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생명/2008.12.21
본문) 마태복음 17:1-9
“그리고 엿새 뒤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따로 데리고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와 더불어 말을 나누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여기에다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아직도 말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으며, 몹시 두려워하였다. 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그들에게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다. ‘일어나거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들이 눈을 들어서 보니, 예수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명하셨다.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그 광경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 (표준새번역 개정판)
예수는 누구이신가?
유대인들에 의하면 최고의 지도자는 모세였습니다. 모세는 정치적인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키고 가나안으로 인도한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유대인들에 의하면 모세 이상의 지도자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집트의 지배를 받던 때와 마찬가지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자기들에게 다시 모세와 같은 지도자가 나타난다면 그 모세는 자기들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고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메시아는 제2의 모세와 같은 인물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제2의 모세가 나타나서 자기들을 구원해 줄 것을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바로 그래서 마태복음 기자가 복음서를 쓰면서 곳곳에서 예수를 모세와 비교하며 예수를 제2의 모세로 증거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모세를 뛰어넘는 새로운 모세로 증거하고 있다는 말씀을 자주 드렸습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은 다시 한 번 예수를 모세와 비교하며 예수는 누구이신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선 오늘의 본문은 앞에서 읽었으니까 이것과 비교할 만한 구약 말씀들을 읽어보겠습니다. 이것을 비교하면서 읽어보면 너무나 비슷한 면이 많다는 것을 쉽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선 출애굽기 24:9-18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모세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의 장로 일흔 명과 함께 올라갔다. 거기에서, 그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깔아놓은 것 같으며, 그 맑기가 하늘과 꼭 같았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손으로 치지 않으셨으므로, 그들이 하나님을 뵈며 먹고 마셨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가 있는 산으로 올라와서, 여기에서 기다려라. 그러면 내가 백성을 가르치려고 몸소 돌판에 기록한 율법과 계명을 너에게 주겠다.’ 모세가 일어나서, 자기의 부관 여호수아와 함께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갔다. 올라가기에 앞서, 모세는 장로들에게 일러두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돌아올 때까지 여기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십시오. 아론과 훌이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이니, 문제가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들에게로 가게 하십시오.’
모세가 산에 오르니, 구름이 산을 덮었다. 주님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엿새 동안 구름이 산을 뒤덮었다. 이렛날 주님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셨다.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는 주님의 영광이 마치 산꼭대기에서 타오르는 불처럼 보였다. 모세는 구름 가운데를 지나, 산 위로 올라가서, 밤낮 사십 일을 그 산에 머물렀다.“ (출애굽기 24:9-18)
24장 1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모세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 그리고 장로 일흔 명과 함께 하나님께 올라갑니다. 거기서 그들이 하나님을 뵈며 먹고 마시다가 주님께서 다시 산으로 올라오라고 하시자 모세는 여호수아만을 데리고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고, 아론과 훌은 장로들에게 남겨둡니다. 여기 약간의 혼동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앞에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 뒤에는 여호수아와 아론과 훌 해서 언제나 세 명이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산에 데리고 올라간 사람도 역시 세 사람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모세가 산에 오르니, 구름이 산을 덮었는데, 주님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엿새 동안 구름이 산을 뒤덮었다고 출애굽기 저자는 증거합니다. 예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신 것도 하필이면 엿새 뒤였고, 이 기록은 마태복음 저자가 출애굽기의 기록을 의식해서 기록한 것으로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갔을 때 구름이 덮은 것처럼 예수님과 제자들이 산에 올라갔을 때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다’고 마태복음 기자 역시 증거합니다.
이번에는 출애굽기 34:29-35절까지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모세가 두 증거판을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왔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으므로 얼굴에서 그렇게 빛이 났으나, 모세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였다. 아론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모세를 보니, 모세 얼굴의 살결이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로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였으나, 모세가 그들을 부르자, 아론과 회중의 지도자들이 모두 그에게로 가까이 갔다. 모세가 먼저 그들에게 말을 거니, 그 때에야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그에게로 가까이 갔다. 모세는, 주님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명하였다. 모세는, 그들에게 하던 말을 다 마치자, 자기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 그러나 모세는, 주님 앞으로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말할 때에는 수건을 벗고, 나올 때까지는 쓰지 않았다. 나와서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을 보게 되므로, 모세는 주님과 함께 이야기하러 들어갈 때까지는 다시 자기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 (출애굽기 34:29-35)
자, 모세가 두 증거판을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왔는데, 그때 그의 얼굴에서 빛이 났습니다. 그 이유가 본문에 밝혀져 있는데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으므로 얼굴에서 그렇게 빛이 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 자신은 그러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론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모세를 보니, 모세 얼굴의 살결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에게로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오늘의 본문에 의하면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의 모습이 변하였습니다.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분명히 출애굽기에 나와 있는 이야기들을 본받아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얼핏 보면 예수를 모세와 비교하고 있는 것처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를 제2의 모세라고 증거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미 드러난 것처럼 출애굽기의 이야기들과 마태복음의 증거들 사이에는 아주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도저히 건너뛸 수 없는 깊은 간격이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를 단순히 제2의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 얼굴에서 빛이 나기는 했지만, 자신이 알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순전히 주님과 말씀을 나누었기 때문에 빛이 난 것입니다. 일종의 반사빛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이 빛이시기에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모습이 변하였습니다.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빛을 받아 반사한 모세와 빛 자체이신 예수는 결코 비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렇게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 앞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더니, 예수와 더불어 말을 나누었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 보면 모세와 엘리야가 변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또한 계시록에 오늘의 본문을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이 들어있습니다. 1장 16절입니다.
