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06.9.17-10.4.18)/2008 년도

2008. 11. 9 / 하나님께 영광을 / 마태복음 15:29-39

람보 2 2015. 4. 3. 17:47

하나님께 영광을(마15:29-39/2008.11.9)

 

본문) 마태복음 15:29-39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갈릴리 바닷가에 가셨다. 그리고 산에 올라가서, 거기에 앉으셨다. 많은 무리가, 걷지 못하는 사람과 지체를 잃은 사람과 눈 먼 사람과 말 못하는 사람과 그밖에 아픈 사람을 많이 데리고 예수께로 다가와서, 그 발 앞에 놓았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그래서 무리는,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고, 지체 장애인이 성한 몸이 되고,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걸어 다니고, 눈 먼 사람이 보게 된 것을 보고 놀랐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놓고 말씀하셨다. ‘저 무리가 나와 함께 있은 지가 벌써 사흘이나 되었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가엾다. 그들을 굶주린 채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가다가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른다.’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여기는 빈들인데, 이 많은 무리를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무슨 수로 구하겠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일곱 개가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물고기가 몇 마리 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나서, 빵 일곱 개와 물고기를 들어서 감사 기도를 드리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주었다.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나서 남은 부스러기를 주워 모으니, 일곱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도, 남자만 사천 명이었다. 예수께서 무리를 헤쳐 보내신 뒤에, 배에 올라 마가단 지역으로 가셨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에 의하면 오늘의 본문이 두 개의 덩어리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두 개를 하나로 보아야 그 뜻을 좀 더 깊이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29-39절까지를 묶어 설교를 하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누누이 말씀드린 것이지만, 결국 복음서란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네 복음서 저자가 각자 자기의 입장에서 대답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본문 전체를 풀어나갈 때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해 복음서 저자들이 뭐라고 대답하는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특정한 본문만 그런 것이 아니고 복음서 전체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임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저는 바로 이 물음을 직접적으로 던지고 있는 구절을 기억합니다. 마태복음 11장 2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물어보게 하였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    (마태복음 11:2-3)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께로 보내어, 직설적으로 물어 보았다는 것입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바로 그때 예수께서 하신 대답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    (마태복음 11:4-6)


무슨 말입니까?
여기 예수가 메시아이신 증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가 듣고 본 것을 너희의 스승 요한에게 알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듣고 본 것은 무엇입니까? 5절에 그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눈 먼 사람이 본다.
   다리 저는 사람이 걷는다.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된다.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는다.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이런 것들이 예수가 메시아 되심을 나타내는 구체적인 증거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복음서는 곳곳에 이러한 기적 이야기들을 기록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는 이러한 치유기적들을 묶어서 “예수께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는 기록이 다섯 번이나 나오고 있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 오늘의 본문 중 30-31절 말씀이 그 중 다섯 번째, 맨 마지막 말씀인 것입니다.
“많은 무리가, 걷지 못하는 사람과 지체를 잃은 사람과 눈 먼 사람과 말 못하는 사람과 그밖에 아픈 사람을 많이 데리고 예수께로 다가와서, 그 발 앞에 놓았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그래서 무리는,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고, 지체 장애인이 성한 몸이 되고,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걸어 다니고, 눈 먼 사람이 보게 된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런데 여러분!
앞에서 보았던 마태복음 11:4-6까지의 말씀에 나오는 여섯 가지 항목 가운데 성격이 조금 달라 보이는 것이 하나 끼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섯 번째 항목인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는 구절입니다. 앞의 다섯 가지는 다 병자들이나 신체장애자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섯 번째 항목은 엉뚱하게도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격이 전혀 같아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여기에 왜 들어갔는가?


여러분!
예수께 나아왔던 바로 이 사람들, 걷지 못하고, 지체를 잃고, 눈이 멀고, 말을 못하고, 그밖에 아픈 사람들은 모두 다 한결같이 가난한 사람들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들 대부분은 오늘날의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나 빈민촌 사람들과 같이 더럽고 지저분한 환경 가운데 살면서 제대로 먹지 못하고, 깨끗한 물이 없어서 씻지 못하고, 더러운 물을 식수로 쓰는 사람들입니다. 아파도 병원에 갈 돈이 없기에 어디 한 군데 다치거나 곪으면 치료할 방법이 없으니까 그냥 덧나는 형편입니다. 일찍 치료받거나, 약 한 번 쓰면 나을 병에 걸려도 그럴 수 없어서 병이 악화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부자들보다, 마음 놓고 병원에 갈 수 있는 사람들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훨씬 더 쉽게 걷지 못하게 되고, 지체를 잃게 되고, 눈이 멀게 되고, 말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만이 예수께로 나아왔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와 있는 그 많은 기사들 가운데 예수께 고침을 받으려 나왔던 사람들, 그들 중에 제대로 직업이 밝혀져 있는 사람들이 한 두 사람 밖에 없지요. 백부장 또는 회당장 야이로 정도이지요. 그리고 예수께 고침을 받은 사람들 중에 그 누구도 직업이 변변하다든지 이름이 나와 있지 않은 것을 여러분은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대부분 너무나 가난하고, 늘 굶주리고, 사는 환경은 너무나 열악해서 병에 걸리면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께로 나아왔던 사람들이 얼마나 가난했던가? 오늘의 본문 32절에 증거가 나와 있습니다.     
“저 무리가 나와 함께 있은 지가 벌써 사흘이나 되었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가엾다. 그들을 굶주린 채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가다가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른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며칠씩 먹지 못해서 굶주릴 만큼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저 예수님만 바라보고 있을 만큼 무기력한 사람들입니다. 그대로 돌려보내면 가다가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여기 오늘의 본문에는 표현이 완곡하게 나와 있지만 제대로 쓰자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가다가 굶어 죽을지 모른다.”


