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히 여기시고/2008. 9. 21
본문) 마태복음 14:13-21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거기에서 배를 타고, 따로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다. 이 소문이 퍼지니, 무리가 여러 동네에서 몰려 나와서, 걸어서 예수를 따라갔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 가운데서 앓는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저녁때가 되니,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그러니 무리를 헤쳐 보내어, 제각기 먹을 것을 사 먹게,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러갈 필요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습니다.’ 이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을 이리로 가져오너라.’ 그리고 예수께서는 무리를 풀밭에 앉게 하시고 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축복 기도를 드리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이를 무리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남은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어린아이들 외에, 어른 남자만도 오천 명쯤 되었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5병 2어의 기적만큼 널리 알려진 것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선 네 복음서에 다 나와 있고, 또 내용 자체도 드라마틱해서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합니다. 너무나 유명한 사건이라서 제가 여기서 내용을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네 복음서에 나오는 5병 2어의 기적 이야기는 복음서에 따라 조금씩 다른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예를 들어서 마태와 마가에 의하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다고 되어 있는데 비해서 누가복음에는 벳세다라는 고을로 물러가셨다고 되어 있고, 요한복음에는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니 큰 무리가 예수를 따라갔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날이 저물고 먹을 것이 없게 되었을 때 제자들이 먼저 예수께 청합니다.
“여기는 빈 들이고,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헤쳐 보내어, 제각기 먹을 것을 사 먹게 마을로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전혀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침 유대 사람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서,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모여드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어디에서 빵을 사다가,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예수께서는 빌립을 시험해 보시고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하실 일을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빌립이 예수께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 사람들에게 모두 조금씩이라도 먹게 하려면, 빵 이백 데나리온 어치를 가지고서도 충분하지 못합니다.’ 제자 가운데 하나이며 시몬 베드로와 형제간인 안드레가 예수께 말하였다. ‘여기에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 한 아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요한복음 6:5-9)
이렇게 요한복음에는 어린아이 하나가 가지고 있던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는데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어린아이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고 단지 제자들이 갖고 있던 것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요한복음에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기록까지 남아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참으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그 예언자이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억지로 자기를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요한복음 6:14-15)
이렇게 놓고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5병 2어의 기적 이야기는 큰 테두리에서는 같은데 세부적인 면을 들여다보면 미묘한 차이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그것은 다 그러한 차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미묘한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것을 한 마디로 5병 2어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에는 변하지 않는 공통점이 있으니 바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였다는 것과 그렇게 먹고도 기가 막히게도 열두 광주리나 남았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곧 이 기적의 핵심이 바로 5병 2어와 열두 광주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물론 여기서 엉뚱한 질문을 하나 던질 수 있습니다. “도대체 사람들도 살지 않는 광야인데 광주리 열두 개는 어디서 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 미리 준비했나? 어디 가서 사 왔나? 알 수도 없고 이야기의 핵심도 아니기에 그냥 넘어갑니다.
어쨌든 오늘의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하는 것, 바로 복음서란 “예수는 누구이신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은 주로 구약과의 관계 속에서 예수가 누구이신지를 밝히는 책이라는 것 또한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저자가 예수를 증거하면서 즐거이 비교대상으로 삼은 존재가 있으니 그가 바로 모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읽을 때 모세를 생각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여러분!