“또 오른손에는 일곱 별을 쥐고, 입에서는 날카로운 양날 칼이 나오고, 얼굴은 해가 강렬하게 비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요한계시록 1:16)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곁에 가 계신 예수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예수는 그 얼굴이 해가 강렬하게 비치는 것과 같다고 했으니 이는 곧 빛 그 자체임을 나타내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 자체이신 예수를 단순히 모세와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는 모세 그 이상인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는가? 엘리야는 열왕기하 2장에 나오는 것처럼, 그리고 모세는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에 나오는 것처럼 두 사람 다 죽지 않고 산 채로 승천했다는 민간전승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하늘에 사는 존재들이요, 바로 그래서 그들이 하늘에서 영광을 누리는 분들로서 영광스럽게 변화하신 주님을 찾아뵈었다는 설명이 가능합니다. 즉 모세와 엘리야가 인사를 하러 왔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그들이 인사를 하러 온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모세는 율법을 받은 사람이고, 엘리야는 예언자들의 선구자요 대표자로서 산 사람이니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가 바로 예수를 증거하는 책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출애굽기 24장과 34장 그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모세를 향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오늘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기자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말, 그것은 바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좋아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를 따르는 자들은 예수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일찍이 예언자 이사야가 선포한 42장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사람이다.
내가 택한 사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소리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거리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할 것이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쇠하지 않으며,
낙담하지 않으며,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울 것이니,
먼 나라에서도
그의 가르침을 받기를
간절히 기다릴 것이다.“ (이사야서 42:1-4)
그렇습니다.
여기 참으로 놀라운 선포가 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동시에 종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는 사람, 택한 사람,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 이사야서 42장 1-4절의 말씀을 인용한 마태복음 12:18-21절의 말씀에 의하면 야훼의 종으로서의 예수에게는 세 가지 면이 나타났습니다.
하나, 야훼의 종으로서의 조용하고 순한 면.
“그는 다투지도 않고, 외치지도 않을 것이다.
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들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마태복음 12:19)
둘, 야훼의 종으로서의 선하고 자비로운 면.
“정의가 이길 때까지,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 (마태복음 12:20)
셋, 야훼의 종으로서의 이방인 구원의 면
“이방 사람들이
그 이름에 희망을 걸 것이다.“ (마태복음 12:21)
그러나 이제 오늘의 본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야훼의 종으로서 하시는 일이 위 세 가지 외에 한 가지가 더 있으니 이는 바로 큰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지만 그러나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으시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9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명하셨다.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그 광경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
그렇습니다.
예수는 단순한 제2의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광 그 자체이시되 그 영광을 고난받기 위해 내어놓으시고 종의 자리에까지 내려갔던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당신의 아들로 인정하신 분이십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으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6-11)
자, 그렇다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그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예수께서 그렇게 변화하시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을 때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본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으며, 몹시 두려워하였다. 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그들에게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다. ‘일어나거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으며, 몹시 두려워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엎드린 상태가 아니라 너무나 두려워 죽은 것과 같은 상태에 빠진 것을 나타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고,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병든 자를 만지시고, 죽은 자를 만지심으로써 그들을 고치시고, 살려 주셨습니다. 복음서 곳곳에 그런 기록들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많은 무리가 그를 따라왔다. 나병 환자 한 사람이 예수께 다가와 그에게 절하며 말하였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서 그에게 대시고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시니, 곧 그의 나병이 나았다.” (마태복음 8:1-3)
“예수께서 그 지도자의 집에 이르러서, 피리를 부는 사람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두 물러가거라. 그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그들은 예수를 비웃었다. 무리를 내보낸 다음에, 예수께서 들어가셔서, 그 소녀의 손을 잡으시니, 그 소냐가 벌떡 일어났다. 이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졌다.” (마태복음 9:23-26)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두려움에 떨며 엎드려 있는 제자들에게 ‘가까이 오셔서’라고 기록되어 있는 7절의 표현은 마태복음에 딱 한 군데 더 나오고 있는데 바로 마태복음 28:18입니다.
“예수께서 다가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8:18-20)
그렇습니다.
예수는 피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엎드려 죽어 있는 것 같은 제자들을 곧게 하시며, 제자들에게 진정한 생명을 되돌려 주시는 죽음을 극복한 주로써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예수는 삶과 죽음을 지배하는 주님으로서 제자인 우리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궁극적으로 모든 공포를 없애주시고, 생명을 부여하시면서 우리를 어루만져 주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예수 안에서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본문은 바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바로 우리 눈앞에서 그렇게 빛으로 변하신 주님을 우리가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주님만을 만났을 때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엎드릴 것인데 그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에게 손을 대시고 불러일으키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그 예수 안에서 희망을 갖고 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만이 생명이십니다. 예수가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그분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집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요한복음 11:25-26)
성탄을 맞으며 이 믿음 안에서 평화를 누리며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태복음강해(06.9.17-10.4.18) > 2008 년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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