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태복음 16:13-16
“예수께서 빌립보의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가운데에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 (표준새번역 개정판)
우리 주님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참으로 궁금하셨던 것 같습니다. 당신이 많은 설교도 하시고, 많은 기적도 행하셨는데 그런 것을 듣고 본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일까 궁금하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제각기 들은 이야기를 꺼내 놓았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잘 정리가 되어 있지만 사실은 열두 제자가 제각기 떠들어 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을 종합해 보니까 세 사람의 이름이 나타난 것이지요.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또는 예언자들 가운데에 한 분.
그렇다면 왜 구약에 나오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의 이름이 나왔을까요? 무언가 비슷한 것이 있으니까 그 이름이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물론 요한은 마태복음 14장 1-2절의 말씀과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그 무렵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서, 자기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그 때문에 그가 이런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
그러니까 궁궐에 사는 왕도 소문을 듣고 믿을 만큼 예수는 다시 살아난 세례 요한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구약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 가운데 에녹과 함께 오직 두 사람만이 죽지 않고 살아서 승천했다고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가고 있는데, 갑자기 불병거와 불말이 나타나서, 그들 두 사람을 갈라놓더니, 엘리야만 회오리바람에 싣고 하늘로 올라갔다. 엘리사가 이 광경을 보면서 외쳤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마병이시여!’ 엘리사는 엘리야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열왕기하 2:11-12)
그러니까 죽지 않고 승천한 엘리야가 때가 되어서 다시 내려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는 왜 나왔을까요? 당시 사람들은 왜 예수를 예레미야가 다시 나타난 분으로 생각했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우선 구약 외경에 나타납니다.
오늘날 천주교회에서 경전으로 사용하고 있고, 개신교에서는 외경 즉 경전 밖의 경전이라고 부르는 책 가운데 마카비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마카비서 둘째 권에 예레미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책에 의하면 예레미야는 바빌론에게 예루살렘이 파괴되기 전에 장막과 계약궤와 분향제단을 동굴 속에 숨겼는데 하나님께서는 이것들을 마지막 때에 다시 세상에 내놓으신다고 합니다. 공동번역 성서 중에서 인용해 보겠습니다.
“우리의 보조문서 속에서 예언자 예레미야의 이야기를 읽을 수가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잡혀 간 사람들에게, 앞에서 말한 그 제단을 가지고 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율법을 주면서 주님의 계명을 잊지 말 것과 금과 은으로 만든 우상과 그 장식물을 보더라도 미혹되지 말 것을 당부했었습니다. 그 밖에도 이와 비슷한 충고를 했지만 그 중에서도 예언자는 그들의 마음에서 율법이 떠나지 않게 하라고 일렀습니다.
같은 기록에 있는 이야기입니다만, 예레미야는 모세가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보려고 올라갔던 그 산으로 올라갈 때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장막과 계약궤를 따라 다니게 하였습니다. 예레미야가 그곳에 이르렀을 때에 동굴 속에서 방을 하나 발견하고 그 속에다 장막과 계약궤와 분향제단을 안치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입구를 막아 버렸습니다. 그와 함께 갔던 몇 사람이 그 길에 표시를 하려고 그 곳으로 가 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말을 듣고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다시 모으시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실 때까지는 그 장소는 아무도 모르게 감추어 두어야 한다. 그때에 가서 주님께서 이런 일들을 다 드러내 보이시고 주님의 영광과 구름이 나타날 것이다. 그것은 마치 모세 시대에 나타났던 것과 같으며, 솔로몬이 그 거룩한 곳이 영광스럽게 하나님께 바쳐지도록 기도했을 때 나타났던 것과 같다.’ “ (마카비하 2:1-8)
또한 예레미야는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도성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그가 본 영상은 이런 것이었다. 대사제였던 오니아스가 나타나 두 팔을 쳐들고 유다인 전체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그는 선량한 사람으로서 외모가 단정하고 몸가짐이 온유하며 언변에 품위가 있고 어렸을 적부터 온갖 덕행을 쌓은 사람이었다. 그 다음에는 뛰어난 위엄을 지닌 백발노인이 나타났는데 놀랍고도 형언할 수 없는 위풍과 권위가 그를 감싸고 있었다. 오니아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분은 하나님의 예언자 예레미야이십니다. 이분은 우리 민족과 거룩한 도성을 위해 열심히 기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레미야는 그의 오른손을 내밀어 유다에게 황금검을 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님의 선물인 이 거룩한 검을 받으시오. 이 검을 가지고 적군을 쳐부수시오.’ “
(마카비하 15:12-16)
이러한 기록에는 예레미야가 죽지 않고 승천해서 하나님의 품에 있다는 사상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기록들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은 엘리야 뿐만 아니고 예레미야도 죽지 않고 하나님께 가 있으니까 바로 그 예레미야가 다시 인간 세상으로 내려왔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외경의 기록 말고도 예레미야와 예수님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신 것처럼(마 24:1-2), 예레미야도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합니다(렘 26:1-6). 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두개파, 백성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것처럼(마 26:60-61), 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모든 백성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렘 26:7-11). 예수께서도 웃으신 기록은 없지만 여러 번 우신 기록은 있었던 것처럼, 예레미야도 탄식과 눈물을 흘렸기에(렘 9:10) ‘눈물의 예언자’라는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하신 일이 예레미야와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에 예수를 향해 예레미야가 다시 살아온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어 보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대답을 들으신 예수께서는 마침내 제자들을 향해서 물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아마도 이때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하나하나 유심히 쳐다보셨을 것입니다. 하나하나에게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에게 있어서 나의 의미는 무엇이냐?”
