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년도

2006. 9. 10 /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 요한복음 21:20-25

람보 2 2015. 3. 31. 23:03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복음 21장 20~25절/2006년 9월 10일



  제가 요즘 주로 강의하러 다니는 MBTI, 즉 성격유형검사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네 가지 쌍으로 이루어진 선호성이 있습니다. 즉 세상을 살아가면서 각자 선호하는, 즉 즐겨 사용하는 성격들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을 네 가지 쌍, 그러니까 여덟 가지 단어로 나타내는 것이지요.


  첫 번째로 에너지의 방향, 즉 삶의 에너지를 어디서 얻는가에 따라 외향성과 내향성으로 나눕니다.

  두 번째로 소위 인식기능, 즉 정보를 수집하는 기능의 차이에 따라 감각형과 직관형이 있습니다.

  세 번째로 판단기능이 있는데 즉 감각이나 직관을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뭔가를 판단하고 결정할 때 그 기준이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선호하는 기준의 차이에 따라 어떤 사람은 사고를 중심으로 판단을 하고 어떤 사람은 감정을 중심으로 판단을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사고형과 감정형으로 나눕니다.

  네 번째로 외부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이나 태도의 차이에 따라서 나눕니다.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면서 곧바로 판단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는 과정 자체를 즐깁니다. 이것을 각각 판단형과 인식형이라고 부릅니다.


  이 네 가지 쌍 중에서 그 차이가 겉으로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을 꼽으라면 외향성과 내향성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내향형들이 자기 내부에서 에너지를 얻기 때문에 비교적 말수가 적고 자기를 잘 드러내지 않는 데 비해서 외향형들은 외부에서 에너지를 얻기 때문에 사람들 만나기 좋아하고, 자기를 쉽게 드러내고 행동이 앞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향형들이 행동을 하기 전에 생각을 먼저 하는 사람들이라면 외향형들은 생각하기 전에 먼저 행동부터 해놓고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외향형의 인물들 중 대표자를 꼽으라면 역시 베드로라고 생각됩니다. 베드로는 아주 전형적인 외향형의 인물입니다.


  베드로,

  성경에 나오는 것을 보면 언제나 자기를 드러내고, 행동이 앞서는 인물이지요,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고 물으시는 주님께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는데 이때 선뜻 ‘주는 그리스도시라’ 고 대답하고 나선 것이 베드로였지요.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몹시 고생한 사건이 성경에 나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배 위에서 고생할 때 예수께서 바다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가셨지요. 모두들 "유령이다"라고 소리치며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런데 여러분, 그때 그 말씀을 듣고 물 위로 뛰어든 사람이 있었으니 그도 역시 베드로였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신다고 해도 지금 파도가 거세게 몰아치고 있는데 거기를 향해 뛰어들었다. 이건 외향형의 사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마태 14장에 의하면 베드로는 처음에는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지만, 그만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소리 질렀지요.

  "주님, 살려주십시오."

  그야말로 물불 안 가리고 전형적인 외향형의 모습입니다.


  예수께서 군인들에게 붙잡혀 가실 때, 칼을 휘둘러 말고 라는 종의 귀를 자른 것도 베드로요,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라. 그리하면 잡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누군가가 "저 분은 주님이시다" 하고 말하자 곧장 바다로 뛰어든 사람 역시 베드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전형적인 외향형의 인물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베드로의 성격을 잘 이용하셔서 그를 교회 지도자로 성장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시 외향형인 사람들이 나서서 일도 만들고, 지도자로서 단체를 이끌어가기도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한복음에는 베드로와는 전혀 다른, 좀처럼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제자들도 있습니다. 분명히 주님의 제자인데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제자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MBTI로 말하면 아주 전형적인 내향형들이 제자들 중에 있다는 말입니다.


  우선 1장 35절부터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음 날 요한이 다시 자기 제자 두 사람과 같이 서 있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서,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하고 말하였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하는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갔다."


  그렇습니다.

  공생애 초기에 세례 요한의 제자 두 사람이 예수를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40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 간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시몬 베드로와 형제간인 안드레였다."

  그러면 나머지 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을 밝혀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데 안드레 외에 다른 한 제자가 누구인지는 어디에도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8장에는 예수께서 재판받으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재판정에 따라 들어간 제자도 두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 하나는 베드로인 것이 분명한 데 나머지 하나는 누구인지 전혀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라갔다. 그 제자는 대제사장과 잘 아는 사이라서,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안뜰에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베드로는 대문 밖에 서 있었다. 그런데 대제사장과 잘 아는 사이인 그 다른 제자가 나와서, 문지기 하녀에게 말하고,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갔다." (요한복음 18장 15-16절)

  그렇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제자도 역시 대제사장과 잘 아는 사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 그 이름이 무엇인지 전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지난주에 살펴보았던 21장 2절에도 역시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은 제자가 둘이나 나옵니다.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제자들 가운데서 다른 두 사람이 한 자리에 있었다."


  그렇습니다.

