539년 고레스라고 하는 젊은 영웅에 의해 바빌론이 멸망당했습니다. 그는 전투도 하지 않고 바빌론을 점령했는데 바빌론의 왕들이 너무나 폭정을 휘둘렀기에 바빌론 성에 살던 수많은 시민들이 고레스를 새로운 왕으로 환영했습니다.


고레스는 자신이 정말로 새롭고 뭔가 이전의 정복자들과는 다른 새로운 정복자임을 과시했습니다. 그의 나라 이름이 바로 페르샤입니다. 이전에 세계를 정복했던 앗시리아인들과 바빌론인들은 수많은 피정복민들을 공포와 무력으로 다스렸지만 고레스는 그들에게 어떤 것들은 허용함으로써 그들의 충성을 얻어냈습니다. 고레스가 허용한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바빌론인들에 의해 유배당했던 민족들은 어느 민족이건 그들이 원할 경우 모두 고국으로, 원래 살던 땅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각각의 나라, 각각의 민족들이 고국으로 돌아간 다음에 자기네 신을 다시 예배할 수 있도록 허용했을 뿐 아니라 격려해 주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전을 짓는데 필요한 비용을 대 주는 일 같은 것들입니다. 이러한 정책들을 모두 모아 역사에서는 소위 “고레스 칙령‘이라고 부릅니다. 그 내용은 구약 에스라기 1장에 들어 있습니다.


어쨌든 고레스 칙령으로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갔고, 그들을 이끈 사람이 왕가 출신의 스룹바벨과 사독 가문의 제사장인 예수아였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상황도 역시 에스라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온갖 우여곡절 끝에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세워졌습니다. 이름하여 제2성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그때가 기원전 515년이니 유대인들이 바빌론에서 돌아온 후 20년도 더 지난 뒤였습니다. 이 성전은 첫 번째 성전, 솔로몬 성전보다는 물론 훨씬 작고 초라한 건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성전은 완공되었고, 성전 완공 기념으로 거창한 유월절 축제가 열렸으니 에스라기 6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유프라테스 서쪽 지방의 닷드내 총독과 스달보스내와 동료 관리들은, 다리우스 왕이 내린 조서에 지시된 대로, 신속하게 처리하였다. 학개 예언자와 잇도의 아들 스가랴가 성전 공사를 격려하였다. 유다의 원로들은 계속하여 성전을 지었고,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명과 페르시아 왕 고레스와 다리우스와 아닥사스다의 칙령을 따라서, 성전 짓는 일을 끝낼 수 있었다. 성전 건축이 끝난 것은 다리우스 왕 육년 아달월 삼일이다. 그때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사로잡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기뻐하면서 하나님의 성전 봉헌식을 올렸다. 하나님께 이 성전을 바치면서, 그들은 수소 백 마리와 숫양 이백 마리와 어린 양 사백 마리를 바치고, 온 이스라엘을 위한 속죄제물로는, 이스라엘 지파의 수대로 숫염소 열두 마리를 바쳤다. 그렇게 한 다음에, 그들은 갈래별로 제사장을 세우고, 무리별로 레위 사람을 세워서,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사로잡혀 갔다가 돌아온 이들은 첫째 달 십사일에 유월절을 지켰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일제히 몸을 씻고서 정결예식을 치렀다. 그런 다음에, 레위 사람들은, 돌아온 이들 모두와 동료 제사장들과 자기들이 먹을 유월절 양을 잡았다. 잡혀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것을 먹었다. 그 땅에 살던 이방 사람들에게서 부정을 탔다가 그 부정을 떨어버리고,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찾아온 이들도, 그들과 함께 유월절 양고기를 먹었다. 그들은 이레 동안 무교절을 즐겁게 지켰다. 주님께서 앗시리아 왕의 마음을 돌이켜서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게 하셨으므로, 그들은 힘을 얻었다. 그들은,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지을 수 있었으므로, 한없이 기뻤다.“   (에스라기 6:13-22) 