모세가 누구입니까?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하던 히브리 백성들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지도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모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니 마태복음이 예수를 증거하는 가장 좋은 방법, 즐겨 쓴 방법은 바로 예수를 제 2의 모세,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모세보다 더 뛰어난 민족의 구세주라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히브리 백성들을 인도해낼 때 그들에게 무엇을 먹였습니까? 바로 만나와 메추라기였습니다. 출애굽기 16장에서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시게 된 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렀다.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둘째 달 보름이 되던 날이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항의하였다.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 땅 거기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음식을 먹던 그 때에, 누가 우리를 주님의 손에 넘겨주어서 죽게 했더라면 더 좋을 뻔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지금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나와서, 이 모든 회중을 다 굶어 죽게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먹을 것을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줄 터이니, 백성이 날마다 나가서, 그날 그날 먹을 만큼 거두어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그들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하여 보겠다. 매주 엿샛날에는, 거두어들인 것으로 먹거리를 준비하다 보면, 날마다 거두던 것의 두 배가 될 것이다.’ ” (출애굽기 16:1-5)
“그 날 저녁에 메추라기가 날아와서 진 친 곳을 뒤덮었고, 다음날 아침에는 진 친 곳 둘레에 안개가 자욱하였다. 안개가 걷히고 나나, 이럴 수가, 광야 지면에, 마치 땅 위의 서리처럼 보이는, 가는 싸리기 같은 것이 덮여 있는 것이 아닌가! 이스라엘 자손이 그것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서로 ‘이게 무엇이냐?’ 하고 물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당신들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입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에게 명하시기를, 당신들은 각자 먹을 만큼씩만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당신들 각 사람은, 자기 장막 안에 있는 식구 수대로, 식구 한 명에 한 오멜씩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 (출애굽기 16:13-16)
그렇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은 광야로 나온 후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하나님께 원망을 퍼부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불평과 불망에 가득 차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이기는 하셨으나 그와 동시에 그들을 재앙으로 치셨습니다.
“주님께서 바람을 일으키셨다. 주님께서 바다 쪽에서 메추라기를 몰아, 진을 빙 둘러 이쪽으로 하룻길 될 만한 지역에 떨어뜨리시어, 땅 위로 두 자쯤 쌓이게 하셨다. 백성들이 일어나 바로 그 날 온종일, 그리고 밤새도록, 그리고 그 이튿날도 온종일 메추라기를 모았는데, 적게 모은 사람도 열 호멜은 모았다. 그들은 그것들을 진 주변에 널어놓았다. 고기가 아직 그들의 이 사이에서 씹히기도 전에, 주님께서 백성에게 크게 진노하셨다. 주님께서는 백성을 극심한 재앙으로 치셨다. 바로 그곳을, 사람들은 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다. 탐욕에 사로잡힌 백성을 거기에 묻었기 때문이다.” (민수기 11:31-34)
그런데 잘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어 먹게 하셨습니다마는 이때 모세가 한 일은 단지 그런 기적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리는 것뿐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해주는 것뿐이었습니다. 모세는 단순히 전달자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친히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축복기도를 하심으로써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무리를 풀밭에 앉게 하시고 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축복 기도를 드리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이를 무리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남은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어린아이들 외에, 어른 남자만도 오천 명쯤 되었다.”
(마태복음 14:19-21)
그렇습니다.
모세는 단순히 하나님 명령의 전달자였으나 예수는 친히 기적을 일으키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는 단순히 제 2의 모세가 아니라 모세보다 더 뛰어나신 분,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증거인 것입니다.
구약에 의하면 이러한 기적을 일으킨 사람이 또 하나 등장합니다. 바로 엘리사입니다.
“어떤 사람이 바알살리사에서 왔다. 그런데 맨 먼저 거둔 보리로 만든 보리빵 스무 덩이와, 자루에 가득 담은 햇곡식을,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지고 왔다. 엘리사가 그것을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라고 하였더니, 그의 시종은 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그것을 어떻게 내놓겠느냐고 하였다. 그러나 엘리사가 말하였다.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여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것을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으니, 주님의 말씀처럼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았다.” (열왕기하 4:42-44)
여기 보니까 누군가가 보리빵 스무 덩이와 자루에 가득 담은 햇곡식을, 엘리사에게 가져왔습니다. 그것으로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보리빵 스무 덩이로 백 명을 먹이는 것,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는 것.
분명히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이 엘리사의 기적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는 예언자 엘리사보다 훨씬 더 위대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본문이 과연 예수께서 엄청난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증거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가? 그것뿐인가?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차이점 말고도 모세나 엘리사와 예수 사이에는 아주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아니 사실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적을 행하는 마음의 차이, 자세의 차이입니다.