  복음서에는 베드로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제자들도 있지만 전혀 드러나지 않는, 누군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 누군가 전혀 알려지지 않는 제자들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같이 행동이 앞서는 제자들, 즉 외향형의 제자들을 통해서도 역사하시지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제자들같이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제자들, 즉 내향형의 제자들을 통해서도 역사하심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자,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요한복음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표현을 가진 제자가 한 사람 있습니다. 이런 표현이 공관복음서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데 요한복음에는 다섯 번 씩이나, 그것도 참으로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라는 표현입니다.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난 후, 마음이 괴로우신 상태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요한복음 13장 21절)

  제자들은 놀라서, 서로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가 하고 두리번거리는데 이때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 곧 “예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제자”가 바로 예수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예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제자, 그가 누구인지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은 채 그냥 "예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제자"라고만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그 제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제자들 중 유일하게 그 십자가 밑에까지 따라갔던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운명하시기 직전, 그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고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제자에게는 '자, 이 분이 네 어머니이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는 그를 자기 집으로 모셨다." (요한복음 19장 26~27절)


  또한 20장 2절에 의하면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맨 먼저 발견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런데 그 막달라 마리아는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습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한복음 기자는 또 한 사람의 제자를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라고 표현합니다.


  또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일곱 명의 제자들이 베드로를 중심으로 고기잡이를 하러 디베랴 바다로 내려갔을 때,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그 일곱 명 가운데 끼어있었습니다. 그들은 동틀 무렵이 되었을 때 예수께서 바닷가에 들어서셨으나,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고기를 잡고 나서야 예수를 알아보았습니다. 요한복음 21장 7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가 사랑하시는 제자가 베드로에게 '저분은 주님이시다'하고 말하였다.“


  여러분!

  바로 그 제자가,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예수께서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가 오늘의 본문에 다시 등장합니다.

  예수님과 베드로가 참으로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어디론가 가고 있는데, 베드로가 돌아다보니,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자는 마지막 만찬 때에 예수의 가슴에 기대어서, "주님, 주님을 넘겨줄 자가 누구입니까?"하고 물었던 사람이라고까지 밝혀져 있습니다.


  베드로는 앞에서 자기가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이라는 예고를 들은 터라 그 제자는 어떻게 될 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 물었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제자는 어떻게 되겠느냐? 이 제자도 나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느냐 아니냐 하는 물음이지요.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오늘의 본문에 보면 바로 그래서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 때문에 그 제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예수께서 그 제자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닌데 괜히 소문이 잘못 낫다는 것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죽을지 아닐지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내가 얼마나 진실 되게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를 소개한 요한복음 기자는 그 제자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을 증언하고 또 이 사실을 기록한 사람이 바로 이 제자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요한복음 21장 24절)


  여기에 나오는 "우리"가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마는 결국 요한복음 기자는 바로 본문에 나오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고, 그가 이 모든 일을 증언하고 기록했으며 여기서 "우리"라고 스스로를 칭한 사람들이 그 기록을 물려받아서 간직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베드로같이 활동적인, 자기를 잘 드러내는 사람도 있지만 이름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제자들도 있었고, 또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라고 부를 만큼 좋은 믿음을 가진 제자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칭호를 어떻게 해서 받게 되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본문들을 정리해 보면 짐작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그는 인간적으로 예수님과 아주 가까웠습니다. 그는 식사할 때 늘 예수님 곁에 앉으려 했고, 말씀을 한 마디라도 더 귀담아들으려 했습니다. 또한 그는 남들이 다 도망갔을 때 도망가지 않고 주님의 십자가 밑에 따라갔고, 그의 임종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는 그 누구보다도 용기있는 제자였습니다. 베드로가 행동하는 용기는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 제자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늘 예수님 곁에 있으려 했고, 예수께서 적들에게 붙잡혀 죽음을 당하는 그 순간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임종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인간적인 친밀관계를 물으셨다면 오늘의 주인공인 그 제자는 이미 일찍이 주님과 인간적인 친밀관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그 누구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었고, 그 분의 가르침을 깨달을 수 있었으며, 주님의 죽음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고, 그것이 오늘 우리들에게 요한복음이라고 하는 놀라운 유산으로 전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 생활하는 우리들에게도 공식적인 직함이 있습니다. 목사, 전도사, 권사, 집사 등등. 이 직분이 굉장히 중요해서 교회들마다 그 직분을 차지하느라고 싸움들을 합니다. 뉴스를 보니까 어느 교회 목사님이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들만 장로를 시키려다가 그만 교인들하고 싸움이 나서 지금 재판 중이라지요. 이것은 직분이나 직함을 벼슬로 생각해서 그런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러한 직함이나 직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인간적인 친밀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어떤 명칭보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명칭을 받게 되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목사가 되고, 전도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집사가 되어도 만일 우리가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명칭을 받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모든 그야말로 세상적인 교회 직분을 받기 전에 먼저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명칭을 받아야만 우리가 진정 참다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예수님과 친하다고 말할 수 있는 신앙생활을 하십시다.

  우리 모두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신앙생활을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입술을 통해 그리고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를 증거하는 증인이 되고, 우리의 증언이 참되다고 인정받는 진실된 증인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