대부분의 제자들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을 것입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허둥댔을 것입니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을 것입니다. 그러다 마침내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자, 이게 무슨 뜻인가?
예수는 누구이신가?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가 누구이신가에 대한 대답이 몇 가지로 구분됩니다. 우선 다른 복음서들과 비교해서 마태복음이 가지고 있는 두드러진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가 예언의 성취자요 율법의 참 해석자라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데 비해서 마태복음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무려 열세 번이나 나옵니다.“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이르시기를,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1:22-23)
또한 예수는 율법을 없애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이심을 예수 스스로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은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마태복음 5:17-18)
물론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그리스도 즉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신 까닭에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고 마태복음 기자만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다. 그런데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말하였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 헤롯 왕은 이 말을 듣고 당황하였고, 온 예루살렘 사람들도 그와 함께 당황하였다. 왕은 백성의 대제사장들과 율법교사들을 다 모아 놓고서,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태어나실지를 그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들이 왕에게 말하였다. ’유대 베들레헴입니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 (마태복음 2:1-5)
그러므로 당연히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행하신 모든 말씀과 행적은 다 그리스도의 일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게로 보내어, 물어보게 하였다.” (마태복음 11:2)
이렇게 예수를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것이 마태복음에 모두 열일곱 차례 나옵니다.
그런데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 나온다고 예언자들은 선포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이 열 차례나 나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마태복음 21:9)
그렇다면 다윗은 누구입니까? 유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입니다. 따라서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면 메시아도 왕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본 것처럼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이렇게 물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 (마태복음 2:2)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예수를 임금, 왕이라고 부르는 것이 여덟 차례 나옵니다. 그런데 빌라도나 로마군인들 심지어는 최고 의회 의원들까지 예수를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조롱하기 위해서 부른 것이었지만 자기들도 모르게 인정한 셈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종말 심판 때에는 세상 모든 민족의 “임금”으로 오셔서 모든 민족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25:31-46)
그러나 여러분!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 모든 표현들보다 훨씬 더 예수를 잘 나타내는 표현은, 마태복음 기자가 강조하고 있는 표현은 역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입니다. 아들, 내 아들, 그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 등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씌여진 곳이 무려 스물한 번이나 됩니다. 그리고 이 본문들을 살펴보면 거의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또는 자기도 모르게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우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하나님께서 예수께 친히 내리신 호칭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 때에 하늘이 열렸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오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하였다.“ (마태복음 3:16-17)
“베드로가 아직도 말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태복음 17:5)
또한 배 안에 탔다가 풍랑을 만나 죽을 뻔 했던 무리들이 예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는 무릎을 꿇고 말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마태복음 14:33
심지어는 사탄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험하는 자가 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 (마태복음 4:2)
그렇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것도 죽은 우상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즉 구세주이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앙고백의 핵심이요, 전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주님은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지금까지 뭐라고 대답하며 살아오셨습니까? 또 지금 뭐라고 대답하고 계십니까?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바로 이 물음의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마태복음강해(06.9.17-10.4.18) > 2008 년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8. 12. 7 / 첫번째 수난예고 / 마태복음 16:21-23 (0) | 2015.04.03 |
---|---|
2008. 11. 30 / 하늘나라의 열쇠 / 마태복음 16:17-20 (0) | 2015.04.03 |
2008. 11. 16 / 우리가 떠나야 하는 것 / 마태복음 16:1-12 (0) | 2015.04.03 |
2008. 11. 9 / 하나님께 영광을 / 마태복음 15:29-39 (0) | 2015.04.03 |
2008. 11. 2 / 그 이름에 희망을 / 마태복음 15:21-29 (0) | 2015.0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