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술만에라도(2008.10.12)
마태복음 14:34-36
“그들은 바다를 건너가서, 게네사렛 땅에 이르렀다. 그 곳 사람들이 예수를 알아보고, 주위의 온 지방으로 사람을 보내어, 병자를 모두 그에게 데려왔다. 그들은 예수께, 그의 옷술만에라도 손을 대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리고 손을 댄 사람은 모두 나았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제가 마태복음을 갖고 강해설교를 해 오고 있습니다. 1장부터 차례대로 하는 중인데 본문을 갖고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본문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복음서 전체의 흐름 속에서 본문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살펴보고, 그것이 우선 어떻게 큰 덩어리로 나누어지는지를 살펴봅니다. 마태복음이 28장으로 되어 있는데 우선 그것이 크게 몇 개의 덩어리로 나누어지는지, 또 덩어리가 나누어지면 그 덩어리를 다시 몇 개의 본문으로 나눌지 살펴보고, 각각의 본문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봅니다. 그러니까 전체의 흐름 가운데 각각의 본문이 진정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지요. 물론 그 과정에서 본문이 다른 복음서에도 나와 있으면 그 본문들과 같은 점은 무엇이고 다른 점은 무엇인지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본문이 구약과는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도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한 편의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몇 주 전부터 본문을 읽고, 그 본문이 말하는 바를 찾고, 그것을 가장 잘 나타내는 제목은 무엇인지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교 한 편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요즘 설교를 쉽게 준비하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성경구절을 치면 그 구절을 본문으로 한 많은 목사님들의 설교가 뜨고, 또 온갖 예화들도 다 나오니까 그것들 모아서 짜깁기하면 금방 한 편의 설교가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설교가 아니니까 그렇게 하는 설교는 교인들을 속이는 일이지요. 그렇게 설교를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놓고는 사실 고민을 아주 많이 했습니다. 불과 세 절 밖에 되지 않는 짧은 내용이니까 이것만 갖고 한 편의 설교를 하기에는 내용이 너무 빈약할 것 같고, 그렇다고 해서 앞이나 뒤의 본문과 합해서 하기에도 적당하지 않아서 참으로 곤란했습니다.
어차피 오늘의 본문만 갖고 설교를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저는 여기서 복음서 저자를 향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도대체 이 짤막한 본문을 이 위치에 놓아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복음서 저자가 제 귀에 대고 대답을 할 리는 없지요. 그렇지만 저는 이러한 질문을 던지면서 짧은 본문을 자꾸자꾸 읽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제 마음 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렇지. 이 본문과 같은 내용의 말씀이 마가복음서에 또 나와 있지.” 그래서 저는 오늘의 본문을 마가복음의 것과 비교하면서 두 개의 본문을 되풀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본문내용이 많이 다르기를 기대하고 읽었는데, 읽어보니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마가복음이 좀 길다는 것 외에는 별 차이가 없었고, 놓여져 있는 위치도 똑같았습니다. 그러니 다른 점을 찾아서 설교하겠다는 생각도 접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마태복음으로 와서 이번에는 마태복음을 1장부터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의 본문과 비슷한 내용을 갖고 있는 본문을 찾았습니다. 그랬더니 오늘의 본문 말고도 무려 네 군데나 더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한번 찾아서 읽어 보겠습니다.