모세, 그는 분명히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마는 그도 역시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을 털어놓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민수기 11장에 모세의 그러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백성이 각 가족별로, 제각기 자기 장막 어귀에서 우는 소리를 들었다. 주님께서 이 일로 대단히 노하셨다. 모세는 그 앞에서 걱정이 태산 같았다. 모세가 주님께 여쭈었다.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주님의 종을 이렇게도 괴롭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저를 주님의 눈 밖에 벗어나게 하시어, 이 모든 백성을 저에게 짊어지우십니까? 이 모든 백성을 제가 배기라도 했습니까? 제가 그들을 낳기라도 했습니까? 어찌하여 저더러, 주님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마치 유모가 젖먹이를 품듯이, 그들을 품에 품고 가라고 하십니까? 백성은 저를 보고 울면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고기를 달라!‘하고 외치는데, 제가 어디서 구할 수 있습니까? 저 혼자서는 도저히 이 모든 백성을 짊어질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너무 무겁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정말로 이렇게 하셔야 하겠다면, 그리고 제가 주님의 눈 밖에 나지 않았다면, 제발 저를 죽이셔서, 제가 이 곤경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 (민수기 11:10-15)
그렇습니다.
모세는 자기가 진 짐이 너무나 무겁다고,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장로들 일흔 명을 세워서 짐을 나누어지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대책을 세워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모세가 되물었다. ”저를 둘러싸고 있는 백성의 보행자가 육십만 명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고기를 주어, 한 달 내내 먹게 하겠다‘ 하고 말씀하시나, 그들을 먹이려고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그들이 만족해하겠습니까? 바다에 있는 고기를 모두 잡은들, 그들이 만족해하겠습니까?”
주님께서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의 손이 짧아지기라도 하였느냐? 이제 너는 내가 말한 것이 너에게 사실로 이루어지는지 그렇지 아니한지를 볼 것이다.“ ” (민수기 11:21-23)
그렇습니다.
그 위대한 지도자 모세도, 그렇게 믿음이 좋은 것으로 알려진 지도자 모세도 이 긴급한 상황에 처하자 하나님께 불평하고,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무려 60만이나 되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먹이시겠느냐고 하면서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께서는 철저하게, 끝까지 몰려든 무리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을 배불리 먹이셨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거기에서 배를 타고, 따로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다. 이 소문이 퍼지니, 무리가 여러 동네에서 몰려 나와서, 걸어서 예수를 따라갔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 가운데서 앓는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저녁때가 되니,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그러니 무리를 헤쳐 보내어, 제각기 먹을 것을 사 먹게,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러갈 필요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가 모세보다 위대하고, 엘리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신 이유,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병들고, 배고프고, 지치고, 갈 곳 없는 무리들을 결코 내치지 않으시고 또 하나님을 향해 원망을 퍼붓지 아니하고 그들을 한없이 사랑하신 그 사랑이 예수의 존재이유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말하고자 했던 것, 그것은 기적 자체가 아니라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그것입니다.
덧붙이는 말, 그렇다면 왜 하필 먹고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인가? 이것은 당연히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나타냅니다. 예수께서 메시아로 오셔서 흩어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회복시키시리라는 것, 그리고 새로운 이스라엘로서의 열두 제자를 나타내는 표상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예수는 이 사건을 통해 예언자 이사야가 꿈꾸었던 하나님 나라에서의 잔치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만군의 주님께서
이 세상 모든 민족을
여기 시온 산으로 부르셔서,
풍성한 잔치를 베푸실 것이다.
기름진 것들과 오래된 포도주,
제일 좋은 살코기와 잘 읽은 포도주로
잔치를 베푸실 것이다.
또 주님께서 이 산에서
모든 백성이 걸친 수의를 찢어서 벗기시고,
모든 민족이 입은
수의를 벗겨서 없애실 것이다.“ (이사야서 25:6-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왜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합니까? 그분이 많은 기적을 행했기 때문입니까? 그분이 많은 설교를 하셨기 때문입니까? 물론 그것도 필요합니다마는 그보다 바로 그분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기 때문입니다. 5병 2어로 오천 명을 먹였다는 기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일생을 그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사셨기에 우리는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분을 따라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이 사랑 가지고 일생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태복음강해(06.9.17-10.4.18) > 2008 년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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