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06.9.17-10.4.18)/2008 년도

2008. 12. 7 / 첫번째 수난예고 / 마태복음 16:21-23

람보 2 2015. 4. 3. 17:58

첫 번째 수난예고/2008.12.7


본문) 마태복음 16:21-23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며,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며,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따로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하고 말하면서 예수께 대들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  (표준새번역 개정판)



지금까지 마태복음을 읽어오는 가운데 참 재미있는 것 한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기자가 문장을 시작할 때 많은 경우 시간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예를 들어봅시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다.” (2:1)

  “박사들이 돌아간 뒤에, 주님의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2:13)

  “헤롯이 죽은 뒤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꿈에 나타나서 말하였다"(2:19)                                                                    
   

이런 식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들 중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이 “그 때에”, “그 무렵에”와 같은 단어들입니다. “그 때에”라는 단어는 무려 23번이나 나오고,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는 “그 무렵에”라는 단어는 다섯 번 나옵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 기자는 “그 때에”, “그 무렵에”와 같은 단어로 문장을 시작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시간의 흐름도 나타내고, 이야기의 발전과정도 나타내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이 두 단어와 비슷하지만 약간 차이가 있으면서 이 두 단어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나큰 변화를 일으키는 단어가 있으니 그것은 곧 “그 때부터”라는 단어입니다.

“그 때부터”라는 단어는 우리가 금방 짐작할 수 있는 대로 “그 때부터” 무언가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 ‘그 때부터“는 마태복음 전체를 통해 단 두 번밖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첫 번째가 마태복음 4:17 말씀입니다.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여러분!

바로 이 구절을 기준으로 해서 그 앞부분이 예수의 어린 시절과 공생애 준비과정이라면 이 구절 이후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활동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 기자는 “그 때부터”라는 짤막한 단어를 이용하여 이제 예수의 생애가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음을 나타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4:17에 나오는 표현과 똑같은 표현이 마태복음에 한 번 더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며,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며,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렇습니다.

16장까지 오면서 예수께서는 그 어디에서도 당신의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저 설교하시고, 기적을 베푸시고, 논쟁을 벌이실 뿐이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밝히는데 집중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절정이 바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난주에 보았던 본문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 들어있습니다.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나왔는데, 20절에 그것을 말하지 말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엄명하시기를, 자기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무슨 말입니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이 비밀이라는 것입니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니요? 기껏 베드로가 말했고, 그것을 잔뜩 칭찬하시더니 그것을 일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요? 도대체 왜 이렇게 금지명령을 내리신 것인가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을 말해 보았자 알아들을 리도 없고, 또 이해 가능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제자들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같은 참된 신앙고백을 할 만큼 성장했으니 그들에게만 살짝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 보여준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메시아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어쨌든 이러한 금지명령 끝에 오늘의 본문이 나옵니다. 그리고는 그 본문이 바로 “그 때부터”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의 삶에 있어서 이제부터 무언가 근본적인 변화가 있으리라는 것을 예견하게 합니다.


자, 예수가 그리스도시라면, 예수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그래서 하늘나라를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면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설교인가? 아니면 논쟁인가? 그것도 아니면 기적인가?


세 가지 다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한 가지 방법, 십자가를 통한 죽음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것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며,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며,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며,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는 것만이 세상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임을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당신은 그 길을 갈 수밖에 없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아니기에, 베드로라 하더라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길임을 아시기에 아직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때가 되어가고 있으니, 우선 제자들에게는 그것을 밝힌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을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으로 시작하면서 마태복음 기자는 이어지는 기사를 통해 바로 십자가로 향한 길, 그리고 부활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 다시는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이라는 표현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당연히 제자들도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윗과 같은 왕이 되시리라고 잔뜩 기대했던 제자들, 5병 2어의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자기가 행한 것처럼 우쭐대던 제자들, 이제 앞으로 한 자리 할 꿈에 부풀어 있던 제자들, 그중에서도 신앙고백을 하고 예수께로부터 최대한의 칭찬을 들은 베드로는 그야말로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또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말이고 오로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며” 라는 말씀만 귀에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리고도 베드로와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면 다 끝난 것 아닌가?”

  “그럼 지금까지 행한 것은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럼 난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러다 정신을 차린 베드로가 나섰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따로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하고 말하면서 예수께 대들었다.“


여기 “(베드로가) 예수께 대들었다”고 되어 있는 이 본문은 “베드로가 예수를 꾸짖었다”는 뜻입니다. 제자가 감히 스승을 꾸짖었다는 것입니다. 또 오늘의 본문에는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라고 되어 있지만 이렇게도 번역이 됩니다.

“당신을 가호하소서, 주님. 결코 그런 일이 당신께 닥치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일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서서라도,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막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적으로 보면, 제자의 도리로 보면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예수께서 돌아서서, 말씀하셨다고요? “돌아서서” 라는 이 단어는 이미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향해, 죽음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야말로 망설임없이, 주저하지 않고 이미 고난의 길을 걷기 시작하셨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비겁하게 뒤에 숨어서 예수님을 말렸고, 이에 예수께서 돌아서서, 베드로를 꾸짖으셨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졸지에 사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탄의 일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내 뒤로 물러가라”는 말은 곧 제자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제자는 스승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진대 나를 따르는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의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방해하는 악의 세력입니다. 사탄은 깊은 흉계를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예수의 구원사역을 방해하고자 하는 악의 세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주신 말씀 중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말씀에 나와 있는 대로입니다.

“그러니 두아디라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 곧 사탄의 깊은 흉계에 물들지 않은 사람들인 너희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겠다. 다만 내가 올 때까지, 너희가 가지고 있는 그것을 굳게 붙잡고 있어라. 이기는 사람, 곧 내 일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에게는, 민족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

‘그는 쇠 지팡이로

그들을 다스릴 것이고,

민족들은 마치

질그릇이 부수어 지듯 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내가 나의 아버지께로부터 권세를 받아서 다스리는 것과 같다. 나는 그 사람에게 샛별을 주겠다.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요한계시록 2:24-29)


그렇습니다.

사탄은 깊은 흉계를 지닌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막고, 예수의 사역을 방해해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막으려는 흉계를 지닌 자들입니다. 그들이 흉계를 가지고 있으니, 베드로는 바로 그 사탄의 흉계에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제자들인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는 방법, 그것은 다음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고통과 죽음은 때때로 신앙을 가진 신자들을 유혹하는 걸림돌로 남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선포하는 베드로와 같은 교회의 책임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잊지 말아야 하며,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자신의 연대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존재의미인 것입니다.         

이것을 잃어버릴 때 교회는 아무리 입으로, 말로 훌륭한 신앙고백을 한다 하더라도 사탄의 흉계에 빠진 것이며, 이는 곧 하나님 나라 건설의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사탄의 흉계에 빠져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십자가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고난의 길을 거부하고 사탄의 흉계에 빠져있는 한국교회를 새롭게 함으로 제자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