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현장에서
요한복음 21장 1~14절/2006년 8월 27일
우리 아이들이 그러더군요. 요즘 왜 설교가 길어졌냐고.
요한복음 21장에는 다른 복음서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독특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으로 삼은 1-14절에는 일곱 명의 사도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사건은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목격자 명단에도 들어 있지 않고, 다른 복음서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15절부터 나오는 베드로 이야기도 역시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독특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두 가지 사건이 둘 다 아주 유명한 사건이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잘 아는 사건들입니다마는 이제 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본문에 접근해 들어가 보고자 합니다. 우선은 본문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궁금한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의하면 디베랴 바다 즉 갈릴리 호수에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는데 그 때 그 자리에 있던 제자들은 모두 일곱 명이었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제자들 가운데서 다른 두 사람이 “한 자리에 있었다” 고 복음서 기자는 증거합니다.
자, 여기에 등장하는 일곱 명이 어떤 사람들인가요?
베드로와 도마와 나다나엘은 요한복음 앞부분에 나왔던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기 나오는 일곱 명의 이름에는 앞부분에 나와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안드레와 빌립의 이름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한 공관복음서에 그렇게도 자주 나오는 야고보와 요한이 요한복음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오늘의 본문에 비로소 등장하는데 그것도 그들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세베대의 아들들이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은 아예 이름이 나오지 않은 채 무명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일곱 명이라는 것만 확실하지 나머지 제자들은 왜 빠진 것인지, 왜 그 일곱 명만 나왔는지 등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일곱이라는 숫자를 통해 “완전한 공동체의 시작” 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는 것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또 하나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분명히 이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이미 두 번 씩이나 만났습니다. 부활하신 첫 날 저녁에 다락방에 숨어 있을 때 나타나신 예수님을 만났고, 이어서 여드레 뒤에 도마가 있을 때 나타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그때 예수님을 바로 코앞에서 만나보았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예수님과 3년 동안이나 같이 지냈던 사람들입니다. 같이 밥먹고, 여행다니고, 잠자면서 일상생활을 함께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분명히 기억했을 것이고, 슬쩍 봐도 예수님인지 아닌지 알아차렸을 것이고, 또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과 쉽게 구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4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미 동틀 무렵이 되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들어서셨으나, 제자들은 그가 예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니 어떻게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말입니까? 분명히 “이미 동틀 무렵이 되었다”고 되어 있으니까 어두워서 알아보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께서 먼저 말을 걸어오셨습니다.
“얘들아, 무엇을 좀 잡았느냐?”
그들이 못 잡았다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리하면 잡을 것이다.”
그래서 그물을 오른쪽에 던졌더니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그들의 그물에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서, 그물을 끌어올릴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제야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베드로에게 “저분은 주님이시다”하고 말하였고, 그 말을 들은 베드로는 일하느라고 벗어두었던 겉옷을 걸치고, 바다 위로 뛰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두 번 씩이나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이, 자기들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결국 그 제자들도 예수께서 다시 한 번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서야 알아보았던 셈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눈으로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 어쨌든 제자들이 배를 돌려 예수님이 계신 땅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예수께서 이미 숯불을 피워 놓으셨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 잡은 생선을 조금 가져오너라.”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가서, 그물을 땅에 끌어내렸는데, 그물 안에는, 큰 고기가 백 쉰 세 마리나 들어 있는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고 성서 기자는 증거합니다.
오늘날 어부들이 고기를 잡으면 모두 몇 마리나 잡았는지 세어보는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세어보았다는 말인데 왜 하필이면 백 쉰 세 마리일까요?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 설명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숫자는 사도들에 의해 ‘낚인’ 사람들의 총계라는 설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사건과 아주 비슷한 사건이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것을 여러분 모두 기억하시지요? 밤새도록 고기를 잡느라 수고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주님이 다가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힘들고 피곤했지만 베드로는 그 말씀에 따라 그물을 내렸고, 그래서 뜻밖의 고기를 잡게 되지요. 두 배에 가득 차게 고기를 잡은 베드로가 주님 앞에 무릎꿇고 외친 말,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바로 그 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지요.