자, 이제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 같았습니다. 비록 정치적인 독립까지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성전도 짓고, 신앙의 자유도 얻었으니 마음놓고 하나님도 섬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유대 민족을 저버리지 않으셨고, 끝내 구원의 손길을 베푸신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제 진정 하나님만 섬기고 살아간다면 다시는 멸망과 포로라고 하는 고통을 겪지 않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 그렇게 살겠다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작심삼일이라고, 유대인들은 또다시 너무나 쉽게 죄의 길로 빠져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은 죄란 바로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종교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시대 한 사람의 예언자가 등장했으니 성경은 그를 말라기라고 부릅니다. 말라기가 사람의 이름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마는 그 뜻은 분명합니다. “나의 사자”, “나의 특사”라는 뜻이니 하나님께서 맨 마지막으로 보낸 예언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라기는 제사장들이 지은 죄를 특히 신랄하게 지적합니다. 제사장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우습게 알았으면 제단에 더러운 빵을 바치고, 병든 짐승을 제물이라고 바친다고 꾸짖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공경하고
종은 제 주인을 두려워하는 법인데,
내가 너희 아버지라고 해서
너희가 나를 공경하기라도 하였느냐?
내가 너희 주인이라고 해서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기라도 하였느냐?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제사장들아, 너희가 바로
내 이름을 멸시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가 언제
주님의 이름을 멸시하였습니까?‘ 하고 되묻는다.
너희는 내 제단에
더러운 빵을 바치고 있다.
그러면서도 너희는,
‘우리가 언제 제단을 더럽혔습니까’
하고 되묻는다.
너희는 나 주에게
아무렇게나 상을 차려 주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눈먼 짐승을 제물로 바치면서도 괜찮다는 것이냐?
절뚝거리거나 병든 짐승을
제물로 바치면서도 괜찮다는 것이냐?
그런 것들을
너희 총독에게 바쳐 보아라.
그가 너희를 반가워하겠느냐?
너희를 좋게 보겠느냐?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가 하나님께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간구하여 보아라.
이것이 너희가 으레 하는 일이지만,
하나님이 너희를 좋게 보시겠느냐?“  (말라기서 1:6-9)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짐승을 훔쳐 갖고 와서는 제물이라고 바친다는 것입니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 가운데서라도 누가
성전 문을 닫아걸어서,
너희들이 내 제단에 헛된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하면 좋겠다!
나는 너희들이 싫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가 바치는 제물도
이제 나는 받지 않겠다.
해가 뜨는 곳으로부터 해가 지는 곳까지, 내 이름이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높임을 받을 것이다. 곳곳마다,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바칠 것이다. 내 이름이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높임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그런데 너희는, ‘주님께 차려드리는 상쯤은 더러워져도 괜찮아!’ 하면서, 너희들도 싫어하는 음식을 제물이라고 그 위에 바치니, 너희는 지금 내 이름을 더럽히고 있다. 너희는 또 ‘이 얼마나 싫증나는 일인가!’ 하고 말하며, 제물을 멸시한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는 훔쳤거나 절뚝거리거나 병든 짐승을 제물이라고 가지고 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서 달갑게 받겠느냐? 나  주가 말한다.
자기 짐승 떼 가운데 좋은 수컷이 있어서, 그것을 바치기로 맹세하고서도, 흠 있는 것으로 바치며 속이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나는 큰 임금이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이방 민족들까지도 내 이름을 두려워한다.“     (말라기서 1:10-14)


그렇게 죄를 저지르고 나서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조롱합니다. 
“너희는 말로 나 주를 괴롭혔다.
그런데도 너희는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괴롭게 해 드렸습니까?‘
하고 묻는다. 너희는
‘주님께서는 악한 일을 하는 사람도
모두 좋게 보신다.
주님께서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더 사랑하신다‘
하고 말하고,
또 ‘공의롭게 재판하시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 하고 말한다.“    (말라기서 2:17)


자, 이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 것인가?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실 것인가? 죄 가운데 빠져 살도록 놔두실 것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말라기를 통해 특사를 보내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나의 특사를 보내겠다.
그가 나의 갈 길을 닦을 것이다.
너희가 오랫동안 기다린 주가,
문득 자기의 궁궐에 이를 것이다.
너희가 오랫동안 기다린,
그 언약의 특사가 이를 것이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그러나 그가 이르는 날에,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살아남겠느냐?
그는 금과 은을 연단하는 불과 같을 것이며,
표백하는 잿물과 같을 것이다.
그는, 은을 정련하여
깨끗하게 하는 정련공처럼,
자리를 잡고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
금속 정련공이
은과 금을 정련하듯이,
그가 그들을 깨끗하게 하면,
그 레위 자손이 나 주에게
올바른 제물을 드리게 될 것이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나 주를 기쁘게 할 것이다.“   (말라기서 3:1-4)


여기서 말하는 주의 특사는 바로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는 금과 은을 연단하는 불과 같을 것이며, 표백하는 잿물과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주로 오셔서 죄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용광로의 불길같이,
모든 것을 살라버릴 날이 온다.
모든 교만한 자와
악한 일을 하는 자가
지푸라기같이 타 버릴 것이다.
그 날이 오면,
불이 그들을 살라서,
그 뿌리와 가지를 남김없이 태울 것이다.
그러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할 것이니
너희는
외양간에서 풀려 난 송아지처럼 뛰어다닐 것이다.
내가 그 일을 이루는 그 날에,
악한 자들은 너희 발바닥 밑에서
재와 같이 될 것이니,
너희가 그들을 짓밟을 것이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말라기서 4:1-3)


