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년도

2006. 9. 2 / 숯불 곁에서 / 요한복음 21:15-20

람보 2 2015. 3. 31. 23:00

숯불 곁에서


요한복음 21:15-20/2006년 9월 3일



  복음서를 우리가 주의깊게 읽어보면 그 안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등장하고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인물이 바로 베드로라는 것을 누구나 금방 발견하게 됩니다.

  열 두 사도 명단이 나올 때마다 제일 앞에 나오는 사람이 바로 베드로요,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공관복음서는 물론이거니와 특히 요한복음에 오면 참으로 이상하리만큼, 마치 요한복음 저자가 베드로를 편애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베드로가 자주 등장하고,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맨 처음에 부르신 제자들이 나오는데 그중 첫 번째로 부르심을 받은 제자는 안드레였습니다. 그 안드레가 자기 형 시몬을 만나서 말합니다.

  “형,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

  그리고 안드레가 시몬을 예수께로 데리고 오자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로구나.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

  

  무슨 말입니까?

  안드레의 형 이름이 원래 ‘시몬’(Simon)인데 그를 앞으로는 ‘게바’(Cephas 또는 Kephas)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게바’란 ‘바위’ 또는 ‘반석’의 뜻을 가지고 있는 ‘카파’(Kapa)의 음을 그대로 이용해서 번역한 헬라어로서 ‘페트로스’(Petros)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를 갖고 있으니 여기에서 바로 베드로라는 이름이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마태복음과 비교해 보십시오.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시몬을 베드로라고 부르신 것은 그 유명한 신앙고백 사건에서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는 물음을 거쳐 그렇다면 너희는 인자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고 물으신 것에 대해 시몬이 한 대답, 곧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통해 예수께서 시몬을 베드로라고 부르시면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기록된 곳은 마태복음 16장입니다. 그리고 16장이라면 예수의 공생애가 후반부로 넘어갔을 때이고, 그 고백에 이어 곧바로 죽음과 부활에 대한 주님의 예고가 나오기 시작하지요. 그러니까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베드로를 반석으로 삼으신 것은 공생애 후반으로 넘어오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기자는 아예 1장에서, 그것도 예수께서 시몬을 처음 만나자마자 ‘게바’라고 부르심으로써 그가 처음부터 교회의 반석이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6장으로 넘어가면 아주 안타까운 사건이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5병 2어 사건을 행하시고 난 후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라는 주제로 길게 설교를 하셨는데 그 끝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제자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떠나갔고, 더 이상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물으셨다.

  ‘너희까지도 떠나가려 하느냐?’ “


  그렇습니다.

  빵을 얻어먹을 때는 예수를 왕으로 삼겠다고 까지 열광했던 무리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말씀이 어렵다고 해서 다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 두 제자만 남게 되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는 것입니다.

  ‘너희까지도 떠나가려 하느냐?’


  여러분!

  바로 이때 시몬 베드로가 등장합니다. 그는 앞으로 나서서 예수께 대답합니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알았습니다.” (요한복음 6:66-69)

  그렇습니다. 여기 나오는 베드로는 진정으로 제자들의 대표요, 또 반석에 합당한 대답을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13장에는 베드로가 두 번이나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실 때 내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한다고 나섰을 때가 한 번이요, 또 한 번은 예수께서 베드로의 배반을 예고하셨을 때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께 물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나중에는 따라올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왜 지금은 내가 따라갈 수 없습니까? 나는 주님을 위하여서는 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  (요한복음 13:36-38)


  여러분!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한 가지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구절이 단순히 베드로 개인에게 하신 말씀인가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개인만이 예수를 모른다고 하리라는 말씀이고 나머지 제자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하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가 다 아는 대로 베드로만 직접 대놓고 ‘나는 예수를 모른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것도 계집종과 같은 보잘 것 없는 사람 앞에서 예수를 부인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베드로는 예수의 재판 현장에 따라가기라도 했습니다. 다른 나머지 제자들은 아예 재판정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따라서 부인할 계기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아예 멀리 도망쳐 버린 나머지 제자들이 더 비겁하고, 더 못된 것이지요.

  예수께서는 그걸 미리 아셨을 것이고, 그 모든 제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를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의 대표로서 배반하는 일을 하게 된 셈입니다.