먼저 4:23-25입니다. 예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나서 제일 먼저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 주셨다. 예수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으로 앓는 모든 환자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과 간질병 환자들과 중풍병 환자들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그리하여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으로부터,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라왔다.” (마태복음 4:23-25)
두 번째는 8:14-17입니다. 예수께서 산상설교를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신 후에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셔서,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을 보셨다. 예수께서 그 여자의 손에 손을 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그 여자는 일어나서, 예수께 시중을 들었다. 날이 저물었을 때에, 마을 사람들이 귀신 들린 사람을 많이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시고, 또 병자를 모두 고쳐 주셨다. 이리하여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그는 몸소 우리의 병약함을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 “ (마태복음 8:14-17)
세 번째는 9:35-38입니다. 8장과 9장에 나오는 기적 사건들의 마무리를 하면서 예수의 사역을 세 가지로 정리하였으니 그 세 번째가 바로 “온갖 질병과 온갖 아픔을 고쳐주셨다”는 것입니다.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온갖 질병과 온갖 아픔을 고쳐주셨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그러므로 너희는 추수하는 주인에게 일꾼들을 그의 추수밭으로 보내시라고 청하여라.’ ” (마태복음 9:35-38)
네 번째가 오늘의 본문이고 다섯 번째가 15:29-31입니다. 이 다섯 번째 본문은 마치 종합판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갈릴리 바닷가에 가셨다. 그리고 산에 올라가서, 거기에 앉으셨다. 많은 무리가, 걷지 못하는 사람과 지체를 잃은 사람과 눈 먼 사람과 말 못하는 사람과 그 밖에 아픈 사람을 많이 데리고 예수께로 다가와서, 그 발 앞에 놓았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그래서 무리는,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고, 지체 장애인이 성한 몸이 되고,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걸어 다니고, 눈 먼 사람이 보게 된 것을 보고 놀랐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마태복음 15:29-31)
자, 여러분은 다섯 가지 본문을 읽으며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에게 몰려든 병자들을 단 한 번도 물리치지 않으시고,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시고 다 고쳐주셨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온갖 질병으로 고통 받는 무리들의 아픔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하나하나 다 치유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기록이 이렇게도 자주, 이렇게도 빈번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인가요? 물론 그만큼 아픈 사람들이 많았다는 증거요, 그들이 다른 곳 어디에도 갈 곳이 없어서 예수를 찾아왔고, 예수만이 그들의 치유자였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예수께서 사시던 당시 유대 땅은 죽음의 땅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죽음의 땅,
원래 가난하면 부자보다 더 아픈 법입니다. 요즘은 너무 잘 먹고 뚱뚱해져서 생기는 병도 있습니다마는 그래도 돈이 많은 사람들은 남들보다 음식도 좋은 것 골라먹고, 건강식품도 많이 먹고, 건강검진도 비싼 것으로 해마다 할 수 있기 때문에 질병도 미리미리 찾아냅니다. 그래서 부자들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 확률이 가난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높습니다. 가난하면 먹는 것도 부실하고, 멜라민 색소가 들어간 외국 식품이나 광우병에 걸렸을 지도 모르는 쇠고기를 그저 싼 값에 사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건강검진을 좀처럼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요, 아파도 병원비 없어서 병원에 가지 못하다가 결국 병을 키워서 일찍 세상을 떠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요즘 건강보험 때문에 말이 많습니다. 우리 사회에 있는 건강보험이 그래도 다른 나라에 비해서 제도적으로 잘 됭 있는 것이랍니다. 그런데 이제 미국식으로 바꿔서 소위 민간보험을 더 많이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미국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미국인들 중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사람이 수 천만 명이고, 미국에서 파산당하는 사람들의 절대다수는 병원비 때문이라는 통계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사는 한국인들이 병원에 갈 일이 생기면 참고 참다가 한국에 와서 치료를 받는답니다. 비행기표 값을 계산해도 그게 남은 장사라는 거지요. 우리나라도 그런 미국식을 따라간다니 참으로 큰일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2,000년 전 유대 땅, 그것도 ‘암 하렛츠’라고 불리던 땅의 백성들이야 더 말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한 마디로 가난하니까 더 자주 병에 걸리고, 돈이 없으니 치료받을 수 없고, 그러니 병에 걸렸다 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살던 땅,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예수를 찾아왔던 수많은 병자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죽음의 땅에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죽음의 땅에 빛이 비치었으니 마태복음 4:12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다고 하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는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 바닷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다.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스불론과 납달리 땅,
요단 강 건너편,
바다로 가는 길목,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었다.‘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마태복음 4:12-17)
그렇습니다.
일찍이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땅,
요단 강 건너편,
바다로 가는 길목,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었다.“
그렇습니다.
마태복음에 다섯 번씩이나 나오는 이러한 구절들은 바로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으로 오신 예수, 구세주로 오신 예수를 증거하는 기록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기자는 비슷한 이야기를 쓰고 또 쓰고, 되풀이 썼던 것입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기자가 이 사건들을 얼마나 강조했는지는 마가, 누가와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다섯 번이나 나오는 이러한 기사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두 개씩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기자만이 유난히 예수를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으로 오신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오늘의 본문을 조금 자세히 들여다봅시다. 오늘의 본문은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나오지 않고 오직 마가복음에만 나옵니다. 거기에도 마태복음과 같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마을이든 도시이든 농촌이든, 어디에 들어가시든지, 사람들이 병자들을 장터거리에 데려다 놓고, 예수께 그 옷술 만에라도 손을 대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리고 손을 댄 사람은 모두 병이 나았다.” (마가복음 6:56)
특별히 마가복음에는 “사람들이 병자들을 장터거리에 데려다 놓고”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장터거리로 예수께서 찾아가셨고, 사람들이 병자들을 그곳으로 데려왔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그러한 표현이 나오지 않지만 어쨌든 사람들이 병자들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두 군데 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방법이 좀 특이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그의 옷술 만에라도 손을 대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들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을 하나하나 “네 병이 나았다” 하고 말씀하시지 않더라도, 예수께서 입으신 옷에 달린 옷술에 손을 대면 다 나았다는 것입니다.