그런데 여러분!
주님께서 오시기 전, 메시아가 오시기 전, 하나님께서는 먼저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겠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고,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킬 것이다.
돌이키지 아니하면,
내가 가서
이 땅에 저주를 내리겠다.“  (말라기서 4:5-6)


그렇습니다.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먼저 엘리야 예언자가 올 것입니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고,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킬 것입니다. 이것은 작게 보면 가정의 회복이요, 크게 보면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자녀된 인간들의 관계를 회복시키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이루시겠다는 선포인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저주를 내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을 마지막으로 구약의 예언은 끝났습니다. 이제 신약으로 넘어갑니다.


자, 그렇다면 구약의 마지막에 나온 예언,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멜리야가 온다는 예언, 바로 여기서 예언한바 엘리야는 누구인가? 다시 온다는 엘리야,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미리 올 예언자 엘리야는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오늘의 본문은 바로 이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묻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그러니까 오늘의 본문은 지금까지 길게 설명드렸던 말라기서를 이해하지 못하면 도대체 왜 제자들이 이런 질문을 던졌는지를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몇 백 년 전에 말라기 예언자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했는데 그것이 무슨 뜻이냐? 그것이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제자들이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된 배경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있습니다. 말라기서와 복음서 사이에는 사, 오백 년의 간격이 있는데 그 중간에 기록된 책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유대인들의 경전인 집회서 48장에 엘리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때 예언자 엘리야가 불과 같이 일어났으니,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
그는 백성들을 징벌하려는 열정에서
기근의 벌을 내리게 하여 많은 사람을 굶어 죽게 하였다.
주님의 말씀을 받들어 하늘의 문을 닫고
세 번씩이나 불을 내렸다.
엘리야, 신기한 일을 많이 보인 당신의 큰 영광이여!
누가 당신의 자랑스러움과 견줄 수 있으리이까?
당신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말씀을 받들어
죽은 사람을 지옥으로부터 건져냈습니다.
당신은 많은 왕들을 멸망시키고
지체 높은 사람들은 잠자리에서 죽음으로 치닫게 하였습니다.
당신은 시내산에서 책망의 말씀을 들었고,
호렙산에서 징벌의 명령을 받들었습니다.
당신은 왕들을 거룩한 기름으로 성별하여 그들의 원수를 갚게 하고,
당신을 계승할 예언자들에게도 같은 예식을 행하였습니다.
당신은 불마차를 타고
불 소용돌이 속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당신이 심판 날에 와서
하나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 분노의 불을 끄고
아비들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집회서 48:1-10)


결국 오늘의 본문은 세례 요한이 누구냐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입니다. 유대인들에 의하면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다시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와서 이스라엘 백성의 화해를 이루지도 못했고, 야곱의 자손들을 재건하지도 못했으니, 그리고 오히려 헤롯왕에 의해 비참하게 죽었으니 그가 결코 재림한 엘리야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아직 엘리야가 재림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그 다음에 오실 메시아도 아직 오지 않은 것이요, 따라서 예수는 메시아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오늘의 본문은 세례 요한이 누구냐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면서 동시에 예수, 당신은 누구냐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는 왔다. 다만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함부로 대하였다.”


그렇습니다.
세례 요한은 메시아를 예비하러 온 사람입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러 온 선구자입니다. 그러나 그를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오히려 그를 잡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재림할 엘리야로 다시 왔으니 이제 그의 뒤를 아어 등장한 예수 자신은 메시아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메시아를 예비하러 온 사람을 잡아 죽인, 고난을 가하고, 박해를 가한 유대인들이 메시아는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들은 메시아를 예비하러 온 선구자를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메시아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메시아로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고난에 처하게 할 것이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만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로지 영광받는 엘리야, 영광받는 메시아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와 전혀 다른 방법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영광 받는 엘리야, 영광 받는 메시아가 아니라 먼저 고난받는 엘리야, 고난 받는 메시아였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과 예수님과의 결정적이고 근본적인 차이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분리지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교회는 어디에 서 있는가? 오로지 영광만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모두 심각하게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3절에 의하면 제자들은 이제 와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결국 이것을 깨달은 사람들만이 참다운 제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영광만을 추구하고 있는가 아니면 고난을 통한 영광의 길을 추구하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래서 진정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길이요, 영광에 이르는 길입니다. 우리 모두 언제까지나 주님만 따르는 진실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