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년도

2006. 8. 13 / 도마를 위한 변명 / 요한복음 20:24-29

람보 2 2015. 3. 31. 22:51

도마를 위한 변명


요한복음 20장 24~29절/2006년 8월 13일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 가장 욕을 많이 먹는 사람은 물론 가룟 유다입니다. 예수님의 신임을 받아 회계책임자이기까지 했으면서도 끝내 스승을 팔아먹었기에 그는 욕을 먹어도 싸다고 평가받습니다. 이후 2천년 동안 가룟 유다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물론이요, 참으로 많은 문학 작품이나 미술, 연극 등 예술 작품들을 통해 엄청난 비난을 받아 왔습니다. 그중에서도 단테가 지은 신곡에 의하면 지옥의 맨 아래층에, 그러니까 아홉 층으로 되어 있다는 지옥 중에서도 가장 깊은 지옥 방에 두 사람이 들어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다른 하나는 부루터스인데 그는 씨저를 배반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쨌든 가룟 유다는 예수를 배반한 죄로 인해 지옥에 떨어졌고, 이후 서양 역사에서 유다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 가룟 유다 다음으로 욕을 먹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쉽게 대답하기 어렵긴 합니다마는 아마도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도마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도마, 아랍어로 ‘트오마’ 라고 되어있는데 이는 ‘쌍둥이’ 라는 뜻입니다. 그것으로 그가 쌍둥이 중의 하나였음은 거의 분명해 보입니다.

  그는 사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서 베드로나 야고보 같이 중요하게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법 그 존재를 드러냅니다. 특히 공관복음서에는 그 이름만 나타나는데 비해 요한복음에는 그가 말한 것이 기록되어 있고, 그것을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해 줍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야기 중 첫 번째는 11장에 들어있습니다. 11장은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아주 유명한 장이지요.


  나사로가 병들어 위급해지자 그의 누이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급하게 예수님을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상하게도 이틀이나 더 머뭇거리다가 뒤늦게 유대 지방으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는 죽었다. 내가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이 너희를 위해서 도리어 잘 된 일이므로, 기쁘게 생각한다.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믿게 될 것이다. 그에게로 가자.” (요한복음 11장 15절)


  그 말씀을 하시고 난 후 바로 이어서 16절에 도마가 등장합니다.


  “그러자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고 말하였다.” (요한복음 11장 16절)


  그렇습니다.

  나사로의 소생 사건이 있기 직전에 예수께서는 유대 지방에 가셨다가 유대 사람들과 논쟁하던 끝에 돌에 맞아 죽을 뻔 한 기록이 10장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당신 스스로를 선한 목자라 칭하시고, 심지어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10:30)라고까지 선포하시니까 이에 열받은 유대 사람들이 돌을 들어 예수를 치려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다시 유대지방으로 가면 유대인들이 진짜로 예수를 돌로 쳐 죽일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 유대 지방으로 가신다니까 도마가 따라나서면서 말한 것입니다.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


  그렇습니다. 도마는 강렬한 충성심과 용기의 소유자였습니다. 그 누구보다 먼저 예수의 여행길에 따라나섰고, 죽기를 각오하고 주님을 따르자고 선언한 제자였습니다.


 도마가 등장하는 두 번째 장면은 14장입니다. 여기에서 예수께서 놀라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너희에게 말했겠느냐?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요한복음 14장 1~4절)


  참으로 유명한 선언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구절을 암송하고, 이 구절에 근거한 설교를 듣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참으로 어려운 구절입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내용인지 설명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물며 처음 이 말씀을 듣는 제자들이 그 말을 대뜸 알아들었을 리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느닷없이 어디로 가신다고, 갔다가 있을 곳을 예비하면 다시 오신다고,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고 하시니 제자들은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누구도 예수께 대놓고 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도마가 나섰습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맞습니다.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제자들이 무슨 수로 압니까? 더군다나 그것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라면 그걸 평범한 인간인 제자들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도대체 예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를 알 수 없는데, 무슨 수로 그 길을 알 수 있단 말입니까?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이라면 당연히 예수께 물어야 했습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도마는 사실 겸손하고 솔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표현했을 뿐, 공연히 아는 척, 진리를 다 깨달은 척 허세를 부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도마를 야단치시지 않고 바로 놀라운 선포를 하셨던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여러분!

  바로 그 도마가 현장에 없었습니다. 그렇게도 강렬한 충성심과 용기를 갖고 있고, 그 누구보다 겸손하고 솔직했던 제자였던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가 그 날, 곧 주간의 첫날 저녁에, 제자들이 숨어 있던 다락방에 나타나셨던 바로 그 순간에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자기 눈으로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다고 했을 때 도마는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그렇습니다.