“두려워하지 말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누가복음 5장 10절)
그러니까 오늘의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본격적으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는 사건이고, 그들에 의해 '낚인' 그러니까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의 합계가 백 쉰 세 명인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 백 쉰 세 마리라는 숫자는 디베랴 바다 속에 사는 다양한 물고기들의 종류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설입니다. 그러니까 디베랴 바다에 사는 온갖 종류의 물고기를 빼놓지 않고 다 한 마리씩 잡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바로 앞으로 세계선교를 통해 다양한 민족들이, 세계 모든 민족들이 교회 안으로 몰려들어올 것임을 나타내는 사건이라는 주장입니다.
세 번째는 백 오십삼이라는 숫자는 1부터 17까지의 합계라는 설입니다. 여러분, 한 번 계산해 보십시오. 1부터 10까지는 55이고 거기에 17까지 더하면 153입니다. 그런데 17은 7과 10의 합이지요. 여기서 7은 완전수이고, 10은 완결된 숫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물 안에 물고기 백 쉰 세 마리가 들어 있었다는 것은 교회 안에 하나님의 백성이 완전하고도 완결되게 들어찰 것이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몰려든다 하더라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고 하나로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오늘의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택하셔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고, 그들이 나가서 전도하고 교회를 세울 터인데 그 교회에 교인들이 가득 찰 것이며, 교회는 언제까지나 번창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천주교회를 비롯한 대부분의 교회가 설교하는 전통적인 설명입니다.
여러분!
이 세 가지 주장이 다 그럴듯합니다마는 어쩐지 너무 작위적인 냄새가 풍기지 않습니까? 철저하게 제도화된 교회를 합리화 시켜주기 위한 설명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저는 오늘의 사건에 그 이상의 깊은 의미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바로 삶의 현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의하면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장소는 전부 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지방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원래 제자들의 주 활동무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갈릴리 사람이었고, 따라서 고기 잡는 일이 그들의 주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다는 기록은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로 가서, 예수께서 일러주신 산에 이르렀다. 그들은 예수를 뵙고, 절을 하였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가복음 28장 16~17절)
그렇습니다.
분명히 갈릴리로 가서, 거기서 주님을 만났는데 그 장소는 갈릴리 바닷가가 아니라 어떤 산이었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예수의 명령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산은 이름도 나와 있지 않거니와 제자들의 삶과도 별로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로 되돌아가서 자기들의 생업이었던 고기잡이를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여러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일곱 명의 제자들은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고,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밤을 꼬박 새우고 이미 동틀 때가 되었는데, 그들은 저 앞에 서 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오늘의 본문에는 베드로가 옷을 홀랑 벗은 채 고기를 잡으러 애쓰고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숯불을 피워 놓고 그들을 기다리셨는데 거기에 생선과 빵이 있다고 해서 이 장면을 성만찬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마는 오늘의 본문 그 어디에도 예수님이 성만찬을 행하려 하셨음을 보여주는 장면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만약 이 사건이 성만찬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포도주를 나누는 장면도 나와야겠지요.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는 오히려 밤새 추위에 떨며 고기를 잡던 제자들을 위해 몸소 불을 피워놓으시고 생선을 굽고 빵을 집어주시는, 사람들의 힘들고 어려운 형편으로 들어오셔서 그들을 품어주시고 받아주시는 따뜻한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모습이 그려져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그 어떤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밤새도록 땀흘려 고기를 잡아야 먹고 살 수 있는 삶의 현장으로 찾아오신 예수를 만나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다락방이라는 곳으로도 찾아가셨지만 바닷가라고 하는 삶의 현장으로도 찾아가셔서 그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대화를 나누시면서 바로 그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전할 것을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15절로 넘어가면 아침식사 후에 곧바로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사명을 맡기시는 기사가 실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야 하는 곳은 기도원이나 나무뿌리 부여잡고 기도하는 산골짜기가 아니라 우리가 땀 흘리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던가, 소명을 받는 것은 어느 특정한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기도원이나 교회에서 교인같은 교인들은 너무나 많지만 직장이나 일터 같은 삶의 현장에서는 교인답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입니다. 기도원이나 교회 안에서는 거룩하고 신앙심이 깊은 것 같은데 그곳을 떠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면 너무나 사람이 달라져서 거기에 나타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자기가 예수믿는 사람인 것도 전혀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옷을 홀랑 벗고 고기잡이에 정신이 팔려서 주님도 알아보지 못했던 베드로처럼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 곁에 나타나셔서 당신을 바라보라고, 당신에게 와서 힘을 얻고 나아가 주님의 사랑을 전하라고 조용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으로 찾아오셔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바로 거기에서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이 예수를 만나 힘을 얻고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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