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시간
요한복음 12장 20절-36절/2006년 1월 8일
얼핏 보기에 오늘의 본문은 별로 통일성이 없어 보입니다. 다시 말해서 20-26절까지의 내용과 27-36절까지의 내용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고 20-26절 안에서도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예수께서 아주 엉뚱한 반응을 보이시는 것 같습니다.
20절에 의하면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이 몇”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그리스 사람들은 물론 유대인이 아닙니다. 그리스 사람이니까 당연히 이방인이고 따라서 나면서부터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도 아니었을 것이고, 당연히 할례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 중 유대교에 호감을 갖고 유일신 하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명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온 것입니다.
물론 그들도 나사로 소생사건의 소식을 들었을 것이고,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만나러 찾아온 것이고, 열 두 제자 중 빌립에게로 가서 청하였던 것입니다.
“선생님, 우리가 예수를 뵙고 싶습니다.”
왜 하필이면 빌립일까? 물론 왜 다른 제자가 아니고 빌립을 찾아왔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학자들을 빌립이라는 이름이 그리스식 이름이기 때문에 그리스 사람들이 빌립을 찾은 것이라고 말합니다마는 성경 어디에도 그 이유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리스 사람들의 부탁을 받은 빌립은 안드레에게 가서 말했고, 둘이 함께 가서 예수님께 이 사실을 전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선생님을 뵙기를 청합니다.”
자,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찾아온 그리스 사람들을 반갑게 맞아들이셨을 것이고, 좋은 가르침을 주셨을 것입니다. 적어도 이방인들 중에서 처음 찾아온 제자들이니까 굉장히 뜻깊은 사건으로 생각하고 따뜻하게 맞아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께서는 전혀 엉뚱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오라는 말씀도 없으셨고, 누군지 확인하는 인사도 없으셨습니다. 안드레와 빌립으로부터 그 말을 듣고 나서 예수께서는 참으로 엉뚱한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주실 것이다.”(23-26절)
그렇습니다.
드디어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그렇게도 아직 내 때가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던 예수께서 이방인들이 당신을 찾아왔다는 말을 들으시자마자 이제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서에서 “때”라는 시간 단위는 단순한 연대기적 의미를 초월하는 종교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있어서 결정적 단계를 의미하는 성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와 함께 도래하는 메시아의 때는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는 때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첫 설교로 “때가 찼다”라고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성서가 말하는 “때”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성취하실 예수의 수난과 영광의 때입니다.
이때는 달력에 나타나는 어느 일정한 때를 가리키기 보다는 마치 임신한 여인의 진통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알려주는 때가 되듯이, 예수의 활동의 완전하고 최후적인 국면 전체를 나타내 줍니다.
이때는 그 누구도 모르는 때이고 하나님께서 혼자 정하신 때이며,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신 하나님의 때입니다. 바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시기 위해, 예수께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이때를 받아들이십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때에 왔다. ”
27절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때는 그분이 고난을 당하기로 결단하는 때이며, 그렇기에 동시에 그분의 영광의 때이며, 그분이 인류 구원을 완성하는 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실현하시는 예수께서는, 이때를 “나의 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잔치가 있었다. 예수의 어머니가 거기에 계셨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그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니,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께 말하기를 ‘포도주가 떨어졌다’ 하였다. 예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내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복음 2:1-4)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기적과 예언을 행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때와 관련시켜 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은 이상, 그분을 붙잡으려는 시도나 그분에게 돌을 던지려는 행위는 헛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잡으려고 하였으나, 아무도 그에게 손을 대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복음 7:30)
“이것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궤가 있는 데서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그를 잡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아직도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복음 8:20)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려는 인간의 여러 가지 계획은, 이같은 하나님의 결정적인 때 앞에서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자, 이제 예수께서는 당신이 영광을 받으실 때가 온 것을 아셨습니다. 곧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가 온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죽음과 부활이라고 하는 이 신비를 제자들에게 어떻게 알려줄 것이며, 어떻게 깨우쳐줄 것인가? 이때 예수께서 택하신 방법, 그것이 바로 밀알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그렇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즉 땅에 파묻히고, 스스로 썩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한 알로 그냥 남아 있을 뿐입니다. 땅에 묻히고, 그 속에서 싹이 터 오르는 변형과정 그리고 파괴과정을 겪지 않으면 한 알의 씨앗으로 남아 있을 뿐 그 이상의 아무 것도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땅에 묻히고 새로운 싹이 터 오르면 거기에서 하나의 식물로 자라나 수많은 낟알들이 맺어지고, 그 낟알들마다 처음의 씨앗이 지녔던 생명을 지니고 살아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씨앗에게 넘겨주는 힘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께서도 죽지 않으셨다면 혼자서 따로 떨어져 있는 유한한 개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땅 속에서 죽는 것이 밀알의 종말이 아니듯이 십자가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이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죽음과 부활은 동일한 신비의 양면인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영생에 이를 것인가요? 예수께서 분명히 대답하셨습니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25-26절)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예수께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예수처럼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죽음으로 영생을 얻는 것, 그것이 제자의 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길이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길이기에 예수께서도 인간적인 고뇌를 겪으셨습니다. 그래서 27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
그렇습니다.
제대로 된 신앙의 길은 결코 쉽고 편안한 길이 아닙니다. 힘들고 어려운 길입니다. 주님 가신 길이 그러했던 것처럼 주님을 따르는 길 또한 고난과 환난의 길입니다. 사도 바울이 일생을 돌아보며 고백했던 고난의 길을 우리 모두 기억합니다.
“내가 정신 나간 사람같이 말합니다마는, 나는 더욱 그렇습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고, 감옥살이도 더 많이 하고, 매도 더 많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서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이요,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돌로 맞은 것이 한 번이요,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요, 밤낮 꼬박 하루를 망망한 바다를 떠다녔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는,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 그 밖의 것은 제쳐놓고서라도, 모든 교회를 염려하는 염려가 날마다 내 마음을 누르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3-28)
요즘 예수 믿으면, 신앙생활 잘 하면 잘 살게 되고, 복 받는다고 설교하시는 목사님들이 많습니다마는 만약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신앙생활을 잘 못한 사람일 것입니다.
자, 이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기로 마음의 결심을 굳히셨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내가 이미 영광되게 하였고, 앞으로도 영광되게 하겠다.” (28절)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인자가 누구입니까?” 곧 “당신이 바로 그리스도입니까?” 라는 물음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아직 얼마 동안은 빛이 너희 가운데 있을 것이다. 빛이 있는 동안에 걸어 다녀라. 어둠이 너희를 이기지 못하게 하여라. 어둠 속을 다니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빛이 있는 동안에 너희는 그 빛을 믿어서, 빛의 자녀가 되어라.” (35-36절)
그렇습니다.
이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바로 지금, 빛이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야 하고, 빛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로 지금이 결단의 시간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올바른 선택, 올바른 결단을 하셨습니다. 복음 안에서, 진리 안에서 올바른 결단을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 날까지 이 은혜 안에서 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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