여러분!
사실 이것은 거기에 모여들었던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니 사실은 이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가다가 밀밭을 지나가게 되었을 때, 그만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 먹었고,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한테 곤혹을 치렀던 사건을 기억하시지요. 그들이 그만큼 굶주렸다는 말입니다. 또 예수께서 하신 말씀도 기억하시지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마태복음 8:20)
 
혹 여러분은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시나요? “예수님은 5병2어의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시니까 먹을 것이 떨어져도 걱정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먹을 것이 떨어지면 얼마든지 먹을 것을 만들어 내실 수 있는 분이니까. 배고픈 것은 걱정하지 않으신 분이실거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는 결코 당신이 배고플 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기적을 행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는 말은 결국 무슨 뜻입니까?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설교를 듣는다”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당연히, 기쁜 소식은 당연히, 가난하기 때문에 먹을 것이 없고 늘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당연히 빵을 얻는 것입니다. 굶주림을 면하는 것입니다. 배부르게 먹는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서 31절까지가 기록된 다음에 예수께서 사람들을 배부르게 먹이시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 예수의 마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당신께 나아온 사람들을 한없이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아파하시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무리가 나와 함께 있은 지가 벌써 사흘이나 되었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가엾다. 그들을 굶주린 채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가다가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보십시오. 예수님을 따른다는 제자들은 무리들을 돌려보낼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다가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돌려보낼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여기는 빈들인데, 이 많은 무리를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무슨 수로 구하겠습니까?’ "
그러니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돌려보내서 빵을 구해 먹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14장에 나왔던 5병 2어 사건 때도 제자들은 그런 말을 했었지요.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그러니 무리를 헤쳐 보내어, 제각기 먹을 것을 사먹게,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태복음 14:15)

그뿐 아닙니다. 제자들은 곳곳에서 귀찮게 하는 사람들을 돌려보내자고 주님께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끝내 그들 모두를 품어주셨습니다.


이후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모든 사람을 배불리 먹였는데, 먹고 나서 남은 부스러기를 주워 모으니, 일곱 광주리에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들 외에도, 남자만 사천 명이었다고 복음서 기자는 증거합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의 본문에 의하면 예수는 누구이신가? 물론 예수는 병을 고쳐주시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들을 배부르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내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시고 품어주시는 분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더욱 확실히 나타내는 구절이 있으니 바로 29절입니다.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갈릴리 바닷가에 가셨다. 그리고 산에 올라가서, 거기에 앉으셨다.”


여러분!
이 구절과 기가 막히게 흡사한 구절이 있는 것 아시지요? 마태복음 5장 1절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그에게 나아왔다.”

그렇습니다.
그 유명한 산상설교의 도입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헌법의 도입부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산상설교를 위의 구절로 시작하면서 예수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오신 분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같은 표현을 29절에 함으로써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도 예수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오신 분이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증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그 놀라운 역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 그것은 바로 31절에 나오는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리고 이는 곧 시편 72편의 성취인 것입니다.  


여러분!
시편 72편은 위대한 왕, 곧 메시아를 노래한 시입니다. 시편 72편 전체가 한 위대한 왕을 위한 시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시편 72편이 메시아를 노래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에 왕이라고 나와 있는 그 존재는 바로 메시아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12-14절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진실로 그는,
가난한 백성이 도와달라고
부르짖을 때에 건져 주며,
도울 사람 없는
불쌍한 백성을 건져 준다.
그는 힘없는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가난한 사람의 목숨을 건져준다.
가난한 백성을
억압과 폭력에서 건져,
그 목숨을 살려주며,
그들의 피를 귀중하게 여긴다.“   (시편 72:12-14)


여러분!
여기 시편 72편에 나와 있는 왕이 하는 일들, 그것이 결국 예수께서 하신 일이 아니던가요?
  가난한 백성이 도와달라고 부르짖을 때 건져 주시는 분.
  도울 사람 없는 불쌍한 백성을 건져 주시는 분.
  힘없는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분.
  가난한 사람의 목숨을 건져주시는 분.
  가난한 백성을 억압과 폭력에서 건져주며, 그 목숨을 살려주며, 그들의 피를 귀중하게 여  기는 분. 바로 메시아 예수가 아니시던가요?

그렇기에 시인은 그의 노래 끝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홀로 놀라운 일을 하시는 분,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영광스러운 그 이름을
영원토록 찬송합니다.
그 영광을
온 땅에 가득 채워 주십시오.
아멘, 아멘.“   (시편 72:18-19)


그렇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로 시편 72편의 성취인 것입니다. 그래서 무리는 말 못하는 사람이,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고, 지체 장애인이 성한 몸이 되고,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걸어 다니고, 눈 먼 사람이 보게 된 것을 보고 놀랐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복음서 기자는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그들에게 양식을 주신 분, 그분은 진정 메시아이며 고통받는 이들의 구원자이십니다. 무리들은 바로 그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발견합니다. 그분은 바로 신앙을 말할 줄 모르는 이들에게 입을 열어주시는 분이시오, 아직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눈을 열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제 무리들이 해야 할 것,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 오로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그것은 바로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그 예수가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기에 언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믿음을 갖고 살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이 은혜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