  도마는 참으로 솔직하고, 참으로 인간적입니다.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있느냐, 너희들이 본 것은 환상이 아니냐, 난 내 두 눈으로 보아야 믿겠다.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말씀을 하신 뒤에, 예수께서는 그들을 떠나서 몸을 숨기셨다. 예수께서 그렇게 많은 표징을 그들 앞에 행하셨으나,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아니하였다.” (요한복음 12장 36~37절)


  그렇습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보는 것을 믿을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대단한 것을 눈으로 보고 경험한다 하더라도 믿지 못합니다. 특히 믿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아무리 놀라운 일을 보더라도 끝내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보고 믿는 사람은 그래도 나은 편입니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도마도 함께 있었습니다. 문이 잠겨 있었는데, 예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하신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여러분!

  저는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마를 향해 왜 그렇게 믿음이 없느냐고 탓하기 전에 한 가지 물음을 던지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가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나타나셨던 때, 도마는 어디에 가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분명히 강렬한 충성심과 용기를 가진 제자였습니다. 그리고 겸손하고 솔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비겁하게 혼자 살겠다고 도망간 것은 아닐 터인데 그는 어디에 가 있었단 말입니까?


  분명히 그는 그 누구보다 더 큰 충격을 받고 깊은 슬픔에 잠긴 채 이제는 그의 동료들과도 함께 있을 수 없어서 혼자 어둠 가운데 헤매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황폐한 갈보리 산 언덕을 방황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의 십자가가 서 있던 자리에도 가 보았을 것이고, 예수의 무덤이었던 곳에도 가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끊임없이 물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는 왜 죽었는가?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단 말인가?

  그분의 능력은 다 어디로 갔고, 그분의 그 귀한 가르침은 이제 어떻게 되는가?

  그렇다면 주님이 없는 세상은 이제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그렇습니다.

  도마, 그는 다른 제자들이 무서워 다락방에 숨어 있을 때, 문을 걸어 잠그고 꼭꼭 숨어 있을 때, 그는 붙잡혀 죽을지 모름에도 불구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녔습니다. 그렇게 그는 고뇌하고 슬퍼하며 도저히 답을 찾기 어려운 질문을 하며 방황하였고, 그래서 그는 주님을 보았다는 제자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막상 주님이 눈앞에 나타나자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여러분!

  잘 살펴보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 가운데 예수를 ‘주님’ 이라고 부른 사람은 여럿 있지만 예수를 “하나님” 이라고 부른 사람은 도마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가 ‘주님’ 이시오, 동시에 “하나님” 이시라는 고백은 바로 요한복음이 하는 신앙고백의 핵심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1장에서 아예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고백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이 바로 도마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29절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 곧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는 말씀 때문에 도마를 비웃고, 무시하고, 비난합니다마는 도마는 사실 그 누구보다 철저하게 주님을 만나기 위해 내적 투쟁을 벌였고, 끊임없이 진리를 찾기 위해 질문을 던졌고, 그래서 마침내 놀라운 신앙고백을 하기에 이른 인물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오늘의 본문을 근거로 해서 ‘무조건 믿어라’,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고 말하면서 맹목적인 믿음, 무지한 믿음을 좋은 믿음이라고 큰소리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사실은 무엇을, 왜 믿는지도 모르고 믿기에 그 믿음은 뿌리가 약하고, 쉽게 흔들리고, 기복적인 것으로 곧잘 빠져 버립니다. 그러나 도마와 같이 처절한 내적 싸움과 질문을 통해 진리를 깨닫게 되면 그 믿음은 그만큼 깊고 단단해지고, 수준 높은 고백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도마 행전이라고 하는 외경에 의하면 도마는 후에 노예의 신분으로 인도로 팔려가서 거기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창에 찔려 죽음으로써 순교했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일은 오늘날 힌두교 천지인 인도에 성 도마교회가 있고, 그 신도들이 자신들은 도마의 후손들이라고 주장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사실은 도마와 같은 제자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남들이 믿으니까, 목사가 설교하니까, 무조건 믿는 것이 믿음이라니까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인생의 깊은 고뇌는 겪으려 하지 않고, 진리를 찾기 위한 처절한 내적 싸움도 하지 않고, 그래서 얄팍한 신앙 밖에는 갖지 못하는 교인들, 그리고 목사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도마와 같이 진지하고도 고뇌에 찬 질문을 통해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도마와 같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신앙고백을 하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