옷술에 손을 대면 다 나았다고요? 옷술이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이 겉옷 자락에 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모세가 유대인들에게 명령한 바 있습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입은 겉옷 자락 네 귀퉁이에 술을 달아야 합니다.” (신명기 22:12)
왜 겉옷 자락 네 귀퉁이에 술을 달아야 합니까? 그 이유가 민수기에 나와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라. 그들에게 일러라.
너희는 대대손손 옷자락 끝에 술을 만들어야 하고, 그 옷자락 술에는 청색 끈을 달아야 한다. 너희는 이 술을 볼 수 있게 달도록 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주의 모든 명령을 기억하고, 그것들을 실천할 것이다. 그래야만 너희는 주의 모든 명령을 기억하고, 그것들을 실천할 것이다. 그래야만 너희는, 마음 내키는 대로 따라가거나 너희 눈에 좋은 대로 따라가지 아니할 것이고, 스스로 색욕에 빠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나의 모든 명령을 기억하고 실천할 것이며, 너희의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될 것이다. 나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었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 (민수기 15:37-41)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이 겉옷 자락에 다는 옷술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하고 지키게 하기 위한 징표였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하고 실천하며,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도록 하는 징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도 명령을 어기고 어긋나니까 그것이라도 보고 제발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가르쳐 주기 위해서 옷술을 달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바로 그 옷술이 생명을 구원하는 징표가 되었습니다. 온갖 병자들이 예수님의 겉옷에 매달린 옷술에 손을 대기만 하면 병이 나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에서 경계의 징표였던 옷술이 신약에서는 구원의 징표로 변했습니다. 그것은 온전히 예수라는 분 때문이었습니다.
자, 여러분!
옷으로 기적을 일으킨 사람들이 구약에 있는데 누구인지 기억하시나요? 예언자 엘리야와 그의 제자 엘리사입니다. 그 두 사람은 나란히 옷으로 기적을 행했습니다. 열왕기하 2장을 보면 거기에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는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사가 스승인 엘리야를 끝까지 따라가려고 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주님의 분부대로 요단강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너는 여기에 남아 있거라.’ 그러나 엘리사는 ‘주님께서 살아계심과 스승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나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함께 길을 떠났다. 예언자 수련생들 가운데서 쉰 명이 요단강까지 그들을 따라갔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요단강 가에 서니, 따르던 제자들도 멀찍이 멈추어 섰다. 그때에 엘리야가 자기의 겉옷을 벗어 말아서, 그것으로 강물을 치니, 물이 좌우로 갈라졌다. 두 사람은 물이 마른 강바닥을 밟으며, 요단강을 건너갔다.” (열왕기하 2:6-8)
잠시 후 엘리야와 엘리사가 이야기를 하면서 가고 있는데, 갑자기 불병거와 불말이 나타나서, 그들 두 사람을 갈라놓더니, 엘리야만 회오리바람에 싣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엘리사가 이 광경을 보면서 외쳤습니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마병이시여!” 이후 엘리사는 다시는 엘리야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엘리야가 승천한 후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엘리사는 슬픔에 겨워서, 자기의 겉옷을 힘껏 잡아당겨 두 조각으로 찢었다. 그리고는 엘리야가 떨어뜨리고 간 겉옷을 들고 돌아와, 요단강 가에 서서, 엘리야가 떨어뜨리고 간 그 겉옷으로 강물을 치면서 ‘엘리야의 주 하나님, 주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하고 외치고, 또 물을 치니, 강물이 좌우로 갈라졌다. 엘리사가 그리로 강을 건넜다.” (열왕기하 2:12-14)
그렇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도 분명히 겉옷을 가지고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적은 둘 다 강물을 가르는 기적이었고, 그것으로 혜택을 입은 사람은 본인들뿐이었습니다. 그 기적으로 인해 누가 살아난 것도 아니고, 누가 고침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결코 당신이 혜택을 입는 기적은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번도 기적을 행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온전히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기적만 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위대한 예언자였던 엘리야나 엘리사와 비교할 수 없는 분,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은 아주 짤막하지만 예수가 바로 흑암에 잠긴 땅에 빛으로 오신 분이시고,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실 메시아이심을 증거하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는 누구이신가?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그분에 옷술만에라도 손을 댄 사람은 모두 나았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손을 내밀어 그의 옷술 만에라도 손을 댄다면 누구나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 곁에 계셔서 손을 대라고, 옷술을 만지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약속하셨습니다. “손을 댄 사람은 모두 나았다.”
우리 모두 이 약속을 믿고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태복음강해(06.9.17-10.4.18) > 2008 년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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