  20장으로 넘어가면 요한복음 기자는 참으로 기가 막힌 방법으로 베드로를 앞에 내세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가 함께 무덤으로 갔습니다. 20장 4절에 의하면 둘이 함께 뛰었는데,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서, 먼저 무덤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 제자는 궁금해서라도 도착하자마자 무덤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 상식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5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몸을 굽혀서 삼베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으나,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얼마 후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 왔고, 그가 먼저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삼베와 수건이 따로 있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제서야 먼저 무덤에 다다른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라고 성서 기자는 기록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난주에 보았던 21장 1-14절의 말씀에서도 예수를 알아본 것은 예수가 사랑하시던 제자였는데 그 말을 듣고 물에 뛰어든 것은 베드로였고, 또 예수께서 고기를 가져오라고 하셨을 때 배에 올라가서 그물을 땅에 끌어내린 것도 다름 아닌 베드로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바로 베드로가 사도들의 유일한 대표요, 또 교회의 지도자임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적인 기록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본문은 분명히 베드로가 주님께로부터 사도권을 위임받은 대표자임을 보여주는 기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여기에서 문제가 생겨납니다. 베드로가 사도들의 유일한 대표요 교회의 지도자임이 분명한 데 그에게는 결정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보통 사람이라면, 아니 베드로가 아니고 다른 사도 중의 한 사람이라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는지 모르지만 사도들의 대표요, 교회의 지도자인 베드로에게는 크나큰 결격사유가 되고, 틀림없이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바로 이 문제를 풀어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시고, 그 내용이 바로 오늘의 본문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소위 삼중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의 세 번 질문과 베드로의 세 번 대답 그리고 예수의 세 번 임무부여가 그것입니다. 물론 이 형식은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것과의 대비임은 금방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다시 한 번 본문을 잘 살펴보십시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 말 번역으로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질문이 같게 번역되어 있지만, 희랍어 원문으로 보면 두 번 째는 “agapas me?"로 되어 있고, 세 번째는 ”phileis me?" 라고 되어 있어서 두 번째를 더 제대로 번역하자면 “네가 정말로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번역할 수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쨌든 이 세 번의 질문은 그 순서가 우리의 상식과는 조금 다른 것으로 보여 집니다. 사실은 순서가 바뀌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먼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고, 그렇다고 하면 다시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라고 물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한 번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서저자는 굳이 오늘의 본문 순서대로 기록했으니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 번째 질문, 즉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은 좀 더 정확히 번역하자면 “네가 나와 친하냐?” 또는 “네가 나의 친구냐?”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세 가지 질문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네가 나의 친구냐?”


  여러분! 여기서 나타나는 미묘한 변화를 보고 계십니까? 같은 질문이지만 사실은 질문이 갈수록 예수의 인격에로 집중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께서 베드로를 사도들의 대표로 삼으시고, 교회의 우두머리로 삼으시는 것은 주님과의 신뢰 깊고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바탕으로 한다는 뜻입니다. 이 친분관계는 다른 인간적 자질, 특히 통솔능력이나 지도능력 같은 것보다 우선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쓰시던 베드로라는 이름 대신 베드로가 원래 가지고 있던 이름, 바로 “요한의 아들 시몬” 이라는 이름을 세 번씩이나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주님을 사랑한다든지, 내가 남들보다 더 교회에 오래 다니고 헌금을 많이 바치고 직분도 높다든지 하는 것은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예수께서 인정해 주시는 그 무엇, 마음으로만 읽을 수 있는 그 무엇, 다시 말해서 내가 주님과 얼마나 서로를 신뢰하고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유지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바로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라고 세 번씩이나 대답하면서 세 번째 대답에서는 이렇게 덧붙인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끝으로 짚을 것 하나.

  오늘의 본문은 숯불 곁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베드로는 숯불 곁에서 예수님께로부터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곧바로 베드로에게 며칠 전에 있었던 배반 사건을 생각나게 했을 것입니다. 그것도 하필이면 숯불 곁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숯불!

  우리의 피곤한 육신을 따뜻하게 해 주는 숯불, 우리에게 맛있는 생선과 빵을 먹게 해 주는 숯불.

  숯불은 일신의 안일과 평안함과 배부름을 추구하는 상징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바로 그 숯불 곁에서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고,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결국 우리가 세상적인 욕심과 육신적인 평안함을 따를 때 우리는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바로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진정 당신을 사랑하는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기독교인의 수가 일 천 만이 넘는다고 하는데 그중 따뜻한 숯불 곁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겉으로는 교회에 다니지만 현실의 삶에서는 주님과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이제 우리는 주님과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두텁게 해가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주님께 가까이 가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욕심과 육신적인 평안함 때문에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는 않는지 끊임없이 되돌아보면서 일상의 삶 속에서 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일꾼으로 삼아주실 것입니다.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과 친